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로] 어느 신참 판사가 겪은 황당 사건

최원규 논설위원 2024. 1. 10.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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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참 판사가 한 주에 6건 선고하자 동료 판사들 “그러면 안 된다”
‘3건 룰’ 내세워 하향 평준화 요구… 사건 처리 담합하더니 압박까지
대법원 모습. /뉴스1

대형 로펌 변호사로 있다가 지난해 판사가 된 사람이 얼마 전 겪은 일이다. 수도권 법원 민사합의부에 배치된 그는 일주일에 6건가량을 선고했다고 한다. 대단한 사명감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로펌에서 일하던 정도만 하면 간단한 사건들은 그 정도 선고할 수 있을 것 같았다고 한다. 그런데 동료 배석판사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그에게 “그러면 안 된다” “당신이 그러면 우린 뭐가 되느냐”고 했다고 한다. 전국 법원 민사합의부에서 불문율로 자리 잡은 ‘일주일에 3건 선고’ 룰을 깼다는 것이다. 당황한 그는 왕따가 될까봐 선고 건수를 절반으로 줄였다. 동료 판사들의 ‘하향 평준화’ 요구에 맞춘 것이다. 무조건 선고를 빨리 한다고 좋은 건 아니지만 충분히 할 수 있는데 안 하는 것은 분명히 문제가 있다.

이 ‘3건 룰’은 지난 ‘김명수 사법부’에서 생긴 것이다. 워라밸을 중시하는 배석판사들이 야근을 밥 먹듯 했던 과거 근무 관행을 받아들일 수 없다며 만들었고, 이들을 이끄는 부장판사들은 “어쩔 수 없다”며 묵인했다. 판사들이 사실상 일 적게 하자고 담합한 것이다. 그러더니 이젠 그걸 지키지 않는다고 동료 판사를 압박하는 일까지 생겼다. 판사들이 이래도 되나. 이례적인 경우일 수 있지만 그런 분위기가 있다는 자체가 심각한 문제다.

사실 아주 복잡한 사건은 일주일에 한 건 선고하기도 어렵다. 문제는 정량적으로 3건 룰을 정한 데 있다. 판사들이 그 수치만 맞추려고 쉬운 사건만 먼저 선고하게 돼 자연스럽게 장기 미제 사건이 늘게 된 것이다. 2년 내에 1심 판결이 나오지 않은 장기 미제 민사 사건이 김명수 대법원장 취임 후 5년간 3배로 늘어난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같은 기간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부에서 5년 넘게 판결을 내리지 않은 ‘초장기 미제’ 사건도 5배가량 늘었다. 판사는 편해졌지만 사건 당사자들은 재판 지연으로 고통받게 된 것이다. 지금도 묵묵히 최선을 다하는 판사들이 있지만 그렇지 않은 판사들이 는 것 또한 사실이다. 조희대 대법원장이 신속·공정한 재판을 최우선 과제로 내세우고 있지만 이 분위기를 깨지 않으면 재판 지연 문제는 해결하기 어렵다.

과거 법원은 고법 부장판사 승진제로 판사들을 독려했다. 능력 있고 성실한 판사들을 차관급 고법 부장판사로 승진시키는 제도였다. 하지만 사법 관료화를 부추긴다는 지적이 있어 결국 김 전 대법원장 때 폐지됐다. 장단점이 분명한 제도여서 되살리기는 쉽지 않다. 그렇다고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제대로 판사들을 평정해 연임·보직·전보 등 인사에서 이익과 불이익을 주면 된다.

법원조직법에도 판사 평정을 실시해 그 결과를 인사 관리에 반영하도록 돼 있다. 하지만 김 전 대법원장 시절 법원장을 판사 투표로 뽑는 법원장 후보 추천제를 실시하면서 평정권자인 법원장들이 판사들 눈치보느라 평정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 그러니 워라밸에만 관심 두는 판사가 늘어나고, 사명감 갖고 일하는 판사들은 “문제 법관을 걸러내지 못하는 상황에 힘이 빠진다”고 한 것이다. 더구나 우리법·인권법 출신 등 특정 성향 판사들만 중용하는 ‘코드 인사’로 일선 판사들의 박탈감은 더 커졌다. 법원장들이 평정을 제대로 하지 않은 것은 법을 지키지 않은 것이다. 이제부터라도 법대로 해야 한다.

판사들도 ‘3건 룰’을 폐지해야 한다. 이건 암묵적인 룰일 뿐이어서 판사들이 없애겠다고 하면 그만이다. 신속·공정한 재판은 헌법이 규정한 판사의 책무인데 이런 룰이 있다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는다. 판사는 단순한 직업인이 아니다. 국가를 지탱하는 사법의 중추다. 그런 사명감을 판사들이 회복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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