끌고, 쓸고, 뿌리고···온통 ‘눈밭’이 된 서울 거리 돌아보니[현장]

9일 오전 서울 관악구 대학동의 한 고물상 앞에 밤새 주운 파지가 가득 담긴 리어카가 세워져 있다. 2024.1.9 배시은 기자

함박눈이 쏟아진 9일 오전 9시40분쯤 서울 관악구 대학동. 허리를 90도 가까이 굽힌 김영자씨(67)가 자신의 몸집보다 큰 리어카를 끌며 폐지를 줍기 시작했다. 얇은 패딩 위에 걸친 얇은 분홍색 우비, 빨간 고무가 덧대진 목장갑, 운동화 차림이었다. 두 손으로 리어카를 끌고 폐지를 주워야 해 우산은 들 수 없다고 했다.

수도권에 대설주의보가 내려진 이날에도 서울 도심 곳곳에선 생계를 위해 폐지를 줍는 노인들이 보였다. 폭설에도 택배·음식 배달이 이어졌고, 눈을 치우는 경비노동자와 자원봉사자가 눈에 띄었다.

넘어져 멍들어도 “생계 위해 365일 나와”

서울에 대설주의보가 내린 9일 오전 김영자씨가 서울 관악구 대학동의 상가 거리에서 파지를 줍기 위해 리어카를 끌고 있다. 2024.1.9 배시은 기자

김씨는 매일 오전 5시 관악구 집 근처 채소 가게에서 폐지를 주우며 하루를 시작한다. 오전 내내 폐지를 줍다가 점심시간이 되면 1시간 동안 간단히 식사한 후 낮잠을 청한다. 그 후 오후 11시까지 다시 폐지를 줍는다. 이렇게 김씨가 하루 17시간 폐지를 모아 버는 돈은 하루 3만원 정도. 그는 “남편이 죽은 후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17년 동안 폐지를 주웠다”며 “날씨와 상관없이 365일 나온다”고 했다.

이날처럼 눈이나 비로 길이 미끄러운 날은 사고 위험이 있다. 김씨 왼쪽 턱에는 검붉은 피멍이 들어 있었다. 며칠 전 골목길에서 넘어져 생긴 상처였다. 김씨는 “크게 넘어져 이빨이 깨지거나 얼굴을 심하게 다칠 때가 종종 있다”고 했다. 김씨가 리어카를 끌며 차도와 인도 사이의 턱을 넘자 한 서점 주인이 달려 나와 “길이 미끄러워 위험하다”며 리어카를 대신 턱 위로 올려주기도 했다.

이날 김씨가 1시간 동안 리어카를 끌고 돌아다닌 거리는 약 3km. 편의점, 고깃집, 학원, 서점 등 10곳에서 주운 폐지가 리어카에 가득 했다. 고물상에서 일하는 남모씨(66)는 “이렇게 눈이 많이 오는 날이면 폐지를 주워 팔러 오는 사람이 줄어든다”며 “오늘 같은 날까지 나오는 사람들은 정말 어려운 사람들일 것”이라고 했다.

언덕 위 눈 쓸어내는 사람들

9일 오전 서울 마포구의 한 오피스텔 앞에서 조사득씨(85)가 빗자루로 눈을 쓸고 있다. 2024.1.9 윤기은 기자

이날 오전 10시쯤 서울 마포구 만리재길 언덕. 이모씨(66)가 한 오피스텔 앞에서 제설삽으로 눈을 치우고 있었다. 이씨는 오피스텔 야외공간뿐만 아니라 폭 4m가량인 공용 인도의 눈도 쓸어냈다. 정년퇴임한 후 1년 전 이 오피스텔로 이사왔다는 그는 “집 앞 눈 치우는 건 시민의 의무”라며 “사람들이 덜 다쳤으면 좋겠다”고 했다. 이씨가 치운 길을 노인과 택배기사 등이 지나갔다.

약 50m 떨어진 다른 오피스텔 앞에서는 조사득씨(85)가 인도 곳곳에 염화칼슘을 뿌렸다. 이어 다리를 절뚝거리면서 빗자루로 눈을 쓸었다. 밤색 경량패딩을 입은 조씨는 목에는 보라색 손수건을 두르고 목장갑을 끼고 있었다. 혼자 사는 조씨는 지난 10여년간 공덕동 일대에서 폐지를 줍는 일을 해왔고, 지난 1일부터 이곳에서 쓰레기와 재활용품을 관리하는 일을 하고 있다.

“염화칼슘 더 가져와야겠지? 내가 할 테니까 좀 쉬어.” 경비노동자가 만류해도 조씨는 오피스텔 창고에서 제설삽을 가져와 인도에 눌어붙은 얼음을 긁어냈다. 그는 “오늘 오전 8시부터 길을 계속 치웠다”고 했다. 그는 “이유를 모르겠는데 노령연금이 안 나온다. 먹고 살아야 한다”며 연신 바닥을 쓸었다.

인근 건물 경비노동자 김인호씨(58)도 손수레에 염화칼슘을 싣고 오피스텔과 주변 길, 계단 등을 오가며 제설 작업을 했다. 김씨는 얇은 자켓만 걸쳤지만 “일하느라 덥다”고 했다. 그는 “오피스텔 용지가 아니어도 사람들이 넘어지면 안 되니까 주변 인도나 계단에도 제설작업을 한다”고 했다.

경비노동자 김인호씨(58)가 9일 오전 서울 마포구의 한 건물 앞에서 빗자루로 제설하고 있다. 2024.1.9 윤기은 기자

서울 전역에 대설주의보가 발효된 9일 오전 서울 중구 서울시립미술관 앞에서 미술관 관계자가 제설작업을 하고 있다. 2024.01.09 권도현 기자

공무원들도 비상 근무에 나섰다. 오전 11시, 마포구 한 공공 공원 일대에선 시청 직원들이 무선 송풍기로 눈을 밀어냈다. 서울시는 이날 오전 8시부터 제설 2단계를 발령하고 인력 8488명과 제설 장비 1168대를 투입해 제설 작업에 나섰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는 눈 쌓인 출근길 인증사진과 후기가 올라왔다. “진짜로 눈길 조심하세요 다들. 아침 출근길에 앞에서 완전 제대로 미끄러지는 남자분 목격한 뒤로 무서워서 기어갈 뻔” “추우니까 따뜻하게 옷 챙겨입으시라” “눈 때문에 길 막혀서 지각 예정자 됨” 등 글이 게시됐다.

윤기은 기자 energyeun@kyunghyang.com, 배시은 기자 sieunb@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