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ory] 가족‧친구 잃고 남겨진 ‘자살 사별자’들
● “거긴 행복하니?” 엄마의 독백
● “제가 조금 더 신경 썼다면…”
● OECD 자살률 1위 국가 오명
실제 같은 비행기 모형이 눈에 띄는 남자아이의 방과 분홍색으로 꾸며진 여자아이의 방, 그리고 여느 집에나 있을 법한 안방, 옷방, 거실과 부엌. 책상 위 연필은 당장이라도 수학 문제를 풀 것만 같았고, 완성되지 못한 비행기도 금방 누군가의 손에 의해 조립될 것만 같았다. 누가 보든, 평범한 4인 가족의 집처럼 보인다.
하지만 집 안의 공기는 무거웠고, 박영숙(52, 가명) 씨의 아들은 그곳에 없었다. 대신 그가 쓰던 물건과 가구들, 그리고 그를 그리워하는 가족들의 마음만이 오지 않는 주인을 기다리는 듯 그곳에 머물러 있다. 비행기 조종사를 꿈꾸던 고등학생 아들의 방은 2년째 과거에 멈춰 있을 뿐이다.
영숙 씨는 2년 전 아들을 잃은 자살 사별자다. 아들 A군은 수업 시간에 지갑을 들고 교실을 나간 채로 돌아오지 않았고 이틀 뒤 강가에서 발견됐다. 특목고에 다니던 A군의 유서에는 자신의 학업 성적과 미래를 비관하는 내용이 가득했다. 부모님과 친구들에게 미안하다는 내용도 물론 포함돼 있었다.
변한 건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아들을 떠나보내고 3개월간은 살 이유를 찾아내느라 발버둥 쳤어요."
영숙 씨가 말했다. 그는 심한 우울증과 사투를 벌여야 했다. 살아갈 이유는 없었고 죽을 이유만이 가득했다. 영숙 씨는 구체적인 자살 계획까지 세운 적이 있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한 사람의 자살은 그렇게 남은 이들에게 전염병처럼 전이되는 것이다. 다행히 그녀는 계획을 실행에 옮기진 않았으나, 지금도 먼저 떠나보낸 아들에 대한 죄책감과 후회가 그녀의 발목을 붙잡고 있다. 남은 딸을 위해 무거운 몸과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버텨내고 있을 뿐이다.
아들의 시간은 그곳에서 멈춰버렸지만, 남은 가족과 친구들의 시간은 붙잡을 새 없이 흘러갔다. 한 사람이 사라졌지만 마치 변한 건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영숙 씨와 A군의 아버지는 출근해야 했고, 여동생은 학교에 가야 했으며, 친구들은 A군이 그렇게나 끔찍해하던 닭장 같은 정독실에 모여 오후 11시까지 야간 자율학습을 해야만 했다. 지금은 대학생이 된 박지훈(20) 씨는 그 친구 중 한 명이다. 친구를 허망하게 떠나보낸 뒤 2년, 그는 애써 묻어뒀던 기억을 꺼내는 것을 힘겨워했지만 지난해 10월 흔쾌히 인터뷰에 응해줬다.
지훈 씨는 A군이 죽음을 결심하고 학교에서 사라지기 직전까지 그와 함께 있었다. 그는 여전히 친구의 이야기를 좀 더 진지하게 들어주고 위로해 주지 못했던 것을 후회하고 자책하고 있다.
"제가 조금만 더 신경을 써줬다면, 조금만 더 따뜻했다면, 한 번만 안아줬으면 지금쯤 제 곁에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 때문에 여전히 걔를 떠올리면 가슴이 아파요."
지훈 씨는 사건 당일, 친구의 장례식장에 두세 시간밖에 있지 못했다. 기숙사 통금 시간을 지켜야 했고, 시험 일주일 전이었기에 시험공부를 손에서 아예 놓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그는 애써 괜찮은 척하며 자신의 일상을 살아가야 했다. 친구의 죽음을 슬퍼하고 애도할 시간을 충분히 갖지 못했던 것이다. 지훈 씨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때 시험 성적도 엄청나게 떨어졌던 걸로 기억해요. 지금도 2년이 넘게 지났는데 아직도 A가 한 번씩 꿈에 나와요. 나와서 저를 원망해요. A라면 그러지 않을 거라는 걸 알지만…. 그럴 때마다 잠을 설치죠."
고통이 옅어지는 순간
생전에 크나큰 고통을 겪는 사람들은 죽음으로써 고통에서 벗어난다. 그리고 남은 고통은 주변인의 몫이다. 한국생명존중희망재단의 발표에 따르면, 가족의 죽음을 겪은 유족들의 자살률은 10만 명당 586명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우리나라 10만 명당 자살률의 25배에 달하는 수치다. 남은 사람들이 느끼는 고통을 짐작해 볼 수 있다.
누나를 잃은 뒤 정신과 의사가 된 이태훈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는 "왜, 누가 그렇게 만들었을까? 혹시 내가 원인일까? 하는 자책감, 원인에 대한 원망감 등은 자살 사별자들을 자살 충동을 동반하는 우울증 등의 정신 질환으로 이끌기도 한다"고 말했다.
스스로 생을 끝낸 주변인의 흔적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자신이 겪은 일을 꺼내면 이어지는 침묵과 자신을 가엽게 바라보는 시선을 두려워하며 슬픔을 속으로 삭인다. 자살로 오빠를 잃은 김나현(17) 씨는 "남은 가족들과의 유대, 묵묵히 이야기를 들어준 친구들 덕에 조금이나마 그때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결코 완전히 지워질 순 없는 고통이지만, 그저 가까운 사람이 옆에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고통이 옅어지는 순간도 있는 것이다.
육채림 고려대 미디어학부 2학년 cofla080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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