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킬러규제' 꼽혔던 화학물질규제 완화…"기업부담 완화 vs 개악"
신규 화학물질 등록기준 완화하고, 위험도에 따라 규제 차등화
"기업투자 가로막는 규제 없애야" vs "제2의 가습기살균제 참사 우려"
(서울=연합뉴스) 홍준석 이재영 기자 = 제조나 수입 전 특성과 유해성 정보를 환경부에 등록해야 하는 화학물질의 대상이 줄어든다.
화학물질의 위험도에 따라 규제를 다르게 적용해 일부 규제를 완화할 근거도 마련됐다.
재계가 투자를 막는 '킬러규제'라며 완화를 호소해 온 결과로, 기업의 부담은 줄어들 전망이다.
하지만 소비자의 안전을 소홀히 해 '제2의 가습기살균제 참사'의 발생 여지를 키운다는 우려의 목소리도 나온다.
신규 화학물질 등록기준 대폭 완화…"기업부담 해소"
9일 국회 본회의에서는 '화학물질의 등록 및 평가 등에 관한 법률'(이하 화평법)과 '화학물질관리법'(화관법) 개정안이 통과됐다.
개정안 핵심 중 하나는 신규 화학물질 등록 기준을 '연간 100㎏'에서 '연간 1t'으로 완화한 것이다.
화평법은 기존에 유통되거나 유해성 심사를 받은 물질이 아닌 화학물질을 '신규 화학물질'로 규정하고, 일정량 이상 제조·수입하려는 경우 사전에 환경부에 등록하도록 규정했다.
이는 화학물질 규제 관련 글로벌 기본 원칙인 '정보 없이는 출시 불가'(No Data, No Market)를 반영한 규정이다.
화학물질등록평가법은 2007년 유럽연합(EU)의 관련 제도 도입을 시작으로 각국이 더욱 강화된 화학물질 규제를 도입하는 데 맞춰 2013년 제정, 2015년 시행됐다.
이로써 구멍이 많던 국내 화학물질 관리 시스템도 대폭 강화됐다.
화학물질등록평가법이 제정되기 전까지는 국내에서 유통되는 화학물질 4만3천여종 중 15% 정도만 '유해성 정보'가 확인된 상황이었다.
당초 정부는 신규 화학물질 등록 기준은 '연간 1t'으로 하려고 했다.
하지만 2011년 가습기살균제에 의한 대규모 피해가 세상에 드러나면서 국회에서 논의를 통해 '모든' 신규 화학물질을 등록하게 법이 만들어졌다.
이후 2018년 살균제 등을 별도로 관리하는 '생활화학제품 및 살생물제의 안전관리에 관한 법률'이 제정됐고, 이에 화평법상 신규 화학물질 등록 기준은 '연간 100㎏'으로 완화됐다.
그럼에도 산업계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등록 기준 완화를 요구해 왔다.
2019년 일본의 수출 규제에 대응해 정부가 '소부장'(소재·부품·장비) 산업 육성을 추진할 때는 화평법을 장애물로 지목하기도 했다.
신규 화학물질 등록에 드는 시간과 비용 때문에 공정을 신속하게 개선하지 못하는 등 생산성에 악영향을 미친다는 게 재계 주장이다.
외국과 비교해 규제가 지나치게 엄격하다는 지적도 한다.
현재 EU와 일본은 화학물질 등록 기준이 '연간 1t 이상'이며, 미국은 '10t 이상'이다. EU와 일본, 미국이 현행 기준을 시행한 시점은 각각 2008년, 1973년, 1995년으로 국내에서 화평법이 제정되기 한참 전이다.
이에 화평법을 만들 때 가습기살균제 사태 재발을 막아야 한다는 '대의'만 너무 강조된 것 아니냐는 비판이 지속해서 나왔다.
등록 기준이 연간 1t이었다면 2015년부터 작년 9월까지 등록된 신규 화학물질(3천656건) 중 77%(2천828건)는 등록 대신 신고만 해도 됐을 것으로 분석된다.
"제2의 가습기살균제 참사 터진다"…우려 목소리도
규제 완화에 대한 비판도 제기된다.
특히 신규 화학물질 등록 기준만 엄격할 뿐, 전반적으론 국내 규제가 EU 등보다 엄격하다고 할 수 없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환경부도 "화평법이 EU 규제보다 강도가 높다고 할 수 없다"며 이 법에 따라 요구되는 시험자료는 15~47개지만, EU에서 요구하는 자료는 22~60개에 달한다고 밝혔다.
최예용 환경보건시민센터 소장은 "화학물질 규제를 완화·해제한다면 제2의 가습기살균제 참사가 발생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어진다"며 "2중, 3중의 안전망이 확보됐을 때 (완화가) 진행돼야 하는데, 그러지 않았다는 점에서 우려스럽다"고 말했다.
진보당 강성희 의원은 이날 개정안 통과 전 토론을 신청해 "두 법안은 기업들 편익을 위해 화학물질 규제를 뒤로 되돌리는 개악"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현행법은) 가습기살균제 참사와 구미 불산 (누출) 사고 이후 국민 건강과 환경에 치명적인 위협이 될 수 있는 유해화학물질 사고를 막기 위한 최소한의 규제"라며 "규제 완화는 가습기살균제 사태 이전으로 퇴행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신고'만 하고 제조·수입될 화학물질이 대폭 늘어나는 만큼, 기업이 신고 시 제출하는 자료를 철저히 검증하고 투명하게 공개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다.
화학물질 신고에 필요한 자료를 기업이 구해서 제출하는 방식이다 보니 유리한 자료만 낼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개정법에는 업체가 환경부에 제출하며 비밀로 보호를 요청한 자료가 유출됐을 때 대응을 강화하는 내용도 담겼다. '영업비밀'이 노출될 수 있다는 산업계 우려를 반영했다.
화학물질 위험도 따라 규제 차등화…"보수적 규제해야" 주장도
화평법과 화관법 개정안엔 유해성 있는 화학물질을 '인체급성유해성물질', '인체만성유해성물질', '생태유해성물질'로 구분해 다른 규제를 적용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도 담겼다.
현재는 유해성 있는 화학물질을 '유독물질'로 규정하고 일률적으로 규제한다.
'급성유해성물질'은 황산처럼 인체에 닿으면 바로 위험한 물질이며, '만성유해성물질'은 저농도 납과 같이 장기 노출 시 인체에 영향을 주는 물질이다.
화학물질의 위험도에 따라 규제를 차등화해 규제 부담을 덜어주자는 취지로 읽힌다.
하지만 화학물질의 유해성은 현시점에서 완전히 파악할 수 없기에 과도해 보여도 최대한 보수적으로 규제를 적용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화학물질 유해성을 급성과 만성으로 나눠 관리하는 국가가 사실상 없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소비자가 일상생활을 위해 유해화학물질을 사용하는 경우 보호장구 착용 등의 규제를 적용하지 않는 내용도 개정안에 포함됐다.
집에서 납땜하거나 락스로 청소할 때도 법이 정한 보호장구를 착용해야 하느냐는 지적을 반영했다.
jylee24@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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