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명을 위한 고래마을의 특별한 선상 졸업식

박은경 2024. 1. 9.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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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일 울산 장생포초 선상 졸업식 
전교생 26명 ‘작은학교’ 마을잔치
입학 예정 신입생 2명...폐교 우려
“학교 사라지면 마을도 소멸할 것”
9일 울산 남구 장생포고래문화특구 고래바다여행선에서 장생포초등학교 선상 졸업식이 열리고 있다. 울산= 박은경 기자

"고래바다여행선에서 졸업하는 만큼 고래처럼 큰 꿈을 꾸고 또 그 큰 꿈을 모두 다 이루기 바랍니다."

9일 오전 울산 남구 장생포고래문화특구 내 관광용 고래탐사선인 고래바다여행선에서는 특별한 졸업식 열렸다. 주인공은 고래문화특구 내 초등고를 통틀어 하나밖에 없는 학교인 장생포초등학교 학생들. 아이들에게 특별한 추억을 만들어주기 위해 교육청과 학교, 동문회, 마을 주민들이 마련한 국내 유일 선상 졸업식이다. 지난해에 이어 두 번째로 열렸다. 이날은 전교생 26명 중 5명이 졸업장을 받았다. "뭐든 적극적인 동근이, 긍정적이고 의젓한 용희, 차분한 학생회장 예원이, 동생들을 잘 챙기던 다은이, 명랑쾌활 에너지가 넘치는 다연이." 노복필(58) 교장이 한명, 한명 졸업생 이름을 호명할 때마다 배에선 마치 돌고래 떼라도 발견한 듯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졸업식은 오전 11시쯤 1, 2학년 학생들의 우쿨렐레 공연으로 시작됐다. “울퉁불퉁 멋진 몸매에, 빨간 옷을 입고...” 순조롭게 이어지는가 싶었지만 두 마디를 채 넘기지 못하고 아이들은 실수를 연발하며 멈췄다. “괜찮아, 괜찮아. 다시.” 객석에 앉아 있던 고학년 아이들이 어른스럽게 동생들을 다독였다.

노 교장은 “매일 오전 10시 20분부터 30분간 전교생이 연합팀을 꾸려 축구를 한다”면서 “자연스럽게 유대관계가 형성되다 보니 서로 친형제자매처럼 챙기는 것 같다”고 말했다. 공연 후엔 그동안의 추억이 담긴 사진과 재학생, 가족들이 만든 영상편지가 흘러나왔다. 눈물을 훔치는 아이들도 있었다.

울산 장생포초 재학생들이 졸업생들을 위해 우쿨렐레 연주를 하고 있다. 이날 실수로 공연이 멈추자 객석에선 웃음이 아닌 응원이 쏟아졌다. 울산= 박은경 기자

졸업생 5명은 모두 리더십상, 예술상, 선행상, 탐구상, 창의상 등 특기상과 장학금을 받았다. 학교운영위원회와 총동문회, 남구시설관리공단, 마을운영위원회 등에서도 80여 명이 참석해 블루투스 이어폰과 인형, 꽃다발, 간식 등 선물을 건넸다. 졸업식에서 만난 마을주민 김정화(41)씨는 “우리 아이도 셋 다 장생포초등학교를 다녔다”며 “졸업식은 주민 모두가 참여하는 마을잔치 같은 연례행사”라고 말했다. 옆에 있던 교직원은 “이곳에선 아이들이 어떻게 크는지가 보인다”며 “봄에 봤던 아이가 여름, 가을, 겨울 성장하는 모습을 모면 ‘이게 바로 교육이구나’ 하는 걸 느끼게 된다”고 말했다. 졸업생 양예원(13)양은 “똑같은 메뉴라도 학교에서 먹는 밥은 유독 맛있었다”며 “학교에서 있었던 모든 일이 감사하다”고 웃었다.

올해 졸업하는 울산 장생포초등학교 학생들과 교직원, 학부모 등 참석자들이 식전 공연을 보며 즐거워하고 있다. 울산= 박은경 기자
9일 울산 남구 장생포고래문화특구 고래바다여행선에서 장생포초등학교 선상 졸업식이 열리고 있다. 울산= 박은경 기자

하지만 이런 왁자지껄한 졸업식을 몇 번이나 더 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갈수록 재학생이 줄고 있어서다. 과거 고래잡이 전진기지였던 장생포는 1986년 국제포경위원회(IWC)가 상업 포경을 금지하면서 쇠락의 길을 걸었다. 고래를 잡아 내다 팔며 생계를 꾸리던 사람들은 일자리를 잃고 하나둘 마을을 떠났다. 2008년부터 고래문화특구로 지정돼 다시 활로를 모색하고 있지만 여전히 유소년 인구는 남구에서 가장 낮다. 졸업생 예원양의 할아버지이자 선배인 양인관(75·장생포초 17회 졸업)씨는 “1980년대까지도 매년 100여 명 이상씩 졸업을 했었다”며 “시설은 훨씬 현대화되고 교육프로그램도 좋아졌지만 갈수록 재학생이 줄어드니 학교가 사라질까 걱정된다”고 말했다. 실제 올해 5명이 졸업한 뒤 입학 예정인 신입생은 2명뿐이다. 7~8km 떨어진 거리의 대규모 학교와 공동학구제를 운영하고 있지만 학생 유입은 드물다. 이하형(60) 장생포초 총동문회장은 “동문회에서 통학버스를 운행하는 등 학생들을 유치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며 “학교가 없는 마을은 결국 소멸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6학년 담임을 맡았던 안훈(47) 교사는 “작은 학교는 학습력이 떨어진다는 선입견이 있는데 다양한 경험을 통해 오히려 성장 가능성은 훨씬 크다”며 “학교가 지속될 수 있도록 힘을 모아달라”고 호소했다.

울산= 박은경 기자 chang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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