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사라졌지만 붓기운은 여전히 펄떡거린다

노형석 기자 2024. 1. 9. 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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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뿜는다.

흩뿌린다.

휘몰아친다.

두 망자들의 그림이 살아서 펄떡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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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고작가 송수남·황창배 ‘필묵변혁’ 전
1980~2000년대 초 한국화 이단아
서울 세종문화회관 미술관 1층 5전시실의 천장 높은 공간에 나란히 배치돼 기운을 발산하고 있는 황창배 작가와 송수남 작가의 대작들. 왼쪽 벽과 정면 벽의 왼편에 각기 다른 황 작가의 90년대 ‘무제’ 그림들이 내걸리거나 놓였다. 정면 벽 오른편에는 3폭의 큰 그림을 합쳐 가로길이만 6m 넘는 대작을 만든 송 작가의 ‘붓의 울림’(1998)이 놓였다.

내뿜는다. 흩뿌린다. 휘몰아친다.

두 망자들의 그림이 살아서 펄떡거린다. 질풍노도 같은 붓놀림이다. 시커먼 먹과 붉고 퍼런 안료들이 화면에 난사되면서 기운이 뭉쳤다가 흩어진다. 기운의 에너지들은 흘러내리는 선, 꽃과 황소의 형상으로 뭉쳤다가 사방으로 퍼져나간다. 23년 전에, 11년 전에 각각 세상을 떠난 두 대가들이 새해 벽두 전시장에서 붓질의 흔적들로 치열한 기 싸움을 한다. 1980~2000년대 초반 파격과 혁신으로 한국화 화단을 휘젓다가 돌연 세상을 떠났지만, 죽음도 막지 못하는, 시간을 넘나드는 대결을 벌이고 있다. 미술의 힘이란 정녕 이런 것이다.

한국화화단의 대표적인 이단아 혹은 혁신가로 기억되는 두 작고작가 황창배(1947~2001)와 송수남(1938~2011)의 2인전 ‘필묵변혁(筆墨變革)’이 지난달부터 열리고 있는 서울 세종문화회관 미술관에서 최고의 압권은 1층 5전시실의 천장 높은 공간이다. 이 홀 같은 전시장 벽에 나란히 배치돼 서로를 향해 기운을 발산하고 있는 두 대가의 다채로운 대작들은 새해 벽두의 한국 미술판에서 가장 박진감 넘치는 전시 현장을 연출하고 있다.

우선 4전시실에서 들어가자마자 맞닥뜨리게 되는 5전시실에서 두 대가들은 서로 마주 보며 대화를 하는 듯하면서도 제각기 다른 개성을 지닌 파격적 작품들로 대비되는 구도를 형성한다. 우선 왼쪽 벽과 정면 벽의 왼편에 각기 다른 황 작가의 90년대 ‘무제’ 그림들이 각각 내걸리거나 놓였는데, 정면 벽에 내걸린 황소의 형상을 언뜻 떠올리게 하는 97년작 ‘무제’가 단연 돋보인다.

연탄재와 호분 등의 여러 혼합재료들로 도톨도톨한 질감을 만들고 그 위에 아크릴 물감을 펴 바르면서 작가의 혈기 넘치는 추상 정신을 표출한 거작이다. 왼쪽 벽의 두 무제 작품은 꽃과 동물모양의 기하학적 도상들을 역시 아크릴 물감으로 그린 92년, 94년 작품으로 크기는 다소 작지만 양화의 아크릴 재료에 자연 정물을 추상화하는 조형의지를 풀어놓은 파격성이 도드라진다.

송수남 작가는 훨씬 규모가 크면서 일정한 조형적 질서와 흘리기와 긋기 등의 파격적 필법을 능란하게 활용한 대작들로 황 작가의 전위적 작품들을 받아친다. 면벽 오른편에는 3폭의 큰 그림을 합쳐 가로길이만 6m 넘는 대작을 만든 송 작가의 ‘붓의 울림’(1998)이 놓였고, 그 오른쪽 벽과 정면 벽을 마주 보는 벽에도 붉은 안료와 먹으로 그린 또 다른 90년대 연작 ‘붓의 울림’ 2점이 내걸렸다. 60~70년대 먹을 농축해 쌓고 서예의 획을 놀리는 필법을 더욱 분방하게 풀어낸 현대 산수화 운동의 내공을 농축한 작품들이다. 전시를 기획한 임연숙 큐레이터는 “두 분 다 세상을 떠났지만, 지금 막 작업을 끝낸 두 대가의 공동작업장에 들어가 보는 것 같은 분위기를 연출하려 했다”고 설명했다.

미술계에서는 흔히 송수남 작가를 수묵화의 내면적 의식세계에 초점을 둔 혁신가로, 황 작가는 종이와 붓, 먹을 일컫는 지필묵(紙筆墨)의 족쇄를 벗어나 아크릴, 유화, 누드 등 양화의 소재와 재료까지 섭렵하며 파격을 추구한 이단아로 일컫는다.

두 대가를 처음 대화하고 대치하는 듯한 구도로 설정한 이 전시는 작가의 말년작부터 도입부를 시작해 대작들의 기운생동이 맞장을 뜨는 5전시실의 고갱이 공간을 거쳐 70~80년대의 원형적 수묵작업들까지 거꾸로 내달리면서 살펴보는 얼개로 산뜻한 감흥을 안겨준다.

두 작고 대가의 크고 작은 수작들을 한자리에 모아놓고 어울리게 하면서 새로운 시각으로 이들의 화력을 보게 만드는 이 전시는 여전히 고루한 작화 필법의 틀 속에 정체된 한국화단의 작가와 관객들에게 호쾌한 울림을 던지고 있다. 14일까지.

글 ·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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