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저의 쓸쓸했던 마지막… 獨, '세르부스'를 전하다[차상엽의 11+]

차상엽 기자 2024. 1. 9. 1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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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축구 레전드 프란츠 베켄바우어가 지난 7일(현지시각) 별세했다. 사진은 지난 2019년 한 행사에 참석한 베켄바우어. /사진=로이터
"우리 모두는 영혼을 가진 존재다. 영혼이 어디서 오는지는 알 수 없지만 결국 영혼으로 돌아간다. 지금껏 누렸던 아름다운 삶에 감사하다."

독실한 카톨릭 신자인 프란츠 베켄바우어는 만 75세 생일이던 지난 2020년 독일 잡지 분테와의 인터뷰를 통해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이 같은 말을 남겼다. 당시 언론들과의 접촉이 그리 많지 않았던 탓에 베켄바우어의 건강이상설이 조금씩 흘러나오던 시기였다.

실제로 베켄바우어는 최근 다양한 질병을 앓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2022년에는 분테와의 인터뷰를 통해 "안구 경색으로 오른쪽 눈의 시력이 없다"고 밝혔다. 같은 해에는 빌트가 그의 심장질환과 치매로 인한 파킨슨병 투병 소식을 전하기도 했다.

'카이저'(Kaiser)로 통하는 베켄바우어는 결국 지난 7일(이하 한국시각)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자택에서 가족이 자리한 가운데 별세했다. 향년 78세. 그의 별세의 소식은 유가족을 통해 9일에야 공개됐다.

유가족은 조용한 장례를 원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선수로서 1960~70년대 최고의 선수로 자리매김했고 이후 감독과 행정가로도 화려한 이력을 가진 황제의 마지막은 병마로 쓸쓸했던 셈이다.

황제라는 뜻의 독일어 단어가 말해주듯 베켄바우어가 독일 축구계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말로 설명하기 어렵다. 세계 축구계로 확대해도 베켄바우어 만큼 선수와 지도자 그리고 행정가 등으로 성공한 인물을 찾아보긴 쉽지 않다.
프란츠 베켄바우어가 지난 7일(현지시각) 별세했다. 사진은 현역시절 그의 활약상. /사진=바이에른 뮌헨 공식 홈페이지
선수로 서독월드컵(1974년)과 유럽선수권대회(1972년) 우승을 차지했고 감독으로 월드컵(1990년) 당시 독일의 우승을 이끌었다. 자국에서 열린 2006년 독일월드컵 당시에는 조직위원장을 맡아 월드컵 전경기를 현장에서 관전하는 강철 체력을 과시했고 대표팀은 3위로 대회를 마쳤다.

우아한 축구를 구사한다는 평을 받으며 바이에른 뮌헨에서도 많은 우승컵을 들어올렸던 그는 새로운 개념의 리베로를 확립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최종 수비라인에 위치해 있지만 공격시에는 높은 위치까지 자유롭게 이동하며 공격적으로도 큰 기여를 했다. 실제로 103번의 A매치에서 14골을 기록했고 바이에른에서는 427경기를 소화하며 60골을 기록하기도 했다.

물론 영혼의 단짝으로 통하는 일명 '캇체'(고양이의 독일어) 게오르그 슈바르첸벡의 수비적인 능력이 베켄바우어의 존재감을 더욱 부각시킨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베켄바우어가 기존의 '리베로=수비수'라는 개념 자체를 완전히 바꿔놓았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독일인들에게 베켄바우어는 현역시절부터 당대 최고의 스타였다. 젊은 시절 수려한 외모도 한몫을 했지만 이미 1966년 당시 광고 모델로 나서며 스포츠 스타가 CF에 출연하는 시초가 되기도 했다. 러시아 정유 회사의 광고 모델로 나서며 그가 당시 받은 출연료는 1만2000마르크였다. 이는 유로화 도입 이전 독일 화폐 단위로 약 6000유로(약 865만원)에 달한다. 하지만 현 시세로 환산하면 10만유로(1억4000만원) 정도다. 이밖에 각종 가전제품, 식음료 모델로도 활동했고 최근에는 이동 통신사의 모델로도 기용됐다.

베켄바우어는 축구 가족이기도 하다. 삼촌 알폰소 베켄바우어 역시 바이에른에서 활약한 바 있으며 독일 아마추어대표팀에서 뛰기도 했다. 개인적으로는 공식적으로 3번의 결혼을 했고 슬하의 5명의 자녀가 있다. 첫 부인과의 사이에서 아들 하나가 있었다. 두 번째 부인과의 사이에서 두 아들을 뒀다. 둘째 아들 슈태판 베켄바우어 역시 축구 선수로 활약지만 지난 2015년 사망했다. 이후로 두 번의 동거와 결별을 했고 이후 세 번째 부인과의 결혼을 통해 아들 하나와 딸 하나를 뒀다.

베켄바우어는 현역 시절의 대부분을 바이에른 뮌헨에서 활약했다. 선수 생활 만년 미국 뉴욕 코스모스와 함부르크에서 잠시 뛰기도 했지만 바이에른서만 13년을 보내며 바이에른의 레전드이기도 하다.

바이에른 역시 베켄바우어의 별세 소식에 애도를 표하며 그를 추모했다. 구단 공식 홈페이지는 '카이저와의 작별'이라는 제목과 함께 그의 일대기를 조명했다. 바이에른 뿐만 아니라 독일 각계 저명인사들 역시 추모 물결에 동참하고 있다.

그는 공식 석상에서 항상 웃는 얼굴로 '세르부스'를 외치며 반갑게 인사를 전하는 인물이었다. 이는 만날때 주로 쓰는 바이에른 지역의 사투리다. 항상 친근감 있게 전하는 그의 인사를 더 이상 들을 수는 없지만 그의 사망 소식에 독일 전역은 세르부스를 외치고 있다.

차상엽 기자 torwart@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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