수능·학원 문제 ‘판박이 의혹’ 반복… 평가원은 늘 “우연의 일치”
교육부는 9일 2023학년도 수능 영어 지문이 그해 ‘일타 강사’ 문제집과 이듬해 출간 예정인 EBS 교재에 동시 포함된 문제와 관련해 ‘사교육 카르텔 긴급 점검 회의’를 개최했다. 오석환 교육부 차관은 이날 “가장 공정해야 할 수능에서 의혹이 발생해 국민께 송구하다”며 “수능·모의평가 출제와 EBS 교재 집필과 관련된 모든 과정에서 사교육 업체와의 유착 가능성을 더 철저히 단속하겠다”고 밝혔다. 이 회의에는 수능을 주관하는 한국교육과정평가원과 EBS 관계자도 참석했다.
그동안 수능과 수능 모의평가 문제가 특정 학원이나 강사의 모의고사와 겹친다는 의혹은 계속 제기돼왔다. 지난해 치러진 2024학년도 수능 수학 12번도 대형 입시 업체 A사의 모의고사 문제와 비슷하다는 논란이 있었다. 수능과 A사 모의고사 모두 곡선으로 둘러싸인 도형의 넓이를 구하는 문제다. 수능 직후 수험생들이 모인 커뮤니티에선 “문제를 풀다가 사설 모의고사 문제를 푼 기억이 떠올라 쉬웠다” “EBS가 아니라 사설 모의고사 연계”라는 반응이 많았다. 정종영 EBS 수학 강사(서울 인창고)는 “두 문제가 흔한 개념을 다루고 있지만 문항에 흔하지 않은 표현을 사용해 비슷하게 느껴진다”며 “학원 모의고사로 이 문제를 풀어본 학생이 시험장에서 확실히 유리했을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평가원은 수능이 끝난 뒤 이 문제의 적절성 여부를 살펴보지 않고 넘어갔다.
3년 전 평가원이 출제한 2022학년도 6월 모의평가에서도 학원 모의고사와 비슷한 지문이 나와 논란이 됐다. 6월 모의평가 영어 32번 지문이 A사의 모의고사 지문과 일치했다. 두 문제는 빈칸에 들어갈 문장을 고르라는 문제 유형까지 같았다. 10여 년 전인 2011학년도 수능 영어 24번에서도 대형 입시 업체 B사의 고2 모의고사 문제와 유사한 지문이 나왔었다. 도입부 첫 줄만 달랐다. ‘빈칸에 적합한 문구를 고르라’는 문제 유형과 빈칸의 정답도 거의 일치해 논란이 적지 않았다.
수능과 모의평가를 둘러싼 ‘유사성 논란’이 한두 번이 아닌데도 평가원은 뭉개거나 유야무야 넘어가곤 했다. 2011학년도 수능 영어 24번도, 2023학년도 수능 영어 23번도 평가원은 “영미권 저서 원문 일부를 발췌하는 과목 특성상 생긴 ‘우연의 일치’”라고 했다. 평가원은 수능 직후 수험생의 이의 신청을 받아 심사해 문제가 없으면 정답을 확정한다. 2023학년도엔 수험생이 이의 신청한 663건 중 127건이 영어 23번의 유사성 논란이었지만, 당시 이 문제는 심사조차 안 했다. ‘문항 오류’가 있는 것만 문제 삼고, 입시 학원과 출제진의 유착이 의심되는 ‘유사 문제 논란’은 심사 대상으로 판단하지도 않았던 것이다. 당시 출제위원장이던 박윤봉 충남대 화학과 교수는 본지 통화에서 “영어 23번은 심사 대상이 아니었기 때문에 유사성 논란이 있다는 사실도 몰랐다”고 했다.
그러나 평가원이 ‘판박이 논란’을 유야무야 넘어가는 사이 학원들은 ‘수능 적중 마케팅’을 벌였다. ‘영어 23번 논란’으로 경찰에 수사 의뢰된 일타 강사는 수능 직후 소셜미디어에 “(내 모의고사) 풀고 가신 분들 풀길 잘했다 싶으시지?” “트렌드 분석은 그냥 나를 믿으면 된다”는 글을 올렸다.일부 학원과 강사들은 EBS 수능 연계 교재에 나온 내용까지 자신들이 맞힌 지문인 것처럼 과장 광고를 했다. 교육계에서는 “평가원의 부실 검증이 ‘수능 사교육’을 키워준 꼴이 됐다”는 지적이 나온다.
평가원은 유사 문제 논란이 일 때마다 “시중에 나온 모든 문제집을 검토하고 수능과 겹치지 않도록 걸러낸다”고 말했었다. 그러나 ‘수능 영어 23번’에 대해 평가원은 “강사 개인이 판매하는 문제집까지 보긴 힘들다” “모의고사가 수능 직전인 10월에 출판돼 검토하지 못했다”고 해명했다. 하지만 교육계에선 “일타 강사의 모의고사를 풀려고 수많은 수험생들이 학원에 다니는데, 그걸 살펴보지 않는 게 말이 되느냐”는 지적이 나온다. 정부 감시가 느슨한 사이 일타 강사들은 수능 출제 경험이 있는 현직 교사들에게 돈을 주고 모의고사를 사들이며 ‘문제 장사’를 해왔다. 박윤봉 교수는 “수능이 30년간 운영되면서 학원 문제들과 겹치지 않는 것을 출제하기가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면서 “현재 시스템으로는 ‘유사 문제’나 오류 논란 등이 반복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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