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직필] 부자들의 ‘패거리 카르텔’
지난달 공개된 가계금융복지조사 결과에 따르면 2022년 한 해 물가를 고려한 가구 실질소득은 전년보다 줄었다. 가구 보유 자산에서 빚을 뺀 순자산의 실질가치도 2023년 3월 기준으로 전년보다 10% 가까이 하락했다. 2023년 들어 사정이 나아진 것도 아니다. 가계동향조사 결과, 2023년 가구 실질소득은 전년 동기에 비해 1분기는 증가율이 0.0%였고 2분기는 3.9% 감소했으며 3분기에도 0.2% 증가에 그쳤다. 더욱이 소득 분위별로 비교하면 2023년 3분기 들어 상위 40% 소득이 4% 넘게 오를 때 하위 20% 소득은 절대적으로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2022년이 불확실성의 해였다면 2023년은 불평등의 해였다는 세계은행의 비유가 한국에서도 빈말은 아니었다.
이처럼 빈곤 가구 중심으로 민생난이 가중되는 현실에 비하면 며칠 전 정부가 발표한 새해 경제정책방향은 일말의 기대마저 저버리는 것이었다. 기실 여야 합의로 작년 말 확정된 새해 예산과 개정세법도 실망스러운 내용이었다. 새해 물가상승률이 어느 전망 기관 예측치인 2.8%로 실현된다면 새해 예산은 실질 기준으로 재정총량 자체가 작년 수준에서 동결되는 셈이 된다. 2024년에도 한국경제는 작년처럼 정부의 긴축적 재정운영에 발목 잡힐 운명으로 이미 예정되어 있다. 문제는 그것이 분배를 악화시키는 부자 감세 탓에 비정상적으로 강제된다는 사실에 있다.
세입예산 부수 법률로 이번에 개정된 상속증여세법에는 가업 승계 시 증여세 최저세율 10%가 적용되는 과세 구간의 상한을 60억원에서 120억원으로 올리고 결혼이나 출산 뒤 2년 내 증여받은 재산에 대해 3억원의 증여세를 면제하는 내용이 포함되었다. 부잣집 자식들이 좀 더 일찍 부모 재산을 물려받아 불릴 수 있게끔 길을 열어준다는 것이다. 그러나 세습되는 부가 일해서 버는 소득보다 3배나 빠르게 늘어나 돈이 돈을 버는 사회에서 어떻게 그런 세법 개정이 정당화될 수 있는지 의문이다. 가난해서 자식들한테 미안한 우리 부모들의 숨죽인 탄식과 열패감은 아무렇지 않은가.
최근에는 심지어 상속세 인하 주장까지 들려온다. 정부가 앞장서 상속세를 현행 유산세 방식(부모의 유산에 과세)으로부터 유산 취득세 방식(자식이 취득한 유산에 과세)으로 바꾸겠단다. 부자들 상속 부담을 덜어준다고 참 애쓴다. 점입가경으로 제1야당 일부 인사들도 그 흐름에 동참한다. 재벌들이 상속세를 덜 내고 주식을 물려받으려면 주가 하락을 유도해야 하니 상속세가 ‘코리아 디스카운트’의 원인이란다. 어이가 없다. 왜 진실을 숨기는가. 부의 세습을 위해서라면 어떤 짓도 서슴지 않는 총수 일가의 탐욕이야말로 코리아 디스카운트의 진짜 원인 아닌가.
얼마 전 개정된 소득세법 시행령도 한심하기 짝이 없다. 주식양도소득세를 내는 대주주 기준이 10억원에서 50억원으로 상향되면서 과세 대상이 축소되었다. 하지만 대주주 기준을 변경하고자 했다면 옳은 방향은 내년 도입될 금융투자소득세 안착을 위해 오히려 하향하는 쪽이었다. 약 1만명의 ‘슈퍼리치’만을 위한 특전인 이번 주식양도소득세 감세는 자본이득 과세를 위한 그간의 사회적 노력을 무위로 돌리고 11년 전 과거로 시간을 되돌려놓았다. 그러니 정부가 새해 경제정책방향에서 부가가치세 간이과세자 신고 기준을 완화하고 유류세를 정상화 계획 없이 그저 인하한다고 했어도 놀랄 이유가 없었다. 어차피 시대에 역행하며 부자들만 위하는 정치 아닌가 말이다.
오늘 한국경제는 고물가와 고금리, 반도체 경기 부진, 중미갈등과 공급망 재편이 불러온 지각 변동까지 이중 삼중으로 악재가 겹친 상황이다. 그 결과, 21세기 들어 첫 10년간 한국경제 중흥을 이끌었던 중국 대상 제조업 수출이 위축되면서 경제 회복세가 사실상 중단된 상태다. 성장 엔진만 꺼져가는 게 아니라 불균형적인 경제구조와 열악한 사회안전망을 배경으로 분배 역시 개선의 전망이 안 보인다.
그럼에도 정부는 부자 감세를 남발하며 세수가 ‘펑크’나자 허울뿐인 재정 건전화를 내세워 지출을 제한하는 긴축에 나서고 있다. 집권의 목표가 본래 그런 것이었으리라. 기득권 보수 정치를 지지하는 부자들과 대자본의 세금을 줄일 수 있다면 경제 회복도 복지국가도 중장기 경제사회 대전환도 그들에게는 중요하지 않은 것이다. 오늘 한국사회는 흡사 부자들이 감세의 이름으로 경제적 자원을 집단 약탈하면서 공동체의 기초가 무너져가는 것만 같다. 패거리 카르텔은 다른 게 아니다. 실력 없는 부자들의 보수 정치가 그것이다.
나원준 경북대 교수·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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