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은 케인스가 옳았다, 처칠은 틀리고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얼마 되지 않은 1919년 프랑스 파리에 32개국의 대표들이 모여듭니다. 전후 세계 체제를 논의하기 위한 파리평화회의에 참석하기 위해서입니다. 가장 중요한 인물은 프랑스의 조르주 클레망소 총리, 영국의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총리와 미국의 우드로 윌슨 대통령입니다.
영국 재무부 대표로 회의에 참석한 30대의 젊은 존 메이너드 케인스는 몇 달에 걸친 회의 기간 내내 패전국 독일에 무리한 배상을 요구해서는 안 된다고 목소리를 높입니다. 산업 기반이 파괴된 독일은 갚을 능력이 없을 뿐 아니라, 유럽을 또다시 독재와 전쟁으로 몰아넣을 위험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누구도 그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절망에 빠진 케인스는 베르사유조약 체결 직전 ‘다들 지옥이나 가라’고 외치면서 자리를 박차고 나갑니다. E.J. 반스의 역사소설 <케인스씨의 혁명>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블룸즈버리그룹’ 친구들의 엘리트주의
재무부를 사직한 케인스는 녹초가 된 채 영국 남부 서식스의 시골 마을 찰스턴으로 향합니다. 오랫동안 케인스의 연인이자 친구였던 화가 덩컨 그랜트는 ‘재무부로 돌아갈 다리를 불살라버렸다’며 감탄하고, 그랜트와 동거하는 화가 버네사 벨은 ‘잘했다’고 케인스를 격려합니다.
그랜트와 케인스가 모두 사귀었던 버니 가넷은 케인스가 재무부를 떠난 것을 ‘늦었지만 안 하는 것보다는 낫지’라고 뼈 있는 말을 던집니다. 1915년 케인스가 케임브리지대학을 떠나 재무부에 들어가 전쟁 재정을 담당했던 것을 책망한 말입니다. 이들은 ‘블룸즈버리그룹’이라 불리던 반전주의 작가, 화가, 철학자입니다. 작가 버지니아 울프와 소설가 E.M. 포스터, 문학비평가 리턴 스트레이치 등도 참여했습니다. 경제학자로는 케인스가 유일한 멤버였습니다. 이들은 사랑과 우정, 미의 향유, 지식 추구, 속박을 벗어난 성관계(이성과 동성 모두)에 함께했습니다.
케인스는 1919년 말 케임브리지대학 교수로 복귀한 뒤 파리평화회의와 베르사유조약의 문제점을 고발하는 소책자 <평화의 경제적 결과>를 발표합니다. 정치경제적으로 설득력이 높았을 뿐 아니라 윌슨, 로이드 조지, 클레망소 같은 당대 정치인들을 신랄하게 비판한 이 책은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나온 지 1년도 되지 않아 12개 언어로 번역되고 10만 권이 넘게 팔려, 당시 기준으로 최고 베스트셀러가 됩니다. 이를 통해 케인스는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경제학자로 등극합니다. 그는 <이코노믹저널>에 논문을 발표하고, <맨체스터 가디언>에 정기적으로 칼럼을 쓰면서 논객의 명성을 높여갑니다. 그리고 1923년에는 주간지 <더 네이션>을 인수해 더욱 정력적으로 글을 발표했습니다.
유럽과 아메리카 대륙의 주요 도시를 순회하던 발레단 ‘발레 뤼스’는 1921년 영국 런던에서 <잠자는 숲속의 미녀>를 공연하고 있었습니다. 여주인공 리디아 로포코바에게 반한 케인스는 적극적으로 구애합니다. 인도의 관세와 환율 제도를 논의하는 중요한 출장이 예정됐지만, 로포코바와 떨어져 있기 싫다며 출장을 취소합니다. 당시 케인스는 젊은 심리학자 서배스천 스프로트와 사귀고 있었습니다. 로포코바는 케인스의 친구들에게 다가가려 하지만, 블룸즈버리그룹 사람들은 냉담합니다. 리디아가 지적이지 못하고 신분이 보잘것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비록 블룸즈버리그룹이 기성 질서를 우습게 알고 파격적인 실험을 하고 있었지만 엘리트주의에 젖어 있었던 것입니다. 이들은 어떻게든 케인스를 로포코바로부터 떼어내려 하고, 스프로트에게 케인스와 아프리카로 여행을 가라고 꼬드깁니다. 하지만 케인스는 마음이 로포코바에게 기울어 1925년 그와 결혼합니다. 세계적인 경제학자와 러시아 출신 발레리나의 결혼은 영국 전체를 충격에 빠뜨립니다.
처칠, 금본위제 복귀하지 말라니까
반스는 <케인스씨의 혁명>에서 이렇게 케인스의 공적인 삶, 블룸즈버리그룹을 통한 파격적인 생활, 로포코바와의 결혼이라는 세 축을 솜씨 있게 교차하면서 스토리를 전개합니다. 경제학적으로 특히 흥미로운 것은 케인스가 금본위제와 싸우는 모습입니다.
영국은 제1차 세계대전 기간에 전쟁자금 조달을 위해 금본위제를 중단했고, 전후 런던 금융가를 중심으로 통화가치 안정을 위해 금본위제로 복귀해야 한다는 주장이 높았습니다. 케인스는 1923년 출간한 <화폐개혁론>과 언론 기고문을 통해 이에 격렬히 반대했습니다. 이미 금의 대부분을 미국이 보유한 상황에서 금본위제로 복귀하면 미국에 종속되고, 실업자 100만 명이 있는 상황에서 영국이 파운드 가치를 높이는 방향으로 환율을 조정하면 수출에 치명타를 입어 더 많은 실업자가 생길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당시 재무부 장관이던 윈스턴 처칠은 이 문제를 결정하기 위해 소수의 전문가를 조용히 소집했습니다. 재무부의 엘리트 관료 오토 니마이어, 전직 재무장관으로 은행에 몸담고 있던 레지널드 매케나, 그리고 케인스가 참석했습니다. 저는 대학 시절 교수님으로부터 ‘케인스가 공무원 시험에서 차석으로 합격한 뒤 시험 채점관이 자기보다 경제학을 모르는 게 분명하다고 불평했다’는 우스갯소리를 들은 기억이 있습니다. 반스는 소설에서 오토를 그 시험에서 수석 합격한 사람으로 묘사하며 두 사람의 라이벌 관계를 강조합니다.
애초 처칠은 재무부와 정통 경제학자들의 금본위제 복귀 주장을 미심쩍어했지만, 대다수가 부작용은 시장이 알아서 교정할 것이라며 금본위제를 주장하자 그것을 받아들입니다. 그 결과가 1925년 ‘영국 금본위제법’ 제정입니다. 대부분의 경제학자, 런던의 은행가와 정치인은 금본위제에 환호했지만, 케인스는 ‘처칠의 경제적 결과’라는 기사에서 금본위제 복귀를 맹비난했습니다. 그리고 케인스가 예견한 대로 디플레이션이 발생합니다. 수출은 급감하고, 실업률은 치솟아 노동자들은 대파업에 나섰습니다. 처칠은 자신에 대해 역대 최악의 재무부 장관이라는 비난을 받아들인다면서, 1931년 다시 금본위제를 이탈했습니다.
경제학자도 버거운 케인스의 저서
금본위제에 대한 케인스의 주장이 몇 년간의 극심한 경제위기를 낳은 뒤 받아들여졌다면, 파리평화회의에서 케인스가 제안한 내용은 한 차례 세계대전을 더 치른 뒤에야 마셜플랜으로 실현됐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위대한 경제학자의 업적을 살펴보는 가장 좋은 방법은 물론 그의 저작을 직접 읽는 것입니다. 하지만 전문 경제학자도 버거워하는 케인스의 책을 일반인이 읽기란 무리입니다. 전기를 읽는 것도 한 방법입니다. 로버트 스키델스키가 쓴 전기와 재커리 카터가 쓴 전기가 있지만 각각 1500쪽과 870쪽에 이를 만큼 방대한 저술이고 등장인물이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많아 쉽게 읽을 만한 책들은 아닙니다. 이에 비해 반스의 소설은 간결하면서도 정확하게 인물과 시대를 묘사해, 케인스를 이해하는 출발점으로 훌륭한 선택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국어 번역판이 꼭 나왔으면 합니다.
반스의 ‘케인스 시리즈’란
스코틀랜드에서 태어난 소설가 E.J. 반스는 존 메이너드 케인스의 지적 고향인 케임브리지대학 경제학과 졸업생입니다. 그는 대부분의 경제학자와 마찬가지로 케인스 경제학을 공부했지만, 케인스의 삶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었습니다. 학교를 졸업한 뒤 버지니아 울프에 대한 책을 읽다가 케인스와 블룸즈버리그룹의 관계를 알게 되고, 케인스의 동성애 편력, 영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발레리나와의 결혼을 접하게 됩니다. 케인스가 경제학계라는 좁은 세계를 넘어 정치, 외교, 전쟁, 저널리즘, 예술을 망라하는 다양한 세계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는 사실에 매료돼 2020년 소설 <케인스씨의 혁명>을 썼다고 합니다. 속편으로 1930년대 케인스의 활약을 다룬 <케인스씨의 댄스>도 2022년 출간됐습니다.
신현호 이코노미스트·<나는 감이 아니라 데이터로 말한다> 저자
*일반인이 경제현상에 쉽게 다가가고 동시에 경제와 금융 종사자가 소설에 매력을 느낄 수 있도록 소설 속에서 경제를 발견하는 연재다. 2주마다 연재.
Copyright © 한겨레21.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크롤링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