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살은 있었다”…베트남 파병 60년, 가해의 기억을 복원하며 [한겨레21]

신다은 기자 2024. 1. 9. 1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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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전 학살 피해자 만난 참전군인 송정근 목사
“그때 피해 입은 분들께 깊이 사죄드리고 싶어”
베트남전 참전군인 송정근씨가 2023년 5월 19일 다큐멘터리 <사도>를 배경으로 한 부산의 한 스튜디오에서 한겨레21과 인터뷰하고 있다. 류우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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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2024년 1월19일은 베트남전쟁 민간인 학살 관련 2심 재판의 첫 변론기일이다. 퐁니·퐁녓 학살 피해자 응우옌티탄이 2023년 2월 국가배상소송 1심에서 승소했으나 피고 대한민국의 항소로 법정 공방을 이어가게 됐다. 국방부와 대한민국월남전참전자회는 민간인 학살을 부인하고 있다. 공교롭게도 2024년은 한국의 베트남전 파병 60년이 되는 해다. 전쟁을 둘러싼 국가의 기억과 피해자의 기억은 다시 첨예하게 부딪친다.

그사이 또 한 명의 군인이 독립다큐멘터리를 통해 민간인 학살을 증언했다. 해병대 제2여단(청룡부대) 2대대 6중대 소속 참전군인 송정근(81)씨는 1966년 1월 베트남 투이호아 추수보호작전 때 민간인 학살이 있었다고 말한다. 그는 1966년 11월 지엔니엔 학살 때도 작전에 참여했다. 살아남은 피해자에게 송씨는 2023년 5월 베트남으로 날아가 사과했다.

“어떠한 차원의 가해였는지가 분명해져야 그에 마땅한 사과를 할 수 있다. 의미가 분명치 않은 사과는 앞뒤 없는 용서만큼이나 형식적일 수밖에 없다.” <빈딘성으로 가는 길> 저자 전진성 부산교육대 사회교육과 교수는 ‘더욱 정확히 반성하고 사과하기 위해’ 가해의 역사적 맥락을 들여다봐야 한다고 말한다.

<한겨레21>은 그 목소리에 귀 기울인다. 본지 인터뷰와 다큐멘터리 ‘사도’ 속 송씨의 진술, 윤충로 동국대 초빙교수의 구술생애사 기록을 모았다. 송씨의 민간인 학살 증언은 본 기사로, 군인으로 겪은 전장 경험은 별도 기사(“목숨 하루 연장하려 교회 나가…평생 후유증 따라다녔다”)로 다룬다.

“정말로 심한 갈등을 느꼈어요. 이게 정말 내 진실함인가. 정말 이 모습이 참된 내 모습인가, 아니면 가식적으로 꾸민 내 가면이 아닌가. 전쟁이라는 참사 속에 던져진 병사 살인자로 봐야 할 것인가, 아니면 (전쟁) 영웅으로 봐야 할 것인가. 어떤 존재냐 하는 의문을 나 자신에게 던져보았어요.”

송정근(81)씨는 은퇴한 목사다. 한때 베트남전쟁에 파병된 군인이었다. 그는 베트남전에서 민간인 학살이 있었음을 최근 다큐멘터리를 통해 증언했다. “민간인 학살은 없었다” “설사 있었어도 북한군 소행”이라 말하는 대한민국월남전참전자회를 뒤로하고 송씨는 “학살은 있었다”고 말하는 소수에 속하기로 했다. 베트남 땅을 찾아 생존자에게 사과하고 동료 참전군인들을 설득하는 그의 여정이 독립다큐멘터리 <사도>에 담겼다. ‘사도’는 임무를 띠고 파견된 무리라는 뜻으로, 참전군인을 빗댄 말이다. 또한 한때 예수의 박해자였다가 회개하고 제자가 된 사도 바울을 염두한 제목이기도 하다. <사도>는 2024년 상반기 공개를 앞두고 있다.

“군인은 살인자인가, 영웅인가”

꾸벅꾸벅 절하며 살려달라고 비는 사람들. 그 앞에서 땀 흘리는 군인들. 빨리 쏘라고 소리치는 간부. ‘청룡 1호’ 작전(1965년 12월22일~1966년 1월18일) 전후로 송씨가 기억하는 장면이다. 

“처음 1호 작전 들어가기 전에 수상한 사람들 있으면 더러 사살시키고 그러는데요. 소대장이나 최소한 중대장 명령하에 그러거든요. (사람을) 잡아놓고 ‘야, 사살시켜’ 그러면 그 사람들이 살려달라고 막 그냥 비는 거예요. 눈이 이글이글 불덩어리처럼 벌겋게 붉어지는 겁니다. 총 쏘는 놈도 잔뜩 긴장해가지고 땀을 뻘뻘 흘리면 ‘야, 뭐 해 빨리 죽여’ 그럽니다. 그러다가 얼떨결에 총을 쏘는 거예요. 그러고는 며칠 잠을 제대로 못 잔다는 거예요. 눈만 딱 감고 졸고 있으면 꿈에 막 마귀할멈이 나타나서 자기를 죽이려고 덤벼드는 환상이 막 떠오른다는 거예요.”

송씨는 1965년 10월 파월 1진으로 베트남에 파병돼, 1966년 12월까지 약 1년3개월간 청룡부대(해병대 제2여단) 2대대 6중대에 소속돼 있었다. 파월 초창기 청룡부대의 주요 임무는 미군이 고전하던 베트남 땅에서 1번 국도를 사수하고 곡창지대인 투이호아를 지키는 것이었다. 이 과정에서 “적이 있는 곳을 찾아가 수색하고 격멸하는 전술”(청룡부대 여단 참모장 정태석 증언)을 적극적으로 펼쳤다. 청룡 1호 작전도 투이호아 북쪽 일대를 폭넓게 수색해 “베트콩 훈련소와 은거지를 찾아내는 방식”(청룡부대 제2대대장 오윤진 증언)이었다. 그만큼 마을 주민들과 접촉하고 충돌할 가능성도 컸다.

적군을 향한 적개심은 종종 마을 주민들에게 튀었다. “방금 전까지 살아서 농담도 건네고 그러던 녀석이 갑자기 그냥 조각으로 변신해버리니 참 기가 막힌 거예요. 아마 그런 게 전우애라고 하는 모양인데 그런 희생을 자꾸 당하면 나중에 그냥 눈이 뒤집혀버리죠.”

2023년 5월 19일 베트남전 참전군인 송정근씨와 인터뷰한 장소인 부산의 한 스튜디오에 작전 당시 지도가 올려져 있다. 류우종 기자

주민을 향한 의심도 증폭됐다. 연합군이 적으로 삼은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일명 ‘베트콩’)은 부패한 남베트남 정부에 대항해 결성된 반정부 게릴라 조직이었다. 전투복을 입고 교전하는 군인들이 아니어서 밤낮으로 마을을 드나들며 주민들 조력을 받았다. 한국군은 주민을 작전상 보호한다면서도 주민의 베트콩 조력 가능성을 자주 의심했다.

“우리가 대민 지원한다고 먹고 남은 시레이션(전투식량)을 가지고 갑니다. 그러고 나서 (베트콩) 땅굴을 습격해서 노획물을 정리하다보면 그것이 나오거든요. 어떤 때는 굴 속에서 잡아낸 수상쩍은 사람들이 며칠 뒤 그대로 활동하는 것을 본단 말씀이에요. …‘정말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누구냐’ 그랬거든요.”

주민 개개인의 베트콩 가담 여부는 그때도 지금도 알 수 없다. 다만 한국전쟁 때 민간인들이 처한 상황과 비슷했을 것으로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추정한다. “낮에는 태극기가, 밤에는 인공기가 휘날렸던 한국전쟁 시기 빨치산 활동 지역을 보는 듯하다. 그로 인해 거창, 함양에서와 같이 양민 학살을 겪어야만 했다. 대다수 사람들에게 중요한 것은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생존이었다.”(박태균, <베트남전쟁>)

다큐멘터리 <사도> 속 송정근씨가 2023년 5월 베트남을 찾아 <파월한국군전사> 속 지도와 현재 지형을 비교하며 전쟁 당시를 되짚어보고 있다. 송대일씨 제공

옆 소대 소문을 듣고 살기로 가득 찬 군인들

송씨는 다큐멘터리에서 1968년의 퐁니·퐁녓 학살 사건 조사 기록(‘미군 한국군 감찰내용 조사 보고서’)을 앞에 두고 말한다. “이보다 훨씬 많았다.” 무작위의 전투에서 기억은 ‘덩어리’였다. 그런 덩어리 중 극히 일부가 피해자 증언과 자료를 토대로 ‘○○ 학살’로 호명된다. 수많은 작전을 치른 송씨의 기억은 ‘사건’으로 분류할 만큼 구체적이지 않다. 베트남에 가서도 지도와 산세 모습에 의존해 기억을 되살려낸다. 다큐 제작자이자 송씨의 아들인 송대일씨는 전쟁터에서 지휘관이 아닌 병사의 기억은 파편적이라고 설명한다. “전쟁터에서 병사의 시점은 철모 아래로 아주 제한적인데, 그 상태에서 전쟁터를 경험하는 거잖아요. 지금 내가 뭘 하는지 어디에 있는지도 알기 쉽지 않아요.” 

그런 송씨가 명확하게 기억하는 학살 사건이 있다. 청룡 1호 작전을 막 끝낸 1966년 음력 설을 앞두고 사흘간 휴전했던 때로 그는 기억했다. 부대 내에 어떤 소식이 전해졌다.

“매복하던 옆 소대가 기습당했거든요. 생존자 말에 따르면 처음에 꽹과리를 치고 장구를 치고 우리나라 풍물놀이 하듯이 (해서) 좀 방심한 거죠. 그런데 새벽 1시15분경 갑자기 ‘따이한 라이라이’ 하면서 고함 소리가 나더니 막 그냥 방망이 수류탄을 해병대 매복 진지로 던지고…. 아침에 보니까 1개 소대 54명 중에 생존한 병사는 16명이에요. 나머지는 다 죽고 아홉 사람이 실종인데 나중에 보니까 강 어느 지점에 병사들 머리를 돌로 깨서 죽였다는 거예요, 아홉을.”

소문을 듣고 군인들은 살기로 가득 찼다고 했다. “휴전 동안 그런 일이 있은 이후로 6중대 같은 경우는 상당히 무자비해졌죠. 그래서 아침마다 공격하고 저녁에 어두워지면 방어에 들어가고 또 날이 새면 공격에 나서고…. 공격 나설 때는 ‘다 죽여라’ 그랬습니다. …깊은 정글지대로 들어가면서 거기는 무슨 전화기도 없고 아무것도 없고 완전히 고립된 자연부락들이죠. 그다음부터는 그냥 무조건 움막 전부를 불 질러버리고, 그들이 키우던 돼지 뭐 이런 짐승까지도 총으로 다 그냥 쏴 죽이고 그랬죠.” 그렇게 마을이 묻히듯 기억도 묻혔다. “거기서 사람들을 해친 것은 일일이 다 보고사항도 아니에요, 다 묻어버린 겁니다, 그냥. 대대본부에 보고도 안 하고 비밀로 이렇게 그냥 묻혀버린 거예요.”

파편처럼 남겨진 그날의 정황

<파월한국군전사> 제1권 상(上) 편에도 비슷한 대목이 나온다. 1966년 설(1월22일) 사흘 전인 1월20일, “꽹가(과)리와 징과 북이 울리며 주민들이 축제행사를 벌이는 듯하더니 얼마 안 되어 북쪽에 배치된 제3분대 지역으로 서서히 접근했다”는 것이다. 한국군이 기습당한 뒤 한 달가량 연달아 군사작전을 개시한 일도 적혔다. 다만 전사자 수가 15명으로 송정근이 기억하는 규모보다 적고, 작전 중 주민들을 피란촌으로 보내 살려줬다는 대목이 있다. <증언을 통해 본 베트남전쟁과 한국군>에 등장한 제2대대장 오윤진은 해당 사건을 언급하며 “우리 대대가 파월 이후 이렇게 당해본 것은 처음이었다. 적개심이 복받쳐 그전에는 고지만 공격했는데 (이번엔) 적이 공격해오는 마을을 샅샅이 뒤졌다”고 밝혔다.

전우를 대신한 보복이라도 무장하지 않은 민간인을 살상한 일은 정당화될 수 없다. 송씨 설명대로 푸옌성 학살 자료가 많지 않아 진상 파악에 한계가 있으나, 비슷한 시기 푸옌성에서 일어난 ‘붕따우 학살’(1966년 1월)과 ‘토럼 학살’(1966년 5월)의 경우 ‘한국군 증오비’가 세워질 정도로 주민들 원성이 높았다. 100건이 넘는 한국군 학살 가운데 증오비가 세워진 경우는 손에 꼽는다. 그만큼 잔혹했을 수 있다. 증오비에 새겨진 희생자 42명 중 26명이 여성이었고, 나이가 확인된 14명 중 4명이 어린아이였다. 연구자 응옥홍호아가 쓴 석사논문 ‘빈딘성 지역에서의 한국 군대 학살 사건들’에도 “1966년 1월19일 동호아현 호아히엡남사 일대 마을에서 한국군에 의해 350명이 죽었다”는 언급이 있다.

베트남전 참전군인 송정근씨가 2023년 5월 19일 부산의 한 스튜디오에서 한겨레21과 인터뷰하고 있다. 류우종 기자

“피해자 위해 뭐라도 하고 싶다”

송씨는 귀국한 뒤 한동안 전장의 기억을 잊고 살았다. 그를 그 시절로 되돌린 것은 아들 송대일의 다큐멘터리 제작에 참여하면서다. 2023년 5월 베트남 땅을 다시 찾아 전쟁을 돌아보고 전쟁에 얽힌 사람들을 만나는 촬영 일정이었다. 

특히 피해자와의 만남이 송씨를 흔들어놓았다. 송씨는 베트남 꽝응아이성 선띤현 지엔니엔마을에서 학살 생존자 응우옌티로안(73)을 만났다. 앞서 송씨가 언급한 푸옌 성 학살의 경우 송씨의 기억이 뚜렷했지만 생존자들을 만나기 어려웠다. 반대로 지엔니엔 학살의 경우 파병 말기여서 송씨가 학살을 구체적으로 기억하지 못했다. 다만 가해 시기로 특정된 1966년 11월13일 군인으로 작전을 수행한 기억은 명확하다고 했다.

자신의 집 안으로 들어오는 송씨에게 로안은 정중히 악수를 청했다. 작은 탁자를 놓고 두 사람이 마주 앉았다. 한참의 침묵. ‘피해를 말해줄 수 있냐’는 송씨의 요청에 로안이 입을 열었다.

“아버지와 오빠가 한국군의 학살로 돌아가셨어요. 저는 어머니를 따라갔는데, 아버지가 죽은 것을 보고 어머니가 저를 안아서 지하로 도망갔거든요. 어린아이도 다 죽였더라고요.”

로안의 말을 한참 듣던 송씨가 말했다. “명령에 의한 것이었습니다만 그런 큰 아픔을 드리게 돼 대단히 죄송스럽게 생각합니다. 제가 그때의 그런 일들에 대해서 죄송하다고 용서해달라고 빈들 그것이 무슨 위로가 될 것이며 의미가 있겠습니까마는 제가 그때 피해 입은 분들에게 깊이 사죄드리고 싶어요.”

다큐멘터리 <사도> 속 지엔니엔학살 생존자 응우옌 티 로안(73)씨가 송정근씨와 이야기 나누고 있다. 송대일씨 제공

로안이 송씨와 눈을 맞췄다. “그때 저는 죽을까봐 너무 무서웠어요. 살아남아 다행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평화가 더 일찍 왔으면 아버지와 오빠가 살아 있었을 텐데 식구들이 다 있었을 텐데. 하지만 당신이 말한 것처럼 아무도 전쟁을 원하지 않아요. 전쟁을 원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죠. 폭력을 강요받은 상황이었으니 감당할 수밖에요.”

송씨가 눈가를 훔쳤다. 로안이 손을 내밀자 송씨가 맞잡았다.

“내가 그분들을 지금 만나면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까, 그분들이 지금까지 그래도 상처 속에서 어느 정도 평온을 누려왔는데 (나의 등장으로) 오히려 평온을 흔들어버리는 하나의 악조건이 되지 않겠는가…. 그런데 처음 그분의 말을 들을 적에 피를 토하는 듯한 아픔과 억울함을 이야기하는 것 같았어요. (피해자로부터) ‘다음에 베트남에 올 기회가 있으면 그때 다시 만나 차라도 한잔 나누었으면 좋겠다’ 이런 이야기를 들을 적에 콧등이 시큰했어요.”(송정근씨)

다만 송씨의 사과에는 ‘단서’가 있었다. “국가에서 군인들은 명령에 의해서 보내졌고 또 총을 들게 되었고 총도 쏘게 되었다”는 것이다. 민간인 학살 논의에 오랫동안 천착한 고경태 <한겨레> 기자는 그 점에서 “병사들의 근원적 적은 대한민국”이라고 강조한다. “‘주민과 베트콩을 구분할 수 없어서 학살했다’ ‘베트콩이 아군을 죽여서 학살했다’고 참전군인들이 말하는 것은 사안을 너무 피상적으로 보는 것이다. 당시 베트콩들은 외세로부터 자기 나라를 지키기 위해 싸웠다. 한국군은 무슨 명분으로 그 사람들과 싸웠나. 결국 정부가 돈을 받기 위해 병사들을 보낸 것 아닌가. 참전군인의 진짜 적은 (파병을 결정한) 국가였다.”

고백한 송정근씨가 외로운 까닭은

한국에 돌아온 뒤 송씨는 경남 김해와 산청, 함양, 부산 등을 방문해 평소 알고 지내던 참전군인들을 만났다. “혹시라도 피해자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없을까” 하는 마음에 민간인 학살을 증언해달라고 그들을 설득했다.

그러나 송씨를 반가이 맞아주던 참전군인들은 ‘학살’이 거론되면 싸늘하게 돌아섰다. “이런 얘기를 하면 내가 자꾸 화가 난다”(참전군인 정아무개씨), “양민은 전혀 없다”(참전군인 류아무개씨), “우리 월남 갔다 온 사람을 개똥으로 만들었다”(참전군인 이아무개씨)는 반응이 나왔다. 송씨는 푸옌성 학살을 증언할 또 다른 전우를 찾겠다며 대한민국월남전참전자회를 두드렸다가 참전자회 간부들과 언쟁을 벌이기도 했다.

“나라가 다르고 소속 부대는 다르지만 전쟁에 참전했던 군인 대부분은 ‘내가 정당했다’는 생각을 갖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도덕적으로 여러 면에서 정당하다고 할 수는 없죠. 희생자라고 일컫는 사람들을 언제든 외면하지 말고,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상처를 쓰다듬어주고 그들을 위로해줄 수 있고 그것이 정당한 국가요 정당한 국민이요 인류애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이런 말 한다고 사실 누가 얼마나 듣겠습니까? 그래서 좀 외롭습니다….” 송씨가 말했다.

고백을 기다리며

베트남전 파병 60년이 흘렀지만 전장의 진실은 좀처럼 수면 위로 드러나지 못한다. 대규모 학살에 증거가 남는 일이 드물고, 핵심 목격자인 참전군인 증언도 턱없이 부족한 까닭이다. 그저 몇몇 학살 생존자의 목격담이 전해질 뿐이다.

송정근씨도 1966년 1월 푸옌성 투이호아로 구체적인 학살 시기와 위치를 특정했다. 하지만 푸옌성 쪽 학살 자료가 많지 않아 교차검증이 불가능했다. 반대로 자료가 있었던 지엔니엔 학살에 대해서는 송씨가 구체적으로 기억하지 못해 진실규명에 한계가 있었다.

<한겨레21>은 2000년 최영언 중위의 양심고백을 시작으로 용기 있는 참전군인들의 증언을 꾸준히 다뤄왔다. 앞으로도 베트남전쟁의 명암에 대해 용기 있게 고백하는 이들의 이야기를 기다린다.

송씨가 전장에서 겪은 죽음의 공포와 사회 복귀 후의 어려움도 별도 기사(“목숨 하루 연장하려 교회 나가… 평생 후유증 따라다녔다”)로 다룬다.

신다은 <한겨레21> 기자 down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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