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과학의 선구자들] 조선에 ‘아인슈타인 쇼크’… 최윤식은 전국 돌며 상대성이론 알렸다

민태기 에스앤에이치연구소장·공학박사 2024. 1. 10.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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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1호 수학박사 최윤식

1922년 아인슈타인이 일본을 방문했다. 일제강점기 우리 선조들은 나라 잃은 유대인에게 동질감을 가졌다. 이때 유대인이 팔레스타인에 히브리 대학을 세웠고, 이를 주도한 인물이 아인슈타인이라는 사실이 알려진다. 이스라엘을 건국하기 전에 대학부터 만든 것이다. 대체 아인슈타인이 누구길래, 상대성이론이 얼마나 대단하길래 없던 나라의 대학을 세우는지 놀랐다. 이런 아인슈타인의 일본 방문에 우리 신문들은 연일 일정을 보도하고 특집 기사를 실었다. 한 달 동안 일본 전역에서 열린 아인슈타인의 강연은 대성황이었다. 청중 중에는 도쿄제국대학 수학과에 유학 중이던 23세 최윤식이 있었다.

최윤식

1923년, 최윤식과 도쿄 유학생들은 여름방학 동안 조선에서 상대성이론 강연을 추진한다. 식민지 현실에서 아인슈타인이 우리 민족에게 주는 의미를 재빨리 파악한 것이다. 비록 아인슈타인이 방한하지는 못했지만, 유학생들의 강연에 청중의 호응은 엄청났다. 7월 7일 부산항에 도착한 당일 500명이 참석한 부산 강연을 시작으로, 8일 마산, 9일 진주, 10일 밀양 강연에 수백 명씩 모였고, 공주와 청주를 거쳐 무려 1000여 명이 참석한 14일 수원 강연 후 15일 서울에 도착한다. 그들의 강연은 가는 곳마다 대대적으로 환영받았다. 다음은 1923년 7월 15일 자 조선일보 기사.

‘한위건, 김영식, 최윤식, 세 사람은 지난 9일 하오 6시경에 진주에 도착하야 진주좌에셔 저녁 8시 반부터 문화 대강연을 개최하얏는대 젊은 사자후를 들으랴고 시작 전부터 청객은 가슴을 졸이며 장내에 만원의 대성황을 이른 중 김의진씨의 개회사와 사회로 강연이 시작되얏는대 강연자들이 열렬한 웅변을 토할 때마다 올소! 올소! 하고 박수갈채의 소래는 장내를 진동케 하얏스며 수천 청중으로 하야금 엄청난 감동을 주고 하오 12시경에 대 성황리에 산회하얏는대 당일 연제와 연사 성명은 아래와 같다더라. 1. 절대(絶對)와 상대(相對), 도쿄제국대학 이과생 최윤식군. 2. 문화운동의 경제적 고찰, 와세다대 정경과 김영식군. 3. 개성 발전과 사회 발달, 와세다대 정경과 한위건군.’

최윤식의 상대성이론 강연은 김영식과 한위건의 시국 강연으로 이어졌다. 이들의 과학 강연 의도는 명확했다. 결국 16일 서울에서 경찰과 충돌이 발생한다. 연단에 경찰이 앉아 연사의 발언에 계속 참견하며 제지하자 관객들의 항의가 속출하고 강연은 중단된다. 굴하지 않고 강연단은 일정을 강행했다. 불볕더위와 큰비에도 끊임없이 몰려드는 청중을 위해 독창과 바이올린 연주로 분위기를 잡았다. 최윤식의 강연은 어려웠지만, 모두가 끝까지 경청했다. 7월 17일 인천 강연을 보도한 동아일보 기사는 왜 이렇게 상대성이론에 집착했는지 절박함마저 느껴진다.

1923년 7월 15일 자 조선일보. '학우회강연대성황'이라는 제목으로 조선에서의 상대성 이론 강연을 소개하고 있다. 한위건, 김영식, 최윤식 세 사람의 이름이 적혀 있다. /조선일보DB

“세 시간 동안을 계속한 최윤식씨의 강연은 첨부터 끗까지 수학 공식으로 발뎐되여 나갓슴으로 수학 지식이 잇는 사람에게는 그리 어렵지 안타 하나 대부분은 역시 알어듯지 못하는 헛정성만 보엿다. 그러나 청중의 대부분을 점령한 학생들이 끗끗내 필긔를 계속함은 보는 사람과 말하는 사람으로 하야금 저윽히 마음을 진덧게 하엿다.”

강연은 계속되어 18일 개성, 19일 연백을 거쳐, 20일 해주와 21일 사리원, 22일 평양, 24일 진남포, 25일 정주, 26일 최윤식의 고향 평안도 선천을 마지막으로 한 달간 조선 전역을 달구었다. 500명이 참석한 7월 25일 평안도 정주 강연은 당시 동아일보 정주 지국장 방응모의 사회로 진행되었다. 상대성이론 강연 사회를 맡은 신지식인 방응모는 무언가를 깨달았는지 이듬해 광산 개발에 뛰어들어 금광을 발견한다. 1933년 방응모는 광산을 매각해 조선일보를 인수했다.

최윤식의 전국 순회 강연과 함께 일어난 상대성이론 열풍은 문인 이광수에게까지 영향을 미친다. 그는 1927년 6월 <동광>에 <아인스타인의 상대성 원리, 시간 공간 및 만유인력 등 관념의 근본적 개조>라는 장문의 글을 싣는다. <동광>은 안창호가 주도한 수양동우회의 기관지로 1926년에 시작된 잡지다. 1928년 8월 22일 <중외일보>는 ‘상대성이론을 가르키라’는 사설을 실었고, 1932년 11월 <동광>은 일식 관측으로 상대성이론의 빛의 중력 굴절을 증명한 에딩턴의 <공간 시간 인력(1923)>을 필독서로 추천한다. 이제 아인슈타인은 지식인의 필수 교양이 되었다.

1926년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최윤식은 5년간 휘문, 전주고보에서 교사를 하며 대중 과학 강연을 멈추지 않았다. 1927년 경성 방송국이 탄생하자마자 라디오 강연을 시작했다. 미국에서 라디오 방송이 시작된 지 겨우 몇 년 뒤 일이다. 최윤식은 1931년 경성공업전문대학 교수가 된 뒤에도 수시로 라디오에서 최신 과학 동향을 알렸고, 1939년 경성광산전문학교 교수로 옮긴 뒤에는 과학 대중화를 위해 ‘어린이 과학’ ‘과학과 여성’과 같은 주제로 라디오에 출연했다. 1940년 1월 3일 조선일보는 최윤식을 비롯한 학계 인사들과 학술 대담을 했다. 최윤식과 학자들은 당시 유일한 대학이던 경성제국대학의 변화를 요구하며 우리나라에도 학술 단체와 학회가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1945년 8월 16일 해방 다음 날 우리 민족 최초의 학술 단체 조선학술원이 결성된다. 오래전부터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에 신속히 만들 수 있었다. 여기에서 최윤식은 유일한 수학자였다. 일제강점기 경성제국대학에는 수학과가 없었지만, 이들은 경성대학으로 이름을 바꾸고 1945년 가을 처음으로 수학 강의를 시작한다. 하지만 1946년 ‘국립종합대학 설치 계획안(국대안)’을 둘러싸고 학계는 이념 갈등에 휩싸인다. 어렵게 시작된 경성대 수학 강의였지만 교수들 모두가 월북하자 경성광산전문학교 교장이던 최윤식이 나섰다. 최윤식은 국대안으로 경성대학이 확대 개편된 서울대학교에서 수학과 초대 주임교수를 맡아 수습에 나섰다.

혼란에도 1946년 10월 최윤식은 조선수물학회를 창립하고 초대 회장으로 자신의 길을 묵묵히 갔다. 수학과 물리학을 합친 수물학회라는 명칭은 일본에서 유래한 것이다. 나중에 일본수물학회가 일본수학학회와 일본물리학회로 분리되자, 조선수물학회 역시 1952년 대한수학회와 한국물리학회로 분리되고, 최윤식은 다시 대한수학회의 초대 회장을 맡았다. 그리고 일본 교과서에 의존하던 수학 교육에서 벗어나 독일과 프랑스, 미국 등 서구 체계를 수입하며 오늘날 대한민국 수학 교과과정의 토대를 갖췄다.

그러나 정치권은 최윤식을 가만두지 않았다. 1954년 제자 정치인들이 인사차 방문해서 지나가는 말로 숫자 203의 3분의 2를 사사오입하면 얼마냐길래 큰 의미를 두지 않고 135라고 답한다. 정족수 이야기가 아니었지만, 자유당은 이를 사사오입 개헌의 근거로 악용하며 최윤식은 결국 논란에 휩싸인다. 학계 제자들은 항의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그는 묵묵히 학자의 길을 가면 언젠가 세상이 알아줄 것이라고 말했다. 최윤식은 4·19 직후인 1960년 8월 자택에서 뇌출혈로 사망했다. 우리 수학의 토대를 쌓고 체계를 만든 선도적 인물로 기억되는 최윤식. 무엇보다 그는 100년 전 상대성이론으로 시대의 어둠을 극복하려던 선각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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