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희곡의 아버지는 잊고 싶었을지 몰라도… 독자들에겐 선물같은 장편
가난한 의대생 시절 범죄소설 신문 연재
유일한 장편… 출간 후 한번도 언급 안 해
작가만의 색채로 역동적 드라마 펼쳐내
"혹시 잠깐,” 핏기 없는 얼굴을 한 젊은이가 건물 입구에서 왕처럼 서 있는 관리인에게 주저하면서 말을 꺼냈다. 모스크바의 악명 높은 추위를 뚫고 온 것임에 틀림없었다. “편집장을 만나 뵐 수 있을까요?” 그의 왼손에는 글이 빼곡하게 쓰인 종이 뭉치가 들려 있었다.
“1880년 4월 어느 날 오후, 수위인 안드레이가 내 사무실로 들어와서 편집부에 어떤 신사가 와서 편집장을 만나게 해 달라고 한다는 말을 조심스럽게 전했다. ‘모자를 단 배지로 보아 공무원이 틀림없습니다.’ 안드레이가 덧붙여 말했다.”
자신의 유일한 장편 범죄소설임에도, 그는 출간 이후 단 한 번도 ‘사냥이 끝나고’를 언급하지 않았고 자신의 작품집에도 수록하지 않았다. 어쩌면 가난한 의대생 시절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서, ‘먹고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썼던, 잊고 싶은 과거였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세계 3대 단편작가이자 현대 희곡의 아버지로 꼽히는 체호프의 유일한 장편 범죄소설 ‘사냥이 끝나고’(최호정 옮김, 키멜리움·사진)가 최근 완역 출간됐다. 주로 체호프의 단편소설과 희곡 중심으로 작품이 유통되는 상황에서 반갑지 않을 수 없다.
소설은 예심 판사 출신의 의문의 남자 이반 페트로비치 카믜셰프가 신문에 싣고 싶다며 소설 한 편을 들고서 신문사 편집부로 찾아오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화자인 편집장은 바쁜 시간 속에 소설을 읽지 못하다가 여름 별장으로 가는 길에야 비로소 소설을 펼쳐 든다.
“‘인사를 드리죠.’ 나는 일어나서 그녀에게 다가갔다. ‘나는 지노비예프입니다. 그리고 이쪽은 내 친구 카르네예프 백작이고요. 초대도 받지 않았는데 당신의 예쁜 집으로 쳐들어와서 미안합니다. 물론, 우리가 천둥 치는 폭우에 쫓기지 않았다면 이러지는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 집이 무너지지는 않는 걸요!’ 웃으며 내게 손을 내밀면서 그녀가 말했다. 그녀는 내게 매력적인 치아를 드러냈다. 나는 그녀 옆 의자에 앉아 우리가 길에서 예기치 않게 폭풍우를 맞게 된 이야기를 들려줬다. 우리는 날씨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그것이 모든 시작의 시작이었다.”
카믜셰프의 원고 속에는 러시아적이고 뒤틀린 인간 군상들이 생생하고 역동적인 드라마를 펼쳐가기 시작한다. S현의 예심판사 세르게이 페트로비치 지노비예프, 그의 친구 알렉세이 카르네예프 백작, 영지 관리인 표트르 예고리치 우르베닌, 백작의 심부름꾼 애꾸눈 쿠지마, 남성들의 시선을 한 몸으로 받는 ‘붉은 옷을 입은 아가씨’인 산림 관리인 딸 올가 니콜라예브나…. 젊은 올가는 50대의 우르베닌과 결혼 당일 자신이 비극의 운명으로 가는 열차에 올라탔다는 것을 홀연히 깨닫지만 이미 기차는 떠난 뒤였다.
"오늘 난 깨달았어요. 오늘에야! 왜 어제 알지 못했을까요? 지금은 모든 게 돌이킬 수 없고, 모든 걸 잃고 말았어요! 모든 걸, 모든 걸! 내가 사랑하고 나를 사랑하는 남자와 결혼할 수 있었는데!”
언어와 육체의 향연 속에 어두운 범죄가 하나씩 베일을 벗기 시작하고, 급기야 사냥하고 난 뒤 많은 남성들의 가슴을 뛰게 했던 올가가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된다. 그녀를 유혹하려 했던 백작, 젊은 아내의 부정을 확인한 우르베닌, 사건 현장 부근에서 옷에 묻은 피를 지우던 쿠지마, 그것도 아니면 수사를 이상하게 지연시키는 예심 판사…. 범인은 과연 누구일까.
트로이전쟁을 촉발한 그리스 왕비 헬레네와 트로이 왕자 파리스의 연애 행각을 패러디한 자크 오펜바흐의 오페라 ‘아름다운 엘렌’이 마지막을 향하던 순간, 열세 살 소년의 가슴은 알 수 없는 흥분으로 사로잡혔다. 타간로그의 극장에서 오페라 ‘아름다운 엘렌’을 감상하던 소년은 오페라의 막이 다 내릴 때까지 뛰는 가슴을 부여잡고 있어야 했다.
소년은 이후 문학과 연극에 급속히 빠져들었다. 연극에 흥미를 느껴서 직접 무대에 서기도 했고, 짧은 희곡을 쓰기도 했다. 열다섯 살 때부터는 큰 형과 함께 문학 창작에 열중했다. 모스크바 의대에 진학한 뒤에는 푼돈이라도 벌 목적으로 쓰고 있던 단편소설들을 시험 삼아서 여러 잡지나 출판사에 기고했다.
1860년 우크라이나 항구도시 타간로그에서 조그만 가게를 하던 집안에서 셋째 아들로 태어나서 종교적인 가풍 속에서 성장한 체호프는 1881년부터 풍자와 유머가 담긴 이야기들을 잡지와 신문 등에 발표하면서 기고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이듬해부터 5년간 무려 300편이 넘는 단편들을 쏟아냈다. 1884년 첫 단편집 ‘메포네네의 우화’를 출간했고, 1886년 한 해에만 무려 116편의 단편을 썼다. 의학 박사학위를 취득했지만 공식적인 의사 활동은 1년 남짓밖에 되지 않는다. 작가로서의 꿈을 버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1887년 작품집 ‘황혼’이 푸슈킨상을 받으면서 러시아 문단을 대표하는 작가로 부상했다.
폐결핵을 앓던 체호프의 나이 서른 살이던 1890년, 심기일전을 위해서 시베리아를 횡단하고 죄수들이 수용된 사할린 섬을 방문해 1년 가까이 체류하면서 문학적 전기를 맞는다. 이전까지 레프 톨스토이의 영향을 많이 받았던 그는 이때를 계기로 독자적인 사상과 생각을 발산했다. 여행기 ‘시베리아에서’와 관찰보고서 ‘사할린 섬’을 출간했고, 세계 독자들에게 가장 잘 알려진 단편들인 ‘6호실’, ‘대학생’, ‘다락이 있는 집’, ‘나의 삶’ 등을 창작했다.
극작가로서의 명성도 높았다. 이미 타간로그 시절부터 희곡을 썼던 그는 1887년 희극 ‘이바노프’가 모스크바에서 대성공을 거둠으로써 희곡 작가로서의 입지도 굳건히 했다. 그가 창작한 ‘갈매기’, ‘바냐 삼촌’, ‘세 자매’, ‘벚꽃 동산’은 지금도 자주 무대에 오르는 걸작이다.
체호프는 에드거 앨런 포, 기 드 모파상과 함께 세계 3대 단편작가 가운데 한 명으로 꼽히며 러시아 문학뿐 아니라 어니스트 헤밍웨이, 버지니아 울프, 레이먼드 카버 등 수많은 작가들에게 영감을 줬다. 그야말로 ‘작가들의 작가’였다. 그는 갔지만, 문학으로 남았다.
사랑과 질투는 언제 어디서나 사람들을 휘감아왔고, 지금도 휘감고 있으며, 앞으로도 휘감을 것이다. 생명이 있는 한, 가슴이 뛰는 한. 그곳에 앉아서 체호프는 조용히 속삭일 것이다. “사랑과 질투는 사람을 불공정하고 무자비하고 반인륜적으로 만들지.”
그리하여 사랑은 아름다운 추억뿐만 아니라 더 많은 후회와 회한을 남길 것이다. 때론 돌이킬 수 없는 범죄로도. 사람의 마음이란 이해하기도, 통제하기도 어려우니까. 특히 자신의 마음이란 더욱더. 나약하고 어리석은 존재 그 이름은 사람이라고, 그는 누군가의 등을 토닥일 것이다. 지금, 당신 곁에서.
“과거를 편견 없이 바라볼 수 있게 된 지금 나는 나의 잔인함을 마음의 상태 때문이었다고 해명하지 않을 것이다 … 인간의 마음을 이해하기란 어렵다. 그러나 훨씬 더 어려운 것은 자신의 마음을 이해하는 것이다.”
김용출 선임기자 kimgija@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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