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질하고 상스런 ‘하남자’ 역으로 세상에 던지는 질문···배우 김세환[이 사람을 보라]
[이 사람을 보라]
2024년 남다른 생각과 단호한 행동으로 없던 길을 내는 문화인들을 만납니다.
하남자 컬렉터. 배우 김세환(36)에게 팬들이 붙여준 별명이다. 그는 멋진 ‘상남자’가 아니라 지질하고 옹졸하고 상스러운 ‘하(下)남자’를 주로 연기해왔다. 여성혐오에 찌든 남자친구(연극 <한남의 광시곡>), 동성 연인이 에이즈(후천성면역결핍증)에 걸리자 도망치는 남자(연극 <엔젤스 인 아메리카>), 시인의 재능이 넘치는 아내를 자살로 몰아넣는 가부장적 남편(뮤지컬 <실비아, 살다>), 친구의 연인에게 몰래 청혼하는 ‘환승남’(연극 <키스>)으로 변신했다. 김세환이 변신한 하남자들은 잔잔한 세상에 첨벙, 파문을 일으키는 질문을 던진다.
김세환은 2월17일~3월24일 서울 강서구 LG아트센터서울에서 공연하는 연극 <비(BEA)>에선 존엄사를 돕는 게이 간병인 ‘레이’ 역으로 출연한다. 김세환은 지난 4일 우란문화재단 연습실 인근 카페에서 기자와 만나 “인간을 응원하고, 세상을 응원하고 싶어서 연극을 한다”며 “인간의 나약함과 비겁함을 가진 역할을 좋아한다”고 말했다.
“지금 시기에 의미가 있는 역할이라고 생각하면 출연해요. 신당역 살인 사건을 보면서 ‘한국 남자 배우로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고민했어요. <실비아, 살다>에 출연한 이유는 남자들이 저질렀던 일들을 남자들이 봤으면 했기 때문이에요. 연극을 하는 일은 누군가를 응원하는 일 같아요. 관객들이 힘들고 아팠던 순간에 숨통을 틔워주는 작은 위로가 됐으면 좋겠어요.”
연극 <비>는 존엄사(조력자살) 문제를 다루는 작품이다. 미지의 병으로 8년 동안 육체의 감옥에 갇힌 소녀 ‘비’는 간병인 ‘레이’를 통해 어머니 ‘캐서린’에게 “이제 해방되고 싶다”는 편지를 전한다. 김세환은 “저는 ‘죽음도 스스로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서 존엄사를 인정하는 편”이라며 “단순히 존엄사 문제를 넘어서 ‘어떻게 존재해야 하느냐’고 질문하는 작품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레이가 무언가로 정의되지 않는 ‘물음표’인 인간으로 보였으면 합니다. 연극은 관객이 자기 안에 갖고 있지만 몰랐던 것들을 긁어서 보여주죠. 그래서 배우는 인물 안에서 여러 입체적인 모습을 마주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레이의 대사 속에서 찾아야 하는 것이 너무 많았어요.”
김세환은 고교 시절 연극반에서 처음 연극을 만났다. 고교 시절 작품은 배우의 공식 출연작으로 인정해주지 않지만, 김세환은 자신의 첫 작품을 고교 1학년 때 했던 연극 <다녀오겠습니다>라고 생각한다. 그때 처음으로 관객의 박수 소리를 경험했기 때문이다. “아마 모든 연극배우가 그럴 텐데 커튼콜의 그 박수 소리를 잊지 못하는 것 같아요. 이상하게 간질거리는 전율을 느꼈어요. 3학년 때는 <나의 라임 오렌지나무>에 ‘제제’ 역할로 출연했는데요, 딱 제제 나이의 어린아이 관객이 제 다리를 안고선 안 떨어지는 거예요. 그때 ‘배우를 업으로 삼아야겠다’고 생각했어요.”
한양대 연극영화학과에 재수를 거쳐 입학했다. 당시 별명은 ‘김세환’과 ‘곰팡이’를 합친 ‘세팡이’였다. 학교에서 먹고 자면서 연극에만 집중하는 모습 때문에 생긴 별명이었다. 현재까지 40여편에 출연했다. 지난해에는 연극·뮤지컬 11편에 출연하며 왕성하게 활동했다. tvN 드라마 <일타스캔들> <무인도의 디바>에 단역으로 출연하며 ‘매체 연기’까지 활동 영역을 넓혔다.
“드라마 촬영은 너무 떨렸어요. 제가 연극에선 4쪽짜리 독백도 해봤는데, 드라마는 그 몇줄 대사에 머리가 하얗게 기억나지 않는 거예요. 연기를 처음 하는 사람처럼요. 촬영을 마치고 어머니가 챙겨주셨던 옷들을 들고나오는데 제 자신에게 너무 화가 나서 눈물이 줄줄 흘렀어요. 그때 카메라 안에서 자유롭게 놀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다짐했어요.”
기자가 지난해 관람한 연극 <빵야>에서 김세환은 술에 만취한 드라마 제작자를 연기하며 흐느적거리면서도 또렷하게 대사를 전달했다. 김세환에게 발음과 발성의 비결을 묻자 “길거리 간판처럼 일상생활의 글자들을 혼자 소리 내어 읽어보는 습관이 있다”고 대답했다. 한때는 상대방과 나누는 대화가 머릿속에서 글자와 문장부호로 바뀌어 자동 재생될 정도였다고 한다. 일단 배역이 정해지면 관련 지식을 공부하면서 연기 연습을 한다. 지식을 쌓아두면 연기의 재료가 된다고 믿는다. 이날도 그의 가방에는 <너무 늦기 전에 들어야 할 죽음학 강의>라는 책이 있었다.
배우로서의 목표를 묻자 김세환은 “좋은 어른이 되고 싶다”고 대답했다.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사건은 ‘좋은 어른’을 고민하게 된 계기였다. 이명박·박근혜 정부는 정권에 우호적이지 않은 문화예술인의 명단을 관리하며 지원 대상에서 배제하고 압박했다. “사실 배우를 죽을 때까지 하겠다는 마음은 없어요. 사람 일은 모르는 거니까요. 다만 끝까지 비겁하지 않은 어른이 되고 싶어요. 힘든 사람을 안아줄 수도 있고, 부당함과 싸워줄 수도 있는 어른이요. 이게 제일 어려운 것 같아요.”
허진무 기자 imagin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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