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예감] 동네 형이 증언한 이순신의 어린 시절 - 이한 작가(역사커뮤니케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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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자료의 저작권은 KBS라디오에 있습니다.
전문 게재나 인터뷰 인용 보도 시,
아래와 같이 채널명과 정확한 프로그램명을 밝혀주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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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시대 유명한 인물들도 연말연초에 몹시 우울해 해
- 정약용, 기대승, 이순신 등이 나이 먹는 것과 인생에 대해 허무함을 언급
- 광해군 때, 연말연초 서글퍼지는 이유를 논하라는 과거 시험 문제 출제해
- 조선시대 중기의 요리책에서는 떡을 꿩의 국물에 데쳐서 고기 산적을 얹어 먹는 떡국에 대한 설명이 있어
- 소주에 계피, 방풍나물 등을 넣고 끓인 도소주를 마시며 새해를 맞기도
- 이순신의 생가는 아산이 아니라 서울 건천동(지금의 을지로 골목)
- 이순신, 류성룡, 원균, 허균 등이 같은 고향
- 이순신의 어릴 적 이야기는 류성룡의 징비록에 적혀있어
- 어릴 적 이순신은 공부보다는 전쟁놀이에 집중해
- 이순신 장군은 1576년 32세 때 무과에 12등으로 급제
■ 프로그램명 : 성공예감 이대호입니다
■ 방송시간 : 1월 9일(화) 09:05-10:53 KBS1R FM 97.3MHz
■ 진행 : 이대호
■ 출연 : 이한 작가(역사커뮤니케이터)
◇이대호> 성공예감 이대호입니다. 1월 9일 화요일 이제 2부 순서 시작했습니다. 조선시대로 떠나보는 시간입니다. 항상 새해가 되면 희망차게 새 출발하고 좋기는 좋은데 항상 연말연초로 넘어가는 즈음에는 저희가 그 심리학 시간에도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항상 사람들이 좀 우울해지는 측면이 또 없지 않아 있다고 합니다. 이렇게 한 살 또 먹는구나. 근데 이게 우리 선조들도 마찬가지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또 그 이어서 최근에 관객 400만 명을 돌파한 영화가 있죠. 노량. 노량의 주인공 이순신 장군. 이순신 장군에 대해서 우리가 잘못 알고 있었던 것도 많다고 하는데요. 이순신 장군 이야기도 재미있게 들어보겠습니다. 역사 커뮤니케이터 이한 작가 함께합니다. 안녕하세요.
◆이한> 안녕하세요.
◇이대호> 작가님 또 어느새. 신간을 또 내셨네요. 책을.
◆이한> 열심히 어쩌다 보니 열심히 해서.
◇이대호> 조선사 쩐의 전쟁. 근데 그 역사를 이야기해 주시는 분들은 많은데, 특히 그 역사 속에서 돈과 관련된 거는 이한 작가님이 최고인 것 같습니다.
◆이한> 아무래도 옛날 사람들도 사람이었으니까 보통 우리가 조선시대나 그 옛날 시대 하면 뭐 이제 그 유교라든가 그런 허례허식에 꽉 붙들어 살았을 것 같지만 물론 그런 유교적인 정신을 가지면서도 현실에 쪼들리면서 살았던 그런 약간 이율배반적이랄까, 그런 모습들이 굉장히 저는 재미나기 때문에 열심히 찾아봤습니다.
◇이대호> 그러니까 돈 앞에서 약간 민낯이 드러나죠.
◆이한> 그렇죠. 그런데 그러면서도 또 이제 사회도덕이라든가 그런 정의라든가 그런 거에 휘둘리는 그런 사람의 모습이, 계속 흔들리잖아요. 돈에 그냥 눈이 멀었다면 상관이 없지만, 이 도덕을 지키려고 하면서도 돈 때문에 힘들어하고. 그런 모습이 훨씬 저는 인간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대호> 인간적이고 사실 우리네 삶이 다 그렇죠. 그리고 조선시대 양반도 마찬가지고 고관대작들도 마찬가지였던 거고. 조선시대 쩐의 전쟁, 쩐과 관련된 역사는 이한 작가님께 여쭤보면 됩니다. 우리가 이제 새해가 돼서 사람들이 뭔가 좀 부푼 꿈에 좀 이렇게 들떠 있기도 한데 사실 나이 한살 더 먹으니까 좀 복합적인 감정이 들죠.
◆이한> 굉장히 우울해지죠.
◇이대호> 그런데 조선시대 선조들도 그랬을까요? 똑같았을까요?
◆이한> 그 상당히 의외인데 옛날 유명한 사람들이 전부 새해가 되면 몹시 우울해합니다.
◇이대호> 우울해했다고요?
◆이한> 한 해가 갔네. 난 한 게 아무것도 없네. 그런 식으로 글을 쓴 사람이 한두 사람이 아니에요.
◇이대호> 연말연초.
◆이한> 예, 정약용이라든가 아니면 이제 그 인조반정의 그 사람이자 효종의 장인이었던 장유 같은 경우에도 내가 50살이나 먹어가지고 한 게 아무것도 없네. 인조반정의 대신인데도 불구하고. 그다음에 기대승이라고 유명한 철학자 있거든요. 그 사람도 내가 서른인데 그거 한 거 아무것도 없어서 부끄럽다. 그렇게 시를 적은 것들이 있는데, 보통 그렇게 나이 많으신 분들이 한 게 아무것도 없다라고 적긴 한데, 그렇게 적은 사람들이 다들 역사 속에 유명한 사람들이라 이거죠.
◇이대호> 역사의 한 획을 그으신 분들이고, 지금까지도 대대손손 정말로 이름을 남긴 분들인데, 매년 한 해 한 해 거듭될 때마다 내가 한 게 없다.
◆이한> 섣달그믐이 되면 섣달그믐의 주제로 시를 쓰면 전부 허무해해요. 이제 날 늙은 것 같다, 머리에 하얀 털이 많이 솟았다, 한 게 뭐냐, 부끄럽다, 그런 이야기를 굉장히 많이 적었고요. 그다음에 새해가 되면 그래도 조금 힘내보자 그런 식의 글들을 좀 썼습니다.
◇이대호> 그러니까 지금 사실 청취자분들도 그러실 수 있는데, 내가 한 살 더 먹고 그동안 뭐 했나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는데, 이게 나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선조들도 그러했다. 약간 좀 동질감도 느껴지고 외롭지 않네요.
◆이한> 대표적인 케이스가 이순신입니다.
◇이대호> 이순신 장군이요?
◆이한> 이순신이 유명한 게 난중일기잖아요. 난중일기 첫날이 바로 새해 첫날 맞이해서 쓴 글입니다.
◇이대호> 아, 우리가 1월 1일부터 새로운 다이어리 쓰듯이. 이순신 장군이요.
◆이한> 그래서 일기가 8권인가 그렇게 돼요. 그러니까 8년 동안 쓰는 일기라서. 근데 첫날이 그거예요. 섣달그믐날 밤을 새우면서 촛불을 켜고 나라 걱정하느라고 펑펑펑펑 울었다고 해요.
◇이대호> 새해 첫날부터요?
◆이한> 예, 그러니까 그믐을 지나서 새해 첫날서부터 이렇게 울고 그다음에 그 당시에 이순신이 일이 바빠서 2년 동안 어머니를 못 찾아가 봤거든요. 그러니까 또 새해 첫날부터 엄마 생각하면서 울고.
◇이대호> 이순신 장군한테 엄마라고 하니까 좀 그러네요.
◆이한> 예, 그러면 어머님 초계 변씨.
◇이대호> 물론 이순신 장군도 어렸을 때 엄마라고 불렀겠죠.
◆이한> 그렇겠죠. 그래서 그렇게 울적하고 있는데, 이제 그 부하들이 우르르 몰려와서 세배를 하고 그리고 이제 같이 그럼 같이 술 먹고 그게 이순신의 새해 첫날이었습니다.
◇이대호> 그게 이제 난중일기에도 새해 첫날 좀 우울한 감정도 써놨고.
◆이한> 그래도 이제 사람들이 와서 세배도 하고 인사도 하고 같이 술도 먹고.
◇이대호> 그렇죠. 장군님 따르는 사람들이 많았을 테니까요.
◆이한> 그러니까 우울해하면서도 반가운 얼굴들 보면서 즐거워하는 날이 새해 첫날이었고 그래서 그걸 통해서 사람들이 그래 올해 한 해도 좀 잘 지내보자라고 하면서도 또 우울해하는 그런 일들이 많았습니다.
◇이대호> 인간의 감정은 뭐 성웅이나 우리네 삶이나 비슷하네요.
◆이한> 그렇죠.
◇이대호> 또 다산 정약용, 대표적인 이제 실학자인데. 정약용 선생님 같은 경우에 과거에 약간 이재도 밝았다고, 재물도 좀 잘 모았다고 그 얘기해 주셨잖아요.
◆이한> 하려고 했지만 잘 안 됐죠. 이재에 밝으려고 했지만 농사지었다 망하고 오히려 부인하고 아이들이 열심히 밭농사를 지어서 그리고 마늘 농사를 지었는데 그게 대박이 나서 그 돈으로 다산 정약용의 아드님이 이제 그 귀양지까지 찾아올 수 있었습니다.
◇이대호> 근데 정약용도 연말연초에 혹시 뭐 한 살 더 먹어서 우울했다거나 이런 기록도 있나요?
◆이한> 그 시 적은 게 어렸을 때는 새해 초가 무척 기뻤지만 지금은 아니다. 그렇게 적은 게 있고.
◇이대호> 좀 나이 들어서.
◆이한> 예, 좀 더 나이 들어서 이제 아들을 데리고 여행을 갔다가 새해 첫날이 돼서 아주 긴 시를 적었는데 미주알 고주알 이런 얘기해요. 내가 이제 늙어서 새해가 돼서 기쁘지 않은데 그래도 뭐 너랑 같이 있고 무슨 그러니까 뭐, 그런 식으로 신세 한탄을 한 굉장히 긴 시가 남아 있거든요. 이제 그러고 보면 다산 정약용도 나이 드는 건 우울했겠구나. 또 다산 정약용 선생이 나이가 들어서는 대머리가 되셨거든요.
◇이대호> 아이고야.
◆이한> 그래서 그런 것도 되게 서러워하고 나이 드는 게 누구에게나 서럽지만 이렇게 훌륭한 인물에게도 이제.
◇이대호> 어떤 신체적 변화가 나타난다는 게.
◆이한> 그런 것도 있고요. 슬프죠. 나이 먹는 건. 어렸을 때나 기쁘지.
◇이대호> 그렇죠. 어릴 적에야, 뭐. 근데 정약용 선생이 남기신 그 시조, 제가 좀 이거 대신 읊어드릴까요? 늙고 나니 세시 때도 무덤덤해 슬플 것도 기쁠 것도 없더라 끊임없이 흐르는 세월 속에 그 하루가 시작인 것뿐이지. 이거 좀 풀이를 해보자면은.
◆이한> 그러니까 그 별거 없어, 새해라고 별거 없어, 한마디로 하면 그건데요. 그런데 이 다산 정약용 선생이 알다시피 유명한 실학자이고 귀향을 가셔도 책을 500권이나 썼을 정도로 자기 자신을 계속 채찍질하면서 열심히 단련한 학자인데 그런 학자마저 새해 별거 없어, 그냥 다음 날이 왔을 뿐이야라고 하는 거니까 좀 안타깝긴 하죠.
◇이대호> 그러게요, 이렇게 위대한 업적을 이루신 분들도 새해 되면 내가 뭐 했나, 별거 없네. 또 이렇게 반복을 해 왔다라는 거고. 근데 연말연초 되면 왜 우울했을까요? 조상들은 그 이유를 혹시 찾았을까요?
◆이한> 그 젊은 사람들이 남긴 거라든가 나이 든 사람이 남긴 글을 보면 약간 차이가 있는데, 젊은 사람은 이제 내가 빨리 뭔가 명성을 이루어야 되는데, 그런 게 없다. 그렇게 해서 아쉬워하는 글을 많이 남겼고요.
◇이대호> 젊은 사람들은 좀 그때도 조바심이 났던 거네요.
◆이한> 그렇죠. 나이 든 사람들은 이제 슬픈 일들이 많이 늘어나죠. 대표적인 게 먼저 간 자식들 추억하는 사람들이 되게 많아요.
◇이대호> 자식을 먼저 보낸 분들.
◆이한> 예, 그런 것도 있고 이제 머리는 허옇게 새고 몸이 이제 이리저리 늙어가는데 이제 또 이제 그러면 또 장유 같은 경우에는 돌아가신 부모님이나 어르신들이 우리 집안을 꼭 일으켜 세워야 돼. 그러면서 돌아가신 그 기억을 생각하면서 그거 내가 아직 못 이뤘는데 그렇게 아쉬워하는 경우도 있고 그래요.
◇이대호> 뭔가 좀 과업을 달성하지 못했고, 어깨가 무겁기도 하고.
◆이한> 그게 힘들죠. 그리고 사실 장유만 하더라도 굉장히 성공한 사람이거든요.
◇이대호> 장유.
◆이한> 예, 효종의 장인어른이자 인조반정을 일으켰던 사람 중에 하나입니다.
◇이대호> 근데 들었는데 왜 자꾸 잊는 걸까요?
◆이한> 괜찮습니다. 저도 잊어버립니다. 그랬던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50살 되어서 난 이룬 게 아무것도 없어. 그래서 제가 그걸 보면서 이 사람이 이룬 게 없다면 대체 누가 뭘 이루었을까.
◇이대호> 왕까지 세운 인물인데.
◆이한> 그렇죠.
◇이대호> 이룬 게 없다. 겸손했던 걸까요? 뭐.
◆이한> 그냥 사는 게 허무한 게 아닐까 싶습니다.
◇이대호> 아, 그래요?
◆이한> 그러니까 언제나 사는 건 힘든 건데 드문드문 뭔가 기쁨이 있고 작은 기쁨이 있고, 돌아서 보면 그 사람이 커다란 위업을 세웠는데. 매일매일 살아갈 때는 자기가 산에 어디쯤에 와 있는지 알 수가 없죠.
◇이대호> 근데 이게 연말연초 되면 좀 외로워지는 서글퍼지는 이유가 무엇인가를 논하라라는 과거 시험 문제가 나온 적이 있어요?
◆이한> 예, 광해군 8년 때, 그러니까 광해군에 즉위한 지 얼마 안 됐을 때.
◇이대호> 별 문제가 다 나오네요.
◆이한> 워낙 과거 시험이라는 게 이제 우리가 알다시피 이제 외우고 그다음에 그걸 외워서 쓰거나 그다음에 제일 중요한 시험은 대책이라고 해서 왕이 질문을 던집니다. 그럼 거기에 대해서 논술을 써요. 그 논술을 써서 내면 왕이 직접 채점을 합니다. 그게 가장 권위 있는 시험 중에 하나였거든요. 그래서 대책을 세워라 할 때의 그 대책입니다.
◇이대호> 대책이 지금으로 따지면 논술 시험 같은 거.
◆이한> 그렇죠, 그러니까 질문에 대한 답변. 그래서 사실 세종이나 왕들 같은 경우에는 여러 가지 중요한 문제라든가, 국가 정책을 어떻게 할 것인가, 나라를 어떻게 다스릴 것인가,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그런 걸로 문제를 냈거든요.
◇이대호> 구체적인 정책. 사실 그게 일반적이죠.
◆이한> 그런데 가끔은 왕이 갑자기 그 흥이 들었는지 어땠는지 굉장히 이상한 문제를 낼 때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대표적인 케이스는 정조가 담배의 유용한 점에 대해서 써라. 그런 경우가 있었고 그다음에 또 그것까지는 뭐.
◇이대호> 담배의 유용한 점?
◆이한> 예, 왜냐하면.
◇이대호> 이거 정조 때입니다. 정조 때. 지금은 아닙니다.
◆이한> 골초였거든요.
◇이대호> 정조가 골초였어요?
◆이한> 그러니까 일찍 죽었죠.
◇이대호> 아.
◆이한> 그리고 이제 방금 얘기한 광해군이 8년 때 갑자기 * 시험 문제를 낸 거예요. 섣달그믐이 되면 왜 슬플까. 거기에 대해서 한번 써봐라.
◇이대호> 이게 의학 시험입니까? 철학 시험입니까.
◆이한> 철학이자 문학이자 기타 등등 전부를 다 합친 시험이긴 합니다만, 그래도 굉장히 특이한 시험이었기 때문에 아마 시험지 받은 사람들 전부 얼어붙지 않았을까.
◇이대호> 그렇죠. 막 열심히 공부하고 책 보고 했는데, 갑자기 무슨 섣달그믐날에 우울한 이유를 적으라고 하면.
◆이한> 굉장히 감성적인데, 광해군이 약간 그런 타입이긴 했어요. 연산군과 광해군이 약간 그런 감정적으로 출렁이는 게 좀 격하다고 할까요?
◇이대호> 아, 근데 시험 내는 건 어차피 왕 마음이니까.
◆이한> 예, 그렇게 해서 결국. 그래도 어쨌거나 왕의 명령이니까 그 시험을 봤고. 그래서 시험을 합격한 사람도 있었습니다만 이 당시 답안지 중에 하나가 12등 한 사람의. 아, 10등 한 사람의 답안지거든요.
◇이대호> 10등한 사람의 답안지.
◆이한> 그 사람의 답이 너무 잘 썼기 때문에 10등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옛날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시험 잘 본 시험 답안지 있잖아요. 그런 거는.
◇이대호> 모범 답안.
◆이한> 예, 모범 답안으로 해서 그 답안만 모아서 책으로 만들어서 사람들이 쫙 돌려봤어요. 왜냐면 왜냐하면 과거 공부할 때 남이 잘 쓴 글 보고 흉내내는 연습하는 거죠.
◇이대호> 그렇죠. 당시에 논술학원 느낌으로.
◆이한> 예, 에센스. 과거 시험 에센스라고 해서. 아니요, 실제로 책 제목이 동책정수거든요. 정수가 에센스입니다. 그러니까 동책이라는 게 동쪽에서 나온 대책문 중에서 에센스, 그런 뜻이에요.
◇이대호> 동책정수.
◆이한> 그랬는데 이 이명한이라는 사람이 굉장히 유명한 문필가 집안의 3대손이거든요.
◇이대호> 이명한.
◆이한> 이정규라고 해서 굉장히 유명한 사람의 후손입니다.
◇이대호> 이분이 그 10등 했다는 거예요?
◆이한> 예.
◇이대호> 10등을 했는데 거의 모범 답안으로 꼽힌.
◆이한> 예, 그래서 1등서부터 9등 답안은 안 전해지는데, 이 이명한의 답안지만 전해집니다. 여기 나온 얘기가 그거예요. 섣달이 지나면 그 슬픈 게 당연하다. 이 삶이라는 것이 굉장히 허무한 것이고 뭘 해야 될지 알 수 없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도덕을 갈고 닦아서 정신을 갈고 닦아서 당장 오늘 죽더라도 후회가 없게 만들어야 된다. 그렇게 나와 있어요. 그래서 글 전체를, 긴데 보면 굉장히 아름다워요. 그래서 맨 처음에 위로를 해줘요. 그래 섣달 되면 슬프지, 아쉽고 한해 간게 뭐 하나 싶고 슬프긴 한데, 그래도 우리는 자기 자신을 다독이고 공부를 열심히 하고 도덕을 세워서 그렇게 살아야 된다라고 굉장히 아름다운 글을 남겼는데. 문제는 이걸 썼을 때 이 이명한 나이가 22살밖에 안 됐어요. 그래서 이거 무슨 애늙은이냐, 아니면 성숙한 건가, 제가 약간 그런 생각이 들긴 했습니다.
◇이대호> 사회적 경험이 많았다고 보기는 어려운 나이인데 어찌 됐든 간에 이제 글을 잘 쓰면 모범 답안에 꼽혔던 거고 그래서 그때 광해군 8년에 섣달그믐날이 되면 서글퍼지는 이유가 뭔지 이에 대해 논하라 해서 10등을 했지만 모범 답안으로 꼽혔다. 요거 제가 좀 낭독을 해드릴까요?
◆이한> 예.
◇이대호> 지나가는 세월이 안타까워서이고 밤새도록 자지 않는 것은 잠이 오지 않아서가 아니고, 둘러앉아 술잔을 기울이는 것은 세월 가는 것을 안타까워하는 것. 근데 이 또한 부질없는 것. 그저 일평생 학문에 힘써 밤늦도록 꼿꼿이 앉아 마음을 한 곳에 모으면 되며, 그렇게 사색하고 공부하게 되면 늙는 것도 모른 채 때가 되면 순수히 죽음을 맞이하게 되고. 그렇다면 무슨 유감이 남겠느냐.
◆이한> 아무리 봐도 20대가 쓸 글은 아니에요.
◇이대호> 22살에. 근데 어찌 됐든 간에 이걸로 급제한 거잖아요.
◆이한> 예, 1등은 아니었죠. 그래서 궁금해요. 과연 1등서부터 9등까지는 어떤 답을 썼을까?
◇이대호> 물론 이제 다른 과목도 있었겠습니다만.
◆이한> 아니요. 그 한 과목만 보는 건데요. 그 글 하나로만 채점한 건데, 이게 왕의 마음대로 채점하는 거기 때문에 광해군 마음에 쏙 드는 답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광해군 마음에 쏙 드는 대답은 다른 거였겠죠.
◇이대호> 그렇죠. 그러니까 10등을 줬을 텐데, 하여튼 이게 명문으로 남아있다라는 거고요. 이명한이라는 분의 글이었습니다. 아까 어떤 분이 새해에도 떡국 먹었냐고 글을 올려주셨는데. 새해, 조선시대에도 이게 떡국 먹는 문화가 있었겠죠. 이게 언제부터 있었을까요?
◆이한> 당연합니다. 조선시대 중기의 요리책 같은 데 보면 이제 떡을 꿩의 국물에 데쳐낸 다음에.
◇이대호> 꿩고기 국물이요?
◆이한> 네, 꿩 국물에. 떡을 데쳐놓은 다음에 그 위에 고기 산적을 얹고 위에다가 뜨거운 국물을 계속 끼얹어서 먹어가는, 먹는 그런 요리가 있었거든요. 근데 이제 조선 후기 정조 때쯤 되면 동국세시기만 봐도 사람들이 떡국을 먹습니다.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떡국과 거의 비슷해요. 이 꿩 국물 같은 데 떡을 넣어서 끓이고 위에는 고기 꼬치를 올려놓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먹는 떡국과 거의 비슷해요.
◇이대호> 예전에는 근데 그 그릇 위에다가 꼬치에 낀 고기를 이렇게 얹어놨었다. 근데 그때는 꿩 고기 갖다가 국물을 우려냈었나보네요?
◆이한> 그래서 꿩 대신 닭이죠.
◇이대호> 아.
◆이한> 꿩고기가 제일 좋은 국물이었는데 구하기가 좀 힘드니까 대신 닭으로.
◇이대호> 그렇죠. 저 초등학교 때만 하더라도 아버지랑 이제 꿩 사냥 같이 갔던 적이 있었거든요. 근데 요즘에는 꿩고기 구경하기 어렵죠.
◆이한> 글쎄요. 저는 만두 파는 건 봤는데. 꿩만두요.
◇이대호> 아, 그래요? 갑자기 꿩고기까지 갔습니다.
◆이한> 저도 한 번밖에 못 먹어봤어요.
◇이대호> 근데 이게 떡국 먹는 것도 그러면 어떻게 보면 좋은 행사였다고 봐야 될까요? 근데 이제 떡국 먹으면 한 살 더 먹는다고 그러잖아요.
◆이한>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이 떡국을 기뻐하면서도 슬퍼했습니다.
◇이대호> 떡국 먹으면서 슬퍼했다고요.
◆이한> 예, 그래서 이 조선 후기 정조 때의 문인인 이덕무 같은 경우에는 이 떡국을 한자로 첨세병이라고 불렀거든요. 이 더할 첨자에 세는 그 해 세. 그다음에 병은 떡병. 그러니까 나이를 더하는 떡이라고 불렀거든요.
◇이대호> 나이 1살 더 먹게 하는 떡국.
◆이한> 그래서 너무 밉다고 나는 안 먹을 테다, 그런 시를 한 두어 편인가 적었습니다.
◇이대호> 이게 우리 지금 주변에서도 떡국 먹으면 한 살 더 먹어야 돼. 나 떡국 안 먹을래. 떡국 안 먹었으니까 한 살 안 먹어, 이런 농담들 주고받잖아요. 이게 조선시대에도 있었던 거예요?
◆이한> 네, 조선시대 때도 그때 중국에 사저를 다녀오면서 그때 마침 설날이 끼어서 떡국을 못 먹었던 사람이 그때 이제 그 몽경당일사라고 적었거든요. 그러면서 그 부하들에게 야, 나는 오늘 한 해 한 살 안 먹었다. 떡국을 안 먹었으니까 나는 한 살 안 먹었다, 그렇게 우겼습니다. 부하들이 그걸 보고 피식 웃으면서 떡국을 안 먹어도 여기 머리털이 전부 하얗니다. 그걸 듣고 또 돌아와서 되게 서글퍼하면서 일기를 쓴 게 나와 있어요.
◇이대호> 지금 우리네 이런 농담하면 그냥 조금 수준 낮은 농담으로 치부하는데 하여튼 조선시대에도.
◆이한> 전통이 있습니다.
◇이대호> 이게 전통 있는 농담이네요. 그래서 떡국도 우리가 설날에 당연히 먹고 신정이라고 하는 1월 1일에도 먹기도 하는데.
◆이한> 그때는 구정이 음력이죠.
◇이대호> 예전에는 그렇죠. 이게 사실 일제 강점기 이후에 막 신정 이렇게 구정 나뉘었다고 하니까요.
◆이한> 그렇죠.
◇이대호> 떡국 말고도 먹는 게 또 있었습니까?
◆이한> 도소주라고 해서 술에다가 방풍이니 계피, 그런 여러 가지 향료를 넣고 끓입니다.
◇이대호> 도소주?
◆이한> 소주가 우리가 아는 그 소주인데 이 도는 끓인다는 뜻이거든요. 끓인 소주라는 건데 꼭 그 소주를 가지고 한 건 아니고 술에다가 아까 얘기한 대로 여러 가지 향료를 넣고 끓이면 이게 달콤하고 맛있거든요.
◇이대호> 계피나 방풍. 방풍이 뭐예요?
◆이한> 방풍이라고 해서 저쪽 강릉 쪽에 있는 일종의 나물인데 죽도 많이 해서 먹고 여러 가지 나물도 해서 먹고 있습니다.
◇이대호> 나물 이름이에요. 방풍이. 그런데 이거를 넣어서 술에다 넣어서 끓여 먹는 거예요?
◆이한> 지금은 다 없어졌지만 고려 때도 있었고 일제시대 때마다도 남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거를 마시면 1년 내내 병을 앓지 않는다고 해서 안 아프다고 해서 열심히 마셨거든요. 그런데 이 술이 마시는데 특별한 풍습이 있습니다. 방에 다 함께 모여서 도소주를 마시는데 어린 사람부터 한잔 마시고 방 밖으로 나가요.
◇이대호> 물론 성인이겠죠. 술이니까.
◆이한> 한번 끓였으니까 그거 괜찮을 것 같은데 물론 거기에 끼려면 일단 어른이어야겠죠. 애들을 데리고 마시지 않을 테니. 그래서 젊은 애들은 신난다 하고 마시고 나가는데 나이가 들면 들수록 마지막에 남는 거예요. 그래서 강제로 늙었다는 것을 체험하게 되는 그런 풍습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젊었을 때는 몰라요. 그냥 야, 신난다, 도소수다 하고 마시고 나가요. 그런데 나이가 들면서 점점점점 뒤로 가다가 맨 마지막으로 술을 마시게 되면 아이고, 내가 늙었구나 그러면서 비로소 슬퍼하면서 시를 쓰기 시작해요. 내가 도소주에서 제일 늦게 마시네. 그래서 그런 이야기들이 그런 또 시들이 남아 있습니다.
◇이대호> 8078님이 도소주라고 하니까 요즘에 뱅쇼 같은 거 아니냐고.
◆이한> 그럴 수도 있죠. 거기도 계피 들어가니까.
◇이대호> 4762님도 뱅쇼 같은 느낌이라고 보내주셨네요. 그런데 도소주라는 걸 마시면서도 결국은 한 살 더 먹는다라는 걸 느꼈고 또 여기에서 서글퍼했던 거고요.
◆이한> 그래서 정약용도 젊었을 때는 도소주 좋았지.
◇이대호> 다산 정약용이요?
◆이한> 그렇게 했는데 이제 나이 들어서 제일 마지막으로 마시고 나오게 될 때 이 택당 이집이라든가 여러 가지 역시 유명한 사람들이 나이 들어서 한 70~80 되면 제일 마지막에 마실 수밖에 없잖아요. 이익이라든가 그러면 그 사람들이 그제서야 이제 내가 제일 마지막에 마셨어, 그런 식으로 글을 쓰더라고요. 그래서 젊었을 땐 모르는데 나이가 들면 들수록 슬퍼지는 거예요.
◇이대호> 사실 그런데 누구나 겪는 일이잖아요.
◆이한> 그렇죠.
◇이대호> 그냥 조선시대에도 심지어 다산 정약용도 그랬다고 하니까요. 그리고 앞서서 성웅 이순신 장군도 나이 먹는 거 슬퍼했다고 하니까요. 말이 나와서 말인데 요즘에 그 노량이라는 영화 관객 400만 명 넘었다고 하고 서울의 봄 다음은 노량이라고 요즘에 하더라고요. 혹시 보셨나요?
◆이한> 아직 못 봤죠.
◇이대호> 안 봐도 다 아시는 내용이라.
◆이한> 그렇기도 하거니와 그 노량의 결말을 알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가서 울면서 나올 것 같아서 별로 아직은 좀 마음을 다잡고 있습니다.
◇이대호> 그렇긴 합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이순신 장군이 지금까지 살아있을 수 없는 거니까. 제가 너무 초월했나.
◆이한> 아니요. 그런데 거기에서 돌아가셔서 행복하게 가신 건 맞아요.
◇이대호> 행복하게 가셨다고요?
◆이한> 왜냐하면 보통 왕조에서 왕보다도 더 명성이 있는 장군이 전쟁이 끝났을 때 무사했을까라고 싶으면 저는 약간 의문이거든요. 그래서 전쟁이 끝나는 순간에 돌아가셨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더 험한 꼴 안 보고 왜냐하면 류성룡만 하더라도 전쟁이 끝나자마자 좌천돼버리거든요.
◇이대호> 임진왜란 끝나고. 어떻게 보면 이순신 장군은 임진왜란의 거의 마지막 장면, 마지막을 장식할 분.
◆이한> 맞습니다.
◇이대호> 또 이게 장군으로서 전투 그 최일선에 있었고 그 현장에서 죽음을 맞이했던 그게 노량이라는 영화에 또 펼쳐질 텐데 저도 아직 못 봐가지고. 그런데 이순신 장군에 대해서 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 것들이 좀 몇 가지 있다고 하는데 대표적인 게 이순신 장군의 고향 이야기라고요.
◆이한> 이순신 장군의 사당이 현재 현충사로 아산에 있습니다. 그래서 의외로 많은 분들이 아산이 고향이겠거니 생각하시는데 실제로는 서울 을지로3가 쪽에 있는 옛날 이름은 건천동.
◇이대호> 건천동.
◆이한> 마른내라고 하는 데였습니다. 마른내. 마른 건 자에 내 천 자 해서 한강이 흐르다가 말라붙은 그런 땅입니다.
◇이대호> 그러니까 많은 분들이 현충원이 있는 충남 아산.
◆이한> 현충사.
◇이대호> 현충사, 현충원, 큰일날 뻔했네.
◆이한> 저도 헷갈립니다. 저도 자주 헷갈려요.
◇이대호> 현충사. 저도 어릴 적에 자주 갔거든요. 어디 갈 데 없으면 엄마, 아빠가 거기로 데리고 가가지고. 그런데 충남 아산이 아니라 지금 을지로3가다.
◆이한> 거기가 옛날에 건천동, 마른내골이라고 했는데요. 거기 집이 한 52채인가 있었다고 합니다.
◇이대호> 많지 않았던 거죠.
◆이한> 지금 아파트 세우고 있으면 금방 뚝딱인데 그 건천동이라는 데는 집이 52채 있었고 보아하니까 그렇게 부자 동네는 아니에요. 그런데 거기에서 이순신이 태어났는데 지금 을지로3가에 내리시면 명보극장 옛날에 있었던 데예요. 지금 명보플라자가 됐는데 그 골목길 사거리에 가보면 비석이 세워져 있습니다. 여기가 이순신 탄생지라고. 아마 지금쯤 가보면 아마 단장이 돼 있을 텐데 제가 한 번 갔을 때는 그 리어카 기대어 세워져 있고 그래서 약간 좀 버려진 그런 느낌이 또 났었어요. 한 10년 전쯤에 갔을 때는.
◇이대호> 그러니까 명보아트홀 그 근처에 있다는 거죠?
◆이한> 예, 맞습니다.
◇이대호> 이순신 생가터 비석.
◆이한> 맞습니다.
◇이대호> 그러게요. 그래서 저도 검색을 좀 해봤는데 거의 다 충남 아산으로 많이 나오더라고요.
◆이한> 왜냐하면 이순신의 어머님이신 초계 변씨가 바로 아산 출신입니다. 그래서 이순신이 여기서 태어나서 자라다가 집이 좀 가난했던 것 같아요. 왜냐하면 할아버지도 아버지도 과거 급제에 실패했거든요. 보통 양반 집안이 두 대 가까이 과거 급제하지 못하면 그냥 몰락한 향반이나 잔반이 되는데 먹고 살기가 아마 힘들었을 테니까 외가댁이 있는 아산으로 어렸을 때 이사 가서 거기서 오래 살았습니다. 결혼도 거기서 했고요.
◇이대호> 그래요. 그러니까 할아버지, 아버지가 급제를 못해서 조금 어렵게 살았다. 그런데 그 지역이 태어난 곳은 서울의 옛 건천동 지금은 을지로 3가. 을지로 3가 삼가 여기에서 그런데 유명한 인물이 많이 나왔다면서요.
◆이한> 그게 참 신기한데요. 이순신 후대의 사람이 바로 그 홍길동전을 쓴 원균입니다. 원균이 아니라 허균입니다. 그런데 허균이 그 자기 동네 이야기를 쓰면서 우리 동네는 정말 훌륭하다. 정말 영웅호걸이 많이 나왔다 그러면서 쓴 게 그래서 52채의 집이 있었다는 얘기를 알 수 있어요. 우리 건천동은 집이 52채 있는데 역대로 유명한 사람들이 많이 살았는데 대표적인 케이스가 이순신, 류성룡 그리고 원균. 원균도 여기서 살았어요.
◇이대호> 이순신하고 원균이 어릴 적에.
◆이한> 어릴 적에. 어릴 적에 마주쳤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왜냐하면 원균 같은 경우는 워낙 평택 출신의 애였다가 과거, 그러니까 무과 보려고 서울에 올라왔었거든요. 그러니까 이 동네가 건천동이 좀 가난한 동네다 보니까 워낙 가난한 양반들이 살거나 아니면 지방에서 살다가 시험 같은 거 보려고 올라온 양반들이 머무는 일종의 하숙집이 많은 그런 동네였던 것 같아요. 그러니까 류성룡도 안동에 살다가 올라와서 여기서 살고, 원균도 지방에서 살다가 여기 와서 시험 보고 그리고 허균도 워낙 강릉 쪽에서 살다가 여기 와서 살고 그랬던 것 같습니다.
◇이대호> 그러니까 다들 여기서 태어난 게 아니고 한 번쯤 시험 보러 거쳐 가거나 그러면서 이 지역에 잠시라도 살았던.
◆이한> 그런데 이순신은 여기가 고향이고요.
◇이대호> 그러네요. 이순신은 을지로3가가 고향이다.
◆이한> 그래서 어렸을 때 류성룡이 이순신하고 만났기 때문에 나중에 그 이야기를 자주 해요. 내가 어렸을 적에 우리 순신이랑 친하게 지냈는데.
◇이대호> 우리 순신이.
◆이한> 3살 아래입니다.
◇이대호> 이순신 장군 본명인 거죠?
◆이한> 순신이 이름이고 자는 여해입니다.
◇이대호> 여해. 그래서 어릴 적에도 그냥.
◆이한> 아마 다른 이름이 있을 수 있어요. 왜냐하면 옛날에는 옛날에도 건강하게 살려고 개똥이, 소똥이, 이렇게 붙여지는 경우도 많았거든요.
◇이대호> 집에서 부르는 이름 따로 학교에서 부르는 이름 따로 이렇게. 그래서 류성룡이 우리 순신이.
◆이한> 어렸을 때부터 잘 알고 지냈다 그런 얘기를 많이 하고, 사실 이순신의 어린 시절을 본인도 얘기하지 않고 어디도 얘기하지 않았는데 그 어린 시절이 전해질 수 있었던 것은 류성룡이 자기 책인 징비록에다가 이순신의 어렸을 적 이야기를 적어놨기 때문에 우리가 알 수 있는 겁니다.
◇이대호> 징비록이라고 하는 거 다시는 임진왜란 같은 걸 겪지 말자라고 해서 류성룡이 쓴 건데 맞습니다. 거기에 이순신 장군의 어떤 화려한 시절이 아니라 어릴 적 이야기도 담겨 있다. 어떻게 묘사가 돼 있나요? 어릴 적 이순신은.
◆이한> 그게 그렇게 우리가 생각하는 그 성웅 이순신의 이미지와 크게 다르게 옛날에 요즘도 아이들한테 바라는 것들이 부모님이 바라는 게 공부 열심히 하는 거잖아요.
◇이대호> 어른 말 잘 듣고.
◆이한> 그런데 이순신은 그 당시에 불량인 한 아이들이 했던 것이 공부는 안 하고 하는 놀이가 전쟁 놀이였습니다.
◇이대호> 소년 이순신의 전쟁놀이.
◆이한> 남자애들끼리 모여서 이 패를 갈라서 서로 진지를 쌓고 서로 투닥투닥투닥 싸우는 얘기인데 하루 웬종일 그걸 했으니까 조선 부모들이 제일 싫어했던 놀이입니다. 공부는 안 하고, 하라는 공부하고 쌈박질이나 해대니 좋아할 리가 없는데 그걸 이순신이 정말 열심히 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대호> 글은 안 읽고 나가서 뛰어놀고. 그런데 그것뿐만이 아니라 전쟁놀이 하면서 진지 구축하고.
◆이한> 그런데 아시다시피 당시 서울은 길이 되게 좁았어요. 그렇기 때문에 맨날 그 길이 좁은데 거기다 진지까지 세우면 얼마나 사람들이 오가기 힘들었겠습니까? 그런데 그걸 가지고 어르신들이 야, 이런 거 그렇지 않냐라고 잔소리를 하면.
◇이대호> 얘들아, 치워, 이거 치워 했는데.
◆이한> 이순신이 자기가 만든 활과 화살을 뽑아들어서 눈을 겨누면서 화살을 쏘려고 했다고.
◇이대호> 어른한테요?
◆이한> 눈에다 겨누고.
◇이대호> 그냥 몸이나 얼굴도 아니고 눈에다가 겨뤘다라고 기록에 남아 있는 거예요?
◆이한> 급소를 노린 거니까. 그래서 이거는 동네 깡패인데라고 생각했는데 문제는 중요한 게 이걸 적은 류성룡은 이순신을 흉보려고 한 게 아니라 우리 애가 이렇게 용감하고 씩씩했어요라고 칭찬하게 쓴 글인데.
◇이대호> 대범했다.
◆이한> 그렇긴 하지만.
◇이대호> 그래도 어른한테 화살을.
◆이한> 제가 이순신이었으면 이 기록을 보고 별로 기분 안 좋아했을 맞아요.
◇이대호> 그렇죠. 지금이었으면 얘 퇴학시켜야 된다, 막 이러면서 난리가 났겠죠. 그런데.
◆이한> 굉장히 불량했던 거겠죠.
◇이대호> 여튼 역사의 단편이기는 한데 그래서 성웅 이순신도 소년 시절에는 말 안 들었다.
◆이한> 전쟁놀이가 얼마나 심각한지 나중에 유명한 오성 이항복, 오성과 한음 할 때 오성 이항복도 젊었을 때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서 엇나갔거든요. 그때 했던 게 바로 그 전쟁놀이였다고. 그래서 어머니가 붙들고 울면서 네가 이러면 안 되지 하면서 그때서부터 마음을 바로잡았다고 하는데 이순신은 언제 마음을 바로잡았는지는 알 수가 없고요. 다만 어렸을 때는 약간 동네에 불량소년이었던 시절이 있었다고 동네 친한 형이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대호> 동네 친한 형 류성룡. 그런데 지금 남자 아이들도 총싸움, 칼싸움 많이 하니까 그럼 그런 애들 데려다가 너는 이다음에 사관학교에 가거라, 공부도 열심히 하거라, 이순신처럼 되거라 하면 되는 거고요. 그런데 이순신 장군이 성장하는 과정은 어땠을까요?
◆이한> 기록이 잘 안 남아 있거든요. 그러니까 아산에 간 다음에 대체 이런 불량 학생이 어떻게 해서 성웅이 되었는가. 이거는 완전히 번데기가 탈바꿈한 것도 아니고 너무 급격한 차이가 있어서.
◇이대호> 어른한테 대들던 이순신이.
◆이한> 그래서 아니, 물론 그 대들던 게 나중에 부당한 일에 대들 때의 그 성깔이 그대로 나오긴 하는데요. 잘 나와 있지 않은데 추측할 수 있는 거는 워낙 이순신이 셋째 아들입니다. 위에 형 둘이 있었어요. 그 형 둘이 조카들을 한 여섯인가 남겨놓고 일찍 돌아가셨거든요. 그러니까 가장이 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 펼쳐졌을 것 같고 그리고 또 하나 결혼을 방치랑 결혼했는데 그 장인어른인 방진이 바로 무관이었습니다.
◇이대호> 장인어른이 무관이었다.
◆이한> 그래서 그전까지는 이순신의 집안이 문관이었다가 장인어른의 그것도 받아서 무과로 전향한 게 아닐까 싶습니다.
◇이대호> 장인의 영향을 받아서 무과로 전향을. 그런데 과거에 급제한 게 이순신 장군이 굉장히 좀 늦었다고 알고 있거든요.
◆이한> 그렇게 늦지는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32살에 급제했는데.
◇이대호> 32살이면 당시에 어떻게 안 늦었던 거예요? 어떤 거예요?
◆이한> 왜냐하면 대부분 무과 급제의 평균이 34살이라고도 하고.
◇이대호> 원체 어려운 시험이라.
◆이한> 40살이나 50살 넘어서 붙는 사람들도 많았다 보니까 사실 그 정도면 그리고 사실 조선시대도 무과가 나중에 보면 약간 좀 파벌로 해서 유명한 무과 집안에서 계속 많이 나오고 해요. 그런데 이순신은 신진이었잖아요. 그런데도 잘 붙었고 반대로 무과의 집안의 정통 출신 같은 경우에는 바로 원균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좀 더 급제가 수월했을 수도 있죠.
◇이대호> 좀 있는 집 안에서 금수저 출신은 조금 더 빠르고. 그런데 이순신 장군은 1576년 32세 때 무과에 급제했고 그런데 아까 그 이명한이라는 사람이 10등 했다라는 이야기했는데 이순신 장군도 이렇게 등수가.
◆이한> 12등.
◇이대호> 12등.
◆이한> 12등인데 제가 그래서 궁금했어요. 과연 이순신을 앞세우고 급제한 사람들은 대체 누구일까?
◇이대호> 1등부터 11등까지.
◆이한> 그래서 궁금해서 찾아봤는데 1등이 문씨 성 가진 사람인데 이 사람은 급제만 했지 관직을 안 했고요. 그다음에 3등인 사람도 그냥 굉장히 낮은 벼슬 하다가 관뒀고, 두 번째 벼슬 한 사람은 임신왜란 내내 그 별장이라든가 그 하위 장군 정도 하다가 나중에 뇌물 받았다고 해서 쫓겨나고 막 그랬습니다. 그리고 다들 기억 못 해요. 1등서부터 11등까지 누군지 아무도 모르고 오로지 12등인 이순신만 역사의 기억에 남았습니다.
◇이대호> 이제 우리가 옛날에 코미디언의 유행어도 있었습니다만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이 아니라 이순신 장군은 12등으로 급제를 했는데 12등만 우리가 기억을 하고 있는 거예요. 그 이순신 장군의 동기들 사이에서.
◆이한> 아무도 기억 못해요. 저도 한번 너무 처음 본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하나하나 다 찾아봤는데 별로.
◇이대호> 그러게, 그런 거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 내 동기가 이순신이야, 약간 이런.
◆이한> 그럴 수는 있습니다. 왜냐하면 과거에서 한 번에 같이 급제한 그 동기들이 굉장히 중요했거든요. 그럼 뭐해요? 본인이 이순신이 아닌데.
◇이대호> 그런데 나중에 이순신 장군이 뭐라 해야 될까, 승진이 좀 빨랐다고요?
◆이한> 보통 우리가 임진왜란 전에 조선이 전쟁이 벌어질 줄 몰라서 대비를 안 했다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건 아니고요. 조선도 일본이 전쟁의 조짐이 있다는 걸 알았고 심지어 백성들 사이에도 그 소문이 퍼져요. 일본이 쳐들어온다더라. 그것 때문에 걱정하는 얘기도 나오고 그 선조가 임진왜란에 대비하기 위한 대표적인 케이스가 바로 이순신을 승진시킨 거였거든요.
◇이대호> 미리.
◆이한> 그 당시에 현감, 정읍에서 현감하고 있던 이순신을 전라좌수사에 낙하산으로 꽂아놓습니다. 그전까지는 그냥 육군만 돌아다니던 별 볼일 없던 그냥 장군 중 하나였는데, 장수 중에 하나였는데 그래서 원칙적으로 따지면 거의 한 7계급을 특진시킨 거나 다름없는.
◇이대호> 몇 계급이요?
◆이한> 7계급 정도.
◇이대호> 7계급이요?
◆이한> 예.
◇이대호> 우리가 1계급, 2계급도 특진이라고 하는데. 7계급 특진이요.
◆이한> 물론 한 번에 한 건 아니고 한 3, 4 그런 식으로 해서 조금씩 조금씩.
◇이대호> 껑충껑충.
◆이한> 뛰긴 했는데 그렇다 하더라도 너무 파격적이었기 때문에 그 신하들이 반대를 합니다. 이거 너무 급하게 출세시킨 거 아니냐. 그랬더니 선조가 안 된다고 해야 된다고 그래서 이순신을 전라좌수사에 앉혔는데 당시 인사권을 쥐고 있던 게 이조 판서거든요. 이조 판서가 바로 류성룡이었습니다.
◇이대호> 동네 형.
◆이한> 그러니까 약간 좀 봐준 거고 또 한편으로는 이순신이 그만큼 아무리 낙하산을 시켰다 하더라도 본인의 실력이 있다고 생각이 되니까 그렇게 내린 거고요. 그래서 이순신이 전라좌수영, 전라도 쪽에 가게 되는데 항상 역사를 공부하거나 관심 있는 사람한테 늘 가끔씩 돌아오는 떡밥이 있는데요. 이런 겁니다. 만약에 선조가 이순신을 전라도가 아니라 경상도우수영, 그러니까 임진왜란 때 일본의 공격을 제일 먼저 맞은 그곳에 부임시켰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런 얘기를 하곤 합니다.
◇이대호> 역사가 바뀌었을 수도 있다.
◆이한> 그렇죠. 그런데 물론 어떻게 됐을지는 알 수 없죠. 왜냐하면 일본이 워낙 갑자기 그것도 너무 많은 병력을 와서 쳤기 때문에 그렇다 하더라도 조금은 바뀌지 않았을까, 적어도 원균처럼 불태우고 도망가지는 않지 않았을까, 그런 얘기도 하고 그러니까 항상 식지도 않고 계속 사람들이 얘기해요. 이랬을 것 같아, 저랬을 것 같아. 그렇게 얘기합니다.
◇이대호> 1281님이 문과로 안 가서 정말 다행이라는 이야기도 해 주시고요. 그러니까 역사가 또 달라질 수도 있었는데 사실 저희가 준비한 얘기 중에 못 다룬 게 많습니다. 임진왜란 아직 시작도 안 했습니다. 이거는 다음 시간에 들어야죠.
◆이한> 알겠습니다.
◇이대호> 우리 이순신 장군 이야기만 하더라도 이건 또 1시간은 더 필요할 것 같고 역사 커뮤니케이터 이한 작가와 함께 했고요. 조선사 쩐의 전쟁, 신간 나온 것도 기대해 보겠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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