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중갈등은 왜 북한의 무력도발을 자극하는가[김상운의 빽투더퓨처]
미중 갈등이 격화되는 가운데 북한의 무력도발로 한반도에서 긴장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북한은 5일 서해 백령도, 연평도 부근 북방한계선(NLL) 북쪽 해상에 약 200발의 포탄을 쏜 데 이어 6일에도 연평도 북서쪽 해상에 60여 발을 발사했습니다. 앞서 김정은은 노동당 회의에서 “남조선 전 영토 평정을 위한 대사변을 준비하라”고 위협했죠.
역사적으로 미중관계는 남북관계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예컨대 미중관계가 원만할 때는 북한의 군사 모험주의가 중국에 의해 억제됐습니다. 반대로 미중의 상호 불신이 컸던 1950년대에는 북한이 남침을 감행했습니다. 왜 이런 현상이 벌어졌을까요.
이를 이해하려면 한국전쟁에서 약 4만 명을 잃은 미국이 20년도 안 돼 중국과 전격적으로 손잡은 배경부터 짚어야 합니다. 미중 데탕트 주역으로 최근 별세한 헨리 키신저(1923~2023)의 시각에서 한국전쟁의 원인을 분석한 13회에 이어 이번에는 당시 전쟁이 소모적인 제한전으로 흐른 배경과, 미중수교 과정을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그때 역사를 잘 들여다보면 현재의 극심한 미중갈등과 이에 따른 한반도의 영향에 대해 의미 있는 통찰을 얻을 수 있을 겁니다(키신저의 대표작 ‘Diplomacy(1994)’를 비롯한 국내외 문헌들을 참고했습니다.)
美 도덕주의 원칙이 제한전 수렁으로
1, 2차 대전과 같이 특정국들끼리 군사동맹을 맺어 대항하는 유럽식 세력균형을 혐오한 미국은 우드로 윌슨,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 등을 거치며 집단안보(collective security)를 중시합니다. 편을 갈라 싸우기보다는 무력 침략 등 국제법을 위반한 국가와 맞서기 위해 나머지 국가들이 힘을 합쳐 안보를 보장하겠다는 거였죠. 이는 한국전쟁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1950년 6월 25일 전쟁이 발발하자마자 미국은 즉각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를 소집하고 이틀 뒤 유엔의 대북 군사제재를 규정한 ‘안보리 결의안 제1511호’를 이끌어냅니다. 당시 거부권을 쥔 소련의 유엔대사가 안보리 회의에 불참한 덕분이었죠. 이 결의안에 따라 미국 등 21개 연합국이 동참하면서 한국전쟁은 국제전 성격을 띠게 됩니다. 공산주의 침략국에 맞서 자유진영의 집단안보를 보장하겠다는 원칙을 내세운 거죠.
명확한 국가이익보다는 도덕주의 외교 원칙에 따라 뛰어든 전쟁인 만큼 미국에게 한국전쟁의 목표는 모호했다는 게 키신저의 시각입니다. 특히 1950년 10월 19일 중국이 전격적으로 참전한 직후 미국은 전면적 승리에서 한발 물러나 확전을 경계하는 ‘제한전(limited war)’ 논리에 갇히게 됩니다. 2차대전에서 미국 등 연합국이 초기 수세에도 불구하고 나치의 무조건 항복과 완전 승리라는 명확한 목표를 추구한 것과 대비됩니다.
미국의 제한전 추구는 한국전쟁에서 소련의 능력과 의도를 과대평가한 영향이 컸습니다. 공산 진영이 한반도를 기점으로 세계적 차원의 총공세를 계획하고 있다고 오판한 거죠. 하지만 전후 소련의 실제 군사력은 미국보다 취약했기에 스탈린은 붉은 군대의 한반도 파병을 회피할 정도로 한국전에서 확전을 두려워했습니다(하지만 중부 및 동부유럽에서 영향력을 확대하려고 허세를 부렸죠: 13회 참고)
키신저는 미국의 전쟁 목표가 트루먼과 맥아더의 중간지점에서 절충됐다면 합리적이었을 거라고 봤습니다.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에 도취된 트루먼이 북중 접경지대인 압록강까지 맥아더가 진격할 수 있도록 허용한 게 패착이었다는 겁니다.
키신저는 평양 북쪽 청천강과 함흥만을 잇는 선에서 미군이 진격을 멈췄다면 중국의 개입을 억제하면서 남북한 인구의 90%를 흡수하는 성과를 얻었을 거라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이는 오랜 세월 백두산 등 청천강 이북 지역을 역사적 터전으로 삼아온 한국인들의 민족주의 시각으로는 받아들이기 힘든 대안일 겁니다. 최근 우크라이나 전쟁이 장기 소모전에 빠지자, 서방 주요국이 우크라이나에 동부지역 일부를 러시아에 양보하는 절충안을 제안한 것과 유사합니다. 키신저의 현실주의 외교에 대해 철저히 강대국 중심의 세력균형 시각이라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입니다.
중소갈등으로 촉발된 미중 화해
그런데 이때 수세에 몰린 미국에게 ‘기회의 창’이 열리기 시작합니다. 사회주의 대국 소련과 중국의 이데올로기 갈등이 마침내 국경분쟁으로 번지고 있었던 겁니다. 이에 따라 중국 입장에서 소련의 안보 위협이 미국을 능가하는 상황이 벌어지죠.
미국으로서는 ‘쐐기 전략(wedge strategy·경쟁국과 그 동맹국의 관계를 벌리기 위한 이간책)’을 쓸 수 있는 길이 열린 겁니다. 실제로 1972년 2월 미국 대통령 중 최초로 중국을 방문한 닉슨은 저우언라이를 만나 소련군의 중소 국경 배치 정보를 제공하며 “소련이 미국의 서유럽 동맹국들에 맞서 배치한 군대보다 더 많은 병력을 중소 국경에 배치했다”고 강조합니다.(1회 참고·https://www.donga.com/news/article/all/20230618/119820195/1)
사실 2차대전 무렵만 해도 스탈린의 반대를 무릅쓰고 장제스를 카이로회담에 당사자로 초청할 정도로 본래 미중관계는 매우 우호적이었습니다. 하지만 한국전쟁 종전 후 열린 1954년 제네바회의에서 덜레스 국무장관이 저우언라이 총리의 악수를 면전에서 거절할 정도로 양국 관계가 극도로 악화됐죠.
미국이 소련에 대한 봉쇄주의 시각의 연장선상에서 중국을 팽창주의와 공산주의 세계혁명에 골몰하는 국가라고 본 것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여기에 소련 전문가들은 미중 화해가 소련의 의구심을 증폭시켜 미소 관계를 악화시킬 거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키신저가 포진한 닉슨 행정부는 이런 시각을 거부하고 철저히 세력균형 시각에서 중국에 접근하기로 결정합니다. 중국을 끌어들이는 외교 카드가 소련의 공세를 누그러뜨리는 데 도움이 될 거라고 봤기 때문입니다. 이런 예상은 현실에서 적중합니다.
1971년 7월 키신저의 비밀 방중 전까지 소련은 1년 넘게 미소 정상회담을 일부러 지연시켰습니다. 회담 개최에 앞서 여러 조건을 내걸며 미국의 양보를 압박하기 위한 거였죠. 하지만 키신저가 중국을 방문한 지 한 달도 안 돼 소련은 입장을 바꿔 닉슨을 모스크바에 초대합니다. 미중 화해에 자극을 받고 미국에 유화적인 자세로 돌아선 겁니다.
미중 데탕트의 발단은 1969년 봄 시베리아 우수리강에서 시작됩니다. 당시 이곳의 소련-중국 국경지대에서 교전이 벌어져 사상자가 발생합니다. 당초 미국은 중국이 싸움을 걸었을 거라고 지레짐작했지만, 미소 접촉과정에서 새로운 사실을 접하게 되죠. 소련 당국이 당시 교전 상황을 상세히 알려주면서 중국과 전면전이 벌어질 경우 미국의 대응 방향을 물은 겁니다.
이에 미국 정보기관이 우수리강 일대를 샅샅이 훑으면서 교전 지역이 소련의 보급기지와 가깝고 중국 통신기지에서는 먼 곳임을 알아냅니다. 소련이 먼저 도발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증거였죠. 게다가 7000km에 이르는 중소 접경지대에 소련군 40여 개 사단이 무더기로 배치된 정황도 확인됩니다.
사회주의 양대 대국 간 전면전 가능성에 직면한 초유의 상황에서 닉슨은 미중 데탕트 국면으로 이어질 결정적 조치를 취합니다. 중국을 공격하면 미국이 개입할 수 있다는 의사를 소련에 전달한 겁니다. 미소 간 세력균형을 위해서는 아무리 공산국가라도 중국이 소련에 점령되는 걸 막아야한다고 본 거죠.
1969년 9월 5일 닉슨은 엘리엇 리처드슨 국무부 차관을 통해 “우리는 소련과 중국 간의 적개심을 우리에게 유리하게 활용할 생각이 없다. 두 공산주의 대국 간의 이념적 차이는 우리 관심사가 아니다. 하지만 이런 반복이 고조돼 국제평화와 안보를 심각하게 파괴하는 것에는 깊이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는 메시지를 소련에 보냅니다. 한국전쟁 종전 후 약 20년 동안 외교관계를 단절한 중국에 대해 지원 의사를 밝힌 겁니다. 이에 대해 키신저는 미국이 전후 봉쇄정책과 결별하고, 현실주의 세력균형 외교로 복귀한 거라고 평가합니다.
미중갈등으로 고삐 풀린 북한의 ‘군사 모험주의’
중국은 미중 데탕트를 계기로 대미(對美) 위협인식을 크게 완화할 수 있었습니다. 이에 따라 미국과 합의한 ‘한반도 현상 유지’를 깨는북한의 무력도발을 억제하고자 했죠. 예컨대 북한은 미중화해 국면을 맞아 1976년 판문점 도끼만행 사건을 일으켰지만, 중국의 지지를 얻는 데 실패합니다.
대미 위협인식을 둘러싼 북중의 견해 차이는 양국 사이에 긴장을 초래해 북한은 외교적 운신의 폭이 좁아집니다. 예를 들어 허담 북한 외상은 1973년 2월 방중해 미국과의 접촉 가능성을 타진해 달라고 저우언라이에게 요청했지만, 그의 반응은 미지근했죠. 북한과의 직접 대화에 부정적이던 미국 역시 허담의 요청에 응하지 않았습니다.
북한은 1974년 8월 키신저 집무실을 방문한 바실리 풍간 루마니아 대통령 특사를 통해 접촉 의사를 재차 전달했지만, 키신저는 “북미 대화의 성사 여부는 미국이 원하는지에 달렸다. 충분한 검토와 논의를 거쳐야 한다”며 부정적인 태도를 보였습니다. 미중 화해 이후 북미 직접 대화를 통해 새로운 국면을 조성하고자 한 북한의 시도가 양국 모두로부터 차단된 겁니다.
숙적 ‘미제’와 화해한 중국에 대해 북한 지도부는 강한 불만을 품었지만, 미중 데탕트는 중국과 소련 모두를 향하고 있었기에 북한은 중국에 정면으로 반기를 들 수 없었습니다. 중소갈등을 이용한 북한의 등거리 외교 공식이 먹히기가 어려워진 거죠.
반대로 미중갈등이 심화되면 대미 위협인식을 고리로 한 북한의 대중(對中) 외교정책은 힘을 받게 됩니다. 2018년 김정은과 트럼프의 싱가포르 정상회담처럼 북미 양자 대화는 중국의 고립감 혹은 조바심을 이끌어낼 수 있기 때문이죠.
이는 미중 데탕트 국면과는 반대로 중국이 북한의 무력도발을 억제할 유인이 사라진다는 뜻입니다. 실제로 북한은 중국의 한반도 비핵화 방침에도 불구하고 2006년 이후 여섯 차례나 핵실험을 벌였지만, 안정적인 북중관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미중갈등이 대미 위협인식을 고리로 북중관계를 밀착시키는 결과를 낳은 겁니다.
둘 중 무엇이 더 우월하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최근 점증하는 미중갈등의 근원에는 과거 소련에 대한 시각처럼 미국이 중국의 사회주의 독재체제에 품고 있는 혐오가 자리잡고 있다는 겁니다. 이는 미국의 도덕주의 외교 원칙과 맞닿아 있다는 점에서 중소갈등 같은 거대변수가 나타나지 않는 한 쉽사리 해소되기 어려운 이슈일 겁니다.
이것은 미중 데탕트로 억제됐던 북한의 ‘군사 모험주의’가 미중갈등과 더불어 확대될 가능성이 높아졌음을 의미합니다. 5, 6일 북한이 서해 북방한계선(NLL) 근처에서 감행한 포격 도발을 예의주시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참고 문헌]
-Henry Kissinger 〈Diplomacy〉 (1994, Simon & Schuster)
-Henry Kissinger, 김성훈 역 〈헨리 키신저의 외교〉 (2023, 김앤김북스)
-The National Security Archives 〈Nixon‘s Trip to China〉 (https://nsarchive2.gwu.edu/NSAEBB/NSAEBB106/#1)
-최명해 〈1960년대 북한의 대중국 동맹딜레마와 ‘계산된 모험주의’〉 (2008, 국제정치논총 제48집 3호)
-최명해 〈중국 북한 동맹관계-불편한 동거의 역사〉 (2009, 오름)
-김상운 〈미중관계와 북한 대중(對中) 정책의 상관성에 관한 연구〉 (2020, 북한대학원대)
“모든 해답은 역사 속에 있다.” 초 단위로 넘치는 온라인 뉴스 속에서 하나의 흐름을 잡기가 갈수록 어려워집니다. 역사를 깊이 들여다보면 연이은 뉴스들 사이에서 하나의 맥락이 보일 수 있습니다. 문화재, 학술 담당으로 역사 분야를 여러 해 취재한 기자가 역사적 사실들을 통해 뉴스를 분석하고, 미래에 대한 인사이트를 찾아보고자 합니다. |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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