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장의 마지막 당부는 우리 함께 살자…영화 '나의 올드 오크'
(서울=연합뉴스) 오보람 기자 = "이 새끼들 뭐야? 누구 맘대로 여기를 와", "두건 대가리들! 이라크에서 내 친구한테 총 쐈지?"
마을에 도착한 버스에서 히잡을 쓴 여자들과 아이들이 내리자 여기저기서 욕설이 날아든다.
겁에 질린 사람들은 쭈뼛쭈뼛 눈치를 보다가 도망치듯 건물 안으로 몸을 숨긴다. 남은 이들 사이에선 총칼 대신 말로 공격과 방어가 이어진다.
영국을 대표하는 거장 켄 로치 감독의 신작 '나의 올드 오크'는 내전을 피해 영국 북동부 폐광촌 '더럼'으로 이주한 시리아 난민들과 마을 주민들이 맞닥뜨리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석탄 호황기였던 수십 년 전만 해도 생기가 넘쳤던 이곳은 지금은 온통 회색빛으로 변했다.
주민들의 마음 역시 낡고 헤집어진 마을처럼 뒤틀려있다. 갈수록 팍팍해지는 삶은 이들에게 다른 누군가를 포용할 여유를 주지 않는다.
'올드 오크'라는 펍을 운영하는 중년 남자 TJ(데이브 터너 분)만큼은 다르다. 그는 가게 수리도 못 하는 가난한 형편에도 자진해 난민들을 돕는다. 특히 사진 찍는 걸 좋아하는 야라(에블라 마리)와는 나이를 넘어선 우정을 나누기 시작한다.
TJ는 1980년대 탄광 노동자 파업 당시 구심점 역할을 했던 올드 오크를 일종의 '소셜 믹스' 장소로 활용한다. 이곳에서 이주민과 원주민이 한데 모여 식사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함께 먹을 때 우리는 더 강해진다"는 것이 그의 신념이다.
서로를 알게 되면서 이웃 간 정이 쌓이지만, 일부 마을 사람들은 이런 모습이 탐탁지 않다. 유일하게 남은 자기들만의 공간을 굴러온 돌이 빼앗아 간다고 생각해서다.
이들의 행동은 약자를 향한 혐오가 어떻게 폭력으로까지 변질하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너희 나라로 꺼져" 같은 말로 시작한 혐오는 난민들을 기피하고 차별하는 데 이어 집단 폭행으로 점차 수위를 높여간다.
각자의 처지를 보면 일견 이해가 가는 면도 있기는 하다. 겨우 마련한 내 집은 날마다 가격이 추락하고 반대로 물가는 치솟는다. 교회도, 학교도 없어진 마을 어디를 봐도 모일 곳이라고는 오래된 펍 올드 오크가 전부다.
이곳을 차지한 낯선 이민자들은 주민들에게 공포감을 심어줬을지 모른다. 가진 건 백인 원주민 권력과 악다구니뿐인 이들이 난민을 배척하는 것은 손쉬운 분풀이 방법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로치 감독의 페르소나인 TJ는 이런 행동에 계속해서 제동을 건다. 편가르기를 주도한 오랜 친구를 찾아가 TJ가 쏟아내는 말은 직접적이고 논리적이다. 삶이 힘들 때 약자를 희생양으로 삼는 우리 모두를 향한 로치 감독의 일갈처럼 들린다.
제76회 칸국제영화제 경쟁 부문 진출작인 이 작품은 로치 감독의 마지막 장편 영화가 될 가능성이 높다. 올해로 88세인 그는 더는 장편 영화를 만들기 어려울 것이라며 은퇴를 암시했다.
노동권, 복지 사각지대 등 약자 문제를 꾸준히 다뤄온 로치 감독과 그의 오랜 파트너인 각본가 폴 라버티가 건네는 마지막 당부는 우리, 함께, 살자다. 마을 주민들이 난민들과 '우리'가 되고 각자도생이었던 삶의 방식은 '함께'가 된다. 연대의 힘 덕분에 절망에 빠져 생의 의지를 잃었던 사람들은 다시 한번 살아볼 용기를 낸다.
이 영화는 로치 감독의 색깔이 뚜렷한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2006), '나, 다니엘 블레이크'(2016), '미안해요, 리키'(2019) 등과 비교해도 주제를 더 뚜렷하게 전달한다. 영화를 본 사람들이 자신의 메시지를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할까 걱정하는 감독의 조급함과 불안이 느껴진다.
82세의 일본 애니메이션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가 지난해 내놓은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가 떠오르기도 한다.
그가 은퇴를 번복하고 이 작품을 통해 미래 세대에게 건넨 부탁은 로치 감독이 '나의 올드 오크'로 하고자 하는 말과 비슷하다. 거의 한 세기를 살아온 두 노장이 이 시대에서 같은 근심을 느끼기 때문이 아닐까.
어쩌면 난민 문제는 우리 국민들에게는 먼 이야기로 들릴 수 있다. 그러나 우리 사회 안에 이미 존재하는 외국인노동자, 성소수자, 장애인 등 약자들 역시 영화 속 난민들처럼 차별에 시달리기는 마찬가지다. 로치 감독은 '같이'의 힘으로 이에 맞서자고 말한다.
그는 칸영화제 기간 인터뷰에서 "연대는 인종차별을 포함한 모든 차별의 해독제가 될 수 있다"면서 "개인은 힘이 없지만, 집단의 힘은 엄청나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오는 17일 개봉. 113분. 15세 이상 관람가.
rambo@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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