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능 ‘판박이 지문’ 논란 확산…현직 교사 4명 수사의뢰, 2016년엔 ‘실형’
EBS교재에도 실렸다가 최종본에서 빠져
경찰 “감사원 조사 지켜보고 수사 진행”
대형 입시업체 소속 ‘일타강사’와 현직 교사의 문제 거래 의혹이 확산되고 있다. 2023학년도 수능 영어영역 23번 지문이 유명 강사가 제공한 사설 모의고사와 같은 것으로 드러난 것을 한국교육과정평가원(평가원)이 심사도 하지 않은 데 이어 EBS 수능 교재에도 실렸던 것으로 드러났다. 교육부는 이같은 상황을 우연으로 보기 어렵다고 판단, 수능 문제 출제와 교육계를 둘러싼 유착 의혹을 밝히고 공정한 입시 제도를 확립하기 위해 경찰에 수사를 의뢰했다. 감사원도 같은 사안으로 감사를 진행 중이다.
논란이 된 2023학년도 수능 영어 23번 지문은 베스트셀러 ‘넛지’의 저자인 캐스 선스타인 미국 하버드대 로스쿨 교수가 출간한 ‘투 머치 인포메이션(Too Much Information)’에서 발췌한 것이다. 지문을 읽고 주제로 적절한 정답을 고르는 3점짜리 문제다. ‘투 머치 인포메이션’은 당시 한국에서 출판되지 않았다.
문제가 된 영어 23번 지문은 수능 2개월 전인 2022년 9월 대형 입시학원 일타강사가 수강생들에게 제공한 사설 모의고사 문제와 일치했다. 당시 수험생들 사이에서 문제를 미리 풀고 해설 강의까지 들은 학생들에게 유리한 수능 문제라는 지적이 나왔다.
수능이 치러진 직후 수험생들은 이 문제에 대해 집중적으로 이의신청했다. 평가원이 수능 직후부터 닷새간 받은 이의신청 660여건 중 100여건이 영어 23번 관련 내용이었다. 그런데 평가원은 문제·정답 오류에 대한 이의신청이 아니기 때문에 심사 대상에 해당하지 않는다며 아예 심사조차 하지 않았다. 당시 평가원은 “영어 23번은 특정 강사의 사설 모의고사 문항과 지문의 출처가 동일하지만 문항 유형이나 선택지 구성 등이 다르다”고 했다.
그런데 논란이 된 이 지문이 이듬해 출간 예정이던 EBS 수능 교재 감수본에도 들어갔다가 최종본에서 빠진 것으로 알려졌다. EBS 수능 교재의 감수는 수능 출제를 주관하는 평가원이 담당한다. 평가원이 수능에 나왔던 지문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최종본에서 제외한 것으로 보인다.
평가원은 영어 23번 지문이 사설 모의고사와 겹친 것을 ‘우연의 일치’라고 설명했으나, 한 지문이 비슷한 시기 수능과 일타강사의 모의고사, EBS 교재까지 동시에 실리는 것을 우연으로 보기 힘들다는 지적이 나온다.
교육부는 수능 영어 23번 지문을 맞춘 일타강사 A씨가 현직 교사 4명과 문제를 거래한 사실을 확인해 이들을 청탁금지법 위반 혐의 등으로 경찰에 수사를 의뢰했다. 교육부 관계자는 전날 “사교육·카르텔 신고센터에서 현직 교사 4명이 해당 일타강사와 문항을 거래했다는 제보를 받았다”며 “해당 강사가 수능 영어 (23번) 의혹과 연관돼있어 이 사안을 추가로 경찰에 수사 의뢰했다”고 했다.
교육계에 따르면 일타강사와 문항을 거래한 현직 교사 4명은 수능과 모의평가 문제 출제에 참여하거나 EBS 교재를 집필한 경험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BS 교재는 수능 연계율이 50% 이상이다. 다만 이들은 영어 23번 지문 논란이 불거진 2023학년도 수능과 6·9월 모의평가 문제 출제나 검토위원으로는 참여하지 않았다고 한다.
교육부가 수능 출제와 관련해 경찰에 수사를 의뢰한 것은 이례적이다. 그동안 수능이나 모의평가가 끝나고 일타강사의 예상 문제와 비슷한 내용이 출제됐다는 논란은 기존에도 있었다. 수능과 모의평가는 한두 문제로 등급이 나눠질 수 있어 그만큼 적중률이 높은 것이 중요하다. 일타강사들은 출제 문제를 족집게처럼 맞춘다며 홍보하고 비싼 학원비나 교재비를 받으며 매출을 올려왔다.
교육부의 의뢰를 받은 경찰도 이 문제를 사교육 카르텔 수사의 일환으로 보고 직접 수사하기로 했다. 우종수 경찰청 국가수사본부장은 전날 간담회에서 “경찰청 중대범죄수사과에서 작년 7월 교육부로부터 수사 의뢰를 받아 일부 사실 관계를 확인·조사했다”며 “감사원에서도 같은 조사를 진행 중이라 이중 조사가 될 수 있어 감사원 조사를 먼저 지켜보고 수사를 진행할 계획”이라고 했다.
감사원도 교육부와 평가원이 영어 23번 논란을 알면서도 뒤늦게 조치한 이유에 대해 감사에 착수한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2022년 11월 치러진 2023학년도 수능 직후 영어 23번 지문이 일타강사의 문제와 동일하다는 논란이 제기됐을 땐 문제삼지 않다가, 8개월이 지난 뒤에야 경찰에 수사를 의뢰한 배경에 대해 들여다보는 것으로 전해진다.
이 같은 논란은 2023학년도 수능에서만 발생한 게 아니다. 2016년 6월 치러진 2017학년도 수능 모의평가를 앞두고 국어영역 ‘족집게’ ‘일타강사’로 이름을 날리던 B씨는 평소 친분이 있던 교사 C씨를 통해 시험지를 입수했다. C씨는 모의평가 검토위원이던 교사 D씨로부터 문제 형식과 내용, 주제를 전해들었다. B씨는 모의평가 하루 전 이런 내용을 자신이 운영하는 학원 수강생들에게 알려줬다.
B씨는 학원 수강생들에게 ‘모의평가에서 국어 영역 현대시와 고전시가, 현대소설 등에서 특정 작품이 출제된다’고 말했는데 실제 시험에서 해당 작품이 지문으로 출제됐다. 또 ‘중세국어에서 비(非) 문학 지문이 나온다’고 말한 내용대로 중세국어에서는 문법 영역 지문이 나왔다.
평가원은 의혹을 제보받고 경찰에 수사를 의뢰했고, B·C·D씨는 업무방해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1심에서 B씨는 징역 10개월, C씨는 징역 1년, D씨는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공정하게 운영돼야 할 모의평가를 향한 신뢰가 훼손됐다는 게 당시 1심 판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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