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벌 원한다" 호소에도 '감형'…피해자도 모르는 '기습 공탁' 손본다

조준영 기자, 심재현 기자, 천현정 기자 2024. 1. 9. 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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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T리포트] 꼼수 면죄부 된 공탁금 (종합)
성폭행·음주사망도…판결 직전 돈내고 반성하는 척하면 99%가 감형

#2022년 12월 서울 청담동 스쿨존에서 음주운전 사고를 내 초등학생을 숨지게 한 40대 남성 A씨는 지난해 11월 항소심 선고를 열흘여 앞두고 법원에 1억5000만원을 기습 공탁(법원에 맡기는 합의금)했다. 피해 아동의 유족이 "오로지 엄벌을 원한다"고 밝혔지만 재판부는 A씨가 1심 선고 직전 공탁한 3억5000만원까지 총 5억원을 공탁한 사실을 고려했다며 징역 7년을 선고한 원심을 깨고 징역 5년으로 형량을 감형했다. 검찰의 2심 재판 구형은 징역 20년이었다.

#2022년 수사로 드러난 '자매 그루밍(길들이기) 성폭력 사건'에서도 피고인인 40대 목사 B씨가 피해 자매의 합의 거부 의사에도 불구하고 일방적으로 피해자 계좌에 2000만원을 보냈다가 되돌려받자 지난해 10월 1심 판결 직전 이 돈을 법원에 공탁하면서 논란이 됐다. B씨는 2019년부터 2022년 여름까지 20여차례에 걸쳐 저지른 성폭행 및 성추행에 대해 법원에만 반성문과 공탁금을 제출하고 피해 자매에게는 단 한마디의 사과도 하지 않았지만 재판부는 검찰 구형량(징역 20년)의 절반도 안 되는 징역 8년을 선고했다.

형사사건에서 피해자의 개인정보를 모르거나 피해자의 동의 없이도 법원에 합의금(공탁금)을 맡길 수 있는 형사특례 공탁제도가 시행 1년을 넘기면서 가해자의 감형 수단으로 악용되고 있다는 지적이 잇따른다. 당초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합의를 강요하는 등 2차 피해의 소지가 크다는 지적을 받아온 변제공탁의 문제를 개선하기 위해 도입됐지만 음주운전 사망사고나 성범죄 등에서 엄벌을 원하는 피해자의 의사를 반영하지 못한 채 가해자가 처벌 수위를 낮추기 위한 '꼼수'로 악용되고 있다는 얘기다.

7일 법원행정처에 따르면 형사공탁금 신청건수는 형사특례 공탁제도가 시행된 2022년 12월 1486건 이후 지난해 6월 2369건으로 정점을 찍은 뒤 매달 2000건 안팎을 기록했다. 지난해 9월까지 신청건수는 총 1만8964건, 액수로는 1151억원에 달한다. 같은 기간 피해자와 합의 등을 통해 신청된 형사변제 공탁은 총 2112건(422억원)로 10분의 1 수준에 그친다. 감형을 위해 피해자 동의 없이 일단 내고 보는 공탁금이 폭발적으로 늘었다고 유추할 수 있는 대목이다.

특히 지난해 10월까지 형사특례 공탁이 신청되고 1·2심 판결이 나온 사건 988건 가운데 변론이 끝나고 재판부가 판결을 선고하기 전 2주 이내에 '기습 공탁'한 사례가 558건(56.4%)에 달한다. 이 가운데 130건은 선고를 불과 사흘 앞두고 이뤄졌다. 선고 2주 이내에 이뤄진 공탁 558건 중 재판부가 유리한 정상으로 참작해 처벌을 감경한 사례는 448건(80.2%)에 이른다. 양형에 제한적으로 고려된 사례도 102건으로 집계된다. 피해자의 엄벌 의사를 반영해 공탁을 감형 요소로 받아들이지 않은 사건은 8건(1.4%)뿐이다. 사실상 법원에 돈만 맡기면 감형되는 사례가 99%에 달하는 셈이다.

공탁 신청이 폭증한 것과 달리 공탁금을 찾아간 비율은 대폭 줄었다. 지난해 9월까지 형사특례 공탁금 지급건수는 6828건(475억4905만원)으로 신청 대비 36%에 그쳤다. 피해자 3명 중 2명은 찾아가지 않았다는 얘기다. 반면 이 기간 형사변제 공탁은 2271건(304억3526억원)이 지급돼 지급률 106%를 기록했다.

신청건수 급증이나 신청시점·유형, 지급건수 등에서 특례 공탁 제도가 애초 의도가 다르게 진지한 반성이나 피해자와의 합의 없는 '기습 공탁', '꼼수 공탁'으로 악용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는 대목이다. 법원과 검찰이 제도 개선 검토에 착수한 가운데 국회에서도 관련 개정안이 발의됐다.

장다혜 한국형사정책연구위원은 "반성과 함께 공탁이 이뤄져야지 반성없이 양형에 유리하기 위해 공탁을 악용하면 안 된다"며 "피고인이 공탁을 했어도 밖에서는 범행을 부인하고 2차 가해를 하는 경우도 있는데 재판부가 피해자의 의견을 꼭 듣고 판단해야 한다"고 말했다.

'피해자 몸값은 이 정도' 판 깔아준 '감형의 기술'…뒷북해법 시동

법원과 검찰이 피해자 의사와 상관없이 피고인이 법원에 합의금을 맡길 수 있는 형사특례 공탁제도 개선 작업에 착수한 것은 처벌 감경을 노린 '기습·꼼수 공탁'의 부작용이 잇따르면서다. 대검찰청이 최근 이원석 검찰총장 지시로 '꼼수 공탁'에 엄정대응하도록 일선청에 하달한 데 이어 대법원 양형위원회는 8일 오후 3시 제129차 회의에서 형사공탁 관련 양형기준을 논의한다.

특례 공탁제도가 악용될 수 있다는 우려는 일찌감치 제도 도입 논의 과정에서도 수차례 제기됐다. 전주혜 국민의힘 의원은 2020년 11월 국회 법사위 법안소위에서 "피해자와의 합의나 피해자에 대한 사과 노력 없이 모든 사건에서 사건번호만 쓰는 식으로 공탁해서 취지가 변질될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이런 우려는 피해자에게 합의를 강요하는 등 2차 피해의 소지가 크다는 지적을 받아온 변제공탁의 문제를 우선 개선해야 한다는 이유로 진지하게 논의되지 못했다.

◇'인터넷에 공고' 피해자도 모르는 기습공탁 남발…사법 신뢰 훼손

법조계에서는 현행 공탁법에서 공탁의 시기나 횟수를 제한하지 않는 점을 가장 큰 문제로 지적한다. 가해자가 공탁을 하면 피해자에게 즉각적으로 공탁사실이 통지되거나 재판부가 피해자의 의견을 청취하는 절차도 명시적으로 보장되지 않았다. 법 초안에는 법원 공탁관이 직접 피해자에게 공탁을 통지하도록 했지만 논의 과정에서 인터넷에 공고하는 방식으로 수정됐다.

서울 청담동 음주운전 사망 사건에서처럼 피해자가 공탁에 대해 의견을 제출할 수 없는 선고 직전에 가해자가 기습 공탁을 하거나 1심에 이어 2심에서도 반복해 공탁해 형량을 거듭 줄이는 꼼수가 등장하게 된 이유다. 사실상 '꼼수 공탁'이 성행할 수 있는 판이 깔린 셈이다.

피해자의 의사를 고려하지 않은 채 형사공탁이 접수됐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법원에서 형을 감경하는 것을 두고 법조계에서는 돈으로 형량을 거래할 수 있다는 잘못된 인식을 초래할 수 있다는 지적이 잇따른다. 서울중앙지검 공판2부 소속 손정아(40·변호사시험 1회), 박가희(36·사법연수원 45기), 임동민(31·변시 8회) 검사는 최근 대검 논문집 형사법의 신동향 겨울호에 실린 '형사공탁의 운용현황 및 개선방안 연구' 논문에서 "'피고인이 피해자의 용서를 돈으로 살 수 있게 했다'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며 "결과적으로 피해자에게 합의를 강제하는 부작용으로 이어지거나 피고인이 생각하는 피해자의 몸값이 딱 이 정도라는 메시지와 함께 2차 가해를 초래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감형 선고 이후 피해자들의 불안감이 커지고 사법부에 대한 신뢰가 훼손될 수 있다는 조사 결과도 있다. 지난해 10월 한국여성변호사회가 피해자 국선변호인들을 상대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는 응답자의 82.6%가 '피해자들이 감형 및 집행유예에 대한 불안 반응을 보였다'고 밝혔다. 75.9%는 '피해자들이 법원과 가해자에 대한 분노 감정을 표출했다'고 응답했다.

◇피해자 목소리 반영해야…"법원 예규 손질" 의견도

법조계와 정치권에서는 근본적으로 기습 공탁을 막으려면 피해자의 의견이 반영되도록 제도를 개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크다. 김영일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전문위원은 "형사공탁에서 법원이 피해자의 의견을 청취하도록 법률에 명시하는 방안을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공탁 신청 기간이나 범죄 유형을 제한하자는 의견도 나온다. 국회에서는 지난해 9월 형사공탁의 경우 변론 종결 14일 전까지 가능하도록 개정하는 내용의 개정안이 설훈 더불어민주당 의원 주도로 발의됐다. 아동·청소년 대상 성범죄는 형사공탁을 정상참작 사유에서 제외하는 내용의 법안도 지난해 8월 발의됐다.

공탁이 양형기준상 감경요소에 포함되지만 재판부가 재량에 따라 판단할 수 있다는 점에서 해법은 법원의 의지에 달렸다는 지적도 나온다. 국회에서 법안 개정에 걸리는 시일을 감안하면 '변론 종결 후 들어온 공탁에 대해서는 추가 변론기일을 열거나 선고기일을 늦추는 등 피해자 의견진술을 보장할 수 있다'는 내용을 법원이 재판예규에 담는 것이 가장 빠른 해결책이라는 얘기다. 재판예규는 재판업무처리의 통일을 기하기 위해 정한 일종의 지침이다.

대법원은 다만 재판에 관한 사항을 예규에 담는 것은 무리라는 이유로 이 같은 의견에 부정적인 분위기로 알려진다. 하지만 이미 '정상자료로 공탁서가 제출된 경우의 유의사항'이란 이름의 재판예규에서는 법관이 공탁을 양형에 참작할 때 '공탁금 회수 제한 신고서'가 첨부됐는지 여부를 확인하도록 하고 있어 공탁 관련 재판 절차에 대한 사항을 예규에 담는 것이 문제되지 않는다는 반박도 있다..

법조계 관계자는 "기습공탁으로 피해자의 의사가 배제되는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법원이 재판예규를 바꾸는 게 가장 쉽고 빠른 방법"이라며 "양형에 공탁이 반영됐다는 것은 판사가 공탁사실을 인지했다는 의미인 만큼 공탁에 대해 피해자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살펴볼 수 있도록 관련 절차를 예규에 규정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꼼수공탁에 철퇴' 손꼽을 수준 그쳐…재판부 따라 형량 들쑥날쑥
/삽화=임종철 디자이너

감형을 목적으로 피해자의 동의 없이 법원에 합의금(공탁)을 맡기는 형사특례 공탁제도의 부작용을 두고 검찰이 적극 대응에 나서면서 법원도 공탁을 정상참작 사유로 반영하지 않은 사례가 일부 나온다. 다만 엄정해야 할 판결이 전적으로 재판부 재량에 따라 달라진다는 점에서 제도적 보완이 시급하다는 지적이다.

7일 대검찰청에 따르면 인천지검은 만취 상태로 음주단속을 피해 도주하다가 피해자를 들이받아 숨지게 한 피고인이 지난해 재판에서 변론 종결 후 선고 13일 전 3000만원을 공탁하자 피해자 유족들로부터 공탁금을 받을 의사가 없다는 입장을 확인해 재판부에 전달했다. 재판부는 지난해 11월 선고공판에서 유족들의 입장을 받아들여 '공탁을 양형사유로 고려하지 않았다'고 명시하고 징역 10년의 중형을 선고했다.

광주지검에서 수사한 음주·무면허 운전 사망사고에서는 보행자를 들이받아 숨지게 한 피고인이 1심에서 4000만원을 공탁해 징역 1년을 선고받자 담당검사가 항소심에서 피해자 유족들의 공탁금 수령 거절 의사를 재판부에 전달, 지난해 11월 항소심에서 징역 2년이 선고됐다.

서울중앙지검은 펜션에서 발생한 강제추행 사건의 공소유지를 맡아 피고인이 항소심 선고를 앞두고 2000만원을 공탁하자 '피고인이 사과하지도 않았고 일방적으로 공탁한 것이 불쾌하다'는 피해자 의사를 제출해 지난해 2월 항소심에서 1심과 같은 징역 10개월의 실형 선고를 받아냈다.

형사공탁 특례제도는 형사사건 재판을 받고 있는 피고인이 피해자의 인적사항이나 연락처를 모르는 경우에도 형사공탁이 가능하도록 허용하는 제도로 2022년 12월 시행됐다. 피고인이 불법적인 수단을 동원해 피해자의 인적사항을 알아내 합의를 종용하거나 협박하는 등의 2차 가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도입됐지만 일부 피고인이 변론 종결 후 기습적으로 공탁해 피해자 측이 이의를 제기할 수 없도록 하는 '꼼수 감형 시도'로 악용한다는 비판이 이어졌다.

검찰은 문제 해결을 위해 지난해 8월 형사특례 공탁이 신청될 경우 △선고연기 내지 변론재개 신청 △피해자 의사 재판부 제출 △공탁 경위, 금액, 피해 법익, 피해자 의사 등을 고려한 신중한 양형 판단 요구 등을 진행하라는 이원석 검찰총장의 지시를 일선청에 하달했다.

법조계에서는 검찰의 대응과 별도로 근본적인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크다. 재판부의 재량에 따라 판결이 오락가락하는 상황에서 국회의 법 개정이나 대법원의 양형기준 개정, 재판예규 수정 등을 통해 피해자의 목소리가 반영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다.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 따르면 형사특례 공탁제도가 2022년 12월 시행된 뒤 지난해 10월까지 공탁이 이뤄진 사건 중 1, 2심 판결이 나온 988건 가운데 피해자의 입장을 반영해 공탁을 감형 요소로 받아들이지 않은 사례는 8건에 그친다.

대검 검찰인권위원회도 지난해 12월 기습 공탁이 접수되면 피해자가 판결 선고 전에 의견을 진술할 기회를 보장받는 제도를 마련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대검 관계자는 "검찰은 대법원 양형위원회에 '공탁' 관련 양형인자를 적용할 때 피해자 의사를 고려하도록 의견을 개진하는 등 절차가 제도적으로 보장되도록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겠다"고 밝혔다.

조준영 기자 cho@mt.co.kr 심재현 기자 urme@mt.co.kr 천현정 기자 1000chyunj@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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