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기후위기·경제난에 ‘정신건강’ 글로벌 의제 급부상

신기섭 기자 2024. 1. 9. 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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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사회 ‘정신 건강’ 이슈 부각
러시아가 나치 독일군에 승리를 거둔 날을 기념하는 승전 기념일이었던 지난 2022년 5월9일 폴란드 바르샤바의 소련군 묘지에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전쟁 반대 시위를 벌이고 있다. 바르샤바/EPA 연합뉴스

전세계가 코로나19 대유행의 충격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가운데 지난해 전 인류가 유럽과 중동에서 진행 중인 ‘두개의 전쟁’, 기후변화, 물가 폭등 등의 충격을 겪으며, 정신 건강 문제가 새해의 주요 관심사로 떠오르고 있다. 전문가들은 정신 건강 문제가 유럽 같은 부유한 지역은 물론 아프리카 등의 개발도상국에서도 보건 문제를 넘어 개발과 성장에 걸림돌이 될 수 있다고 경고하고 있다.

세계경제포럼은 오는 15~19일 열릴 다보스포럼의 주요 의제 중 하나로 정신 건강 문제를 제기했다. 시암 비셴 세계경제포럼 건강·보건센터 대표와 알렉산드라 아가토프스카 폴란드 페제트우(PZU) 생명보험 최고경영자는 최근 이 단체 누리집을 통해 발표한 글에서 “전세계가 직면한 다양한 도전 가운데 노동력의 정신적 복지만큼 중요한 것도 많지 않다”고 지적했다. 이들은 “노동자들의 정신 건강 증진은 (기업 등의) 도덕적 의무를 넘어서는 문제가 되고 있다”며 “이는 생산성, 혁신, 경제적 번영 등 조직적 성공의 전략적 초석”이라고 강조했다.

두 사람은 정신 건강 위기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지역 중 하나로 유럽을 꼽았다. 유럽은 2020년 초부터 2년 동안에만 코로나19 대유행으로 170만명 이상이 숨지고 감염 확산을 막기 위한 봉쇄 조처를 장기간 이어갔다. 유럽이 이 충격에서 완전히 벗어나기도 전인 2022년 2월 말에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했다. 이 전쟁은 2년째 끝이 보이지 않는 소모전 양상으로 계속되며, 세계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전쟁 여파로 에너지 가격을 비롯한 물가까지 폭등하면서 유럽인들은 지난해 내내 생활비 위기에 시달렸다. 여기에 지중해 연안 지역을 중심으로 한 살인적 폭염과 가뭄까지 유럽 대륙을 덮쳤다.

보건·기후·경제·안보 위기로 악화

보건·기후·경제·안보 등 4대 위기가 몇년 동안 몰아치면서 유럽인들의 정신 건강은 그 어느 때보다 위태로워졌다. 지난해 10월 유럽연합(EU)이 발표한 ‘유로바로미터’ 조사에 따르면, 유럽연합 시민의 46%가 지난 1년 동안 우울감, 불안 등 정서적·정신적 문제를 겪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 조사는 27개 유럽연합 회원국 시민 2만6천여명을 대상으로 한 것이다.

이 조사에 따르면, 정신 건강 문제를 겪은 사람이 특히 많은 나라로는 리투아니아(69%), 몰타(67%), 아일랜드·키프로스(63%), 라트비아(61%) 등이 꼽혔다. 덴마크(34%), 네덜란드(35%), 벨기에(37%), 독일(40%)은 정신 건강 문제가 상대적으로 덜한 나라들이었다. 조사 보고서는 “응답자의 62%는 코로나19 대유행, 러시아의 침공 전쟁, 기후위기, 실업, 식료품과 에너지 가격 폭등을 정신 건강에 영향을 끼친 요소로 꼽았다”고 밝혔다.

정신 건강 문제가 날로 심각해지고 있지만, 많은 이들이 전문가의 도움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보고서는 “응답자의 86%는 정신 건강 증진을 육체적 건강 증진만큼이나 중요하게 여겼지만, 정신 건강 문제를 겪은 이들의 54%는 1년 동안 전문가의 도움을 받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본인 또는 가족이 정신 건강 문제를 겪은 이들의 67%는 전문가의 도움을 받지 못한 이유로, 진단이나 진찰을 받기까지 너무 오래 기다려야 하는 점을 꼽았다. 스페인과 독일의 경우 이 문제를 꼽은 응답자의 비율이 각각 87%와 81%에 달했다. 이와 함께, 전체 응답자의 35%는 진료 비용이 너무 비싸 전문가의 도움을 받기 어렵다고 답했다. 진료비 부담은 라트비아(56%), 몰타(54%), 이탈리아와 그리스(51%)에서 특히 크게 느꼈다. 훌륭한 의사나 정신 보건 전문가를 몰라서 도움을 받지 못했다는 이들도 전체의 30%에 달해, 의료 정보 부족 또한 무시할 수 없는 요인이었다.

심각한 노동력 손실로 이어져

정신 건강 문제는 나아가 심각한 노동력 손실로 이어지고 있다. 폴란드 페제트우 생명보험의 집계를 보면, 2022년 폴란드에서 정신·행동 장애 때문에 휴가를 신청한 건수는 130만건이었다. 이에 따른 총 노동력 손실은 2380만일이며, 이는 전체 노동력 손실의 10%였다. 정신 건강은 관절·근육 관련 질환(16.4%), 임신·출산 관련(15.7%), 호흡기 질환(14.2%), 부상·중독·외상(13.3%)과 함께 5대 휴가 신청 사유로 꼽혔다.

아가토프스카 페제트우 최고경영자 등은 “폴란드의 정신 건강 문제는 (동유럽) 지역의 불안정을 반영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폴란드는 러시아의 침공을 받은 우크라이나와 국경을 맞대고 있으며, 라트비아·리투아니아·에스토니아 등 발트해 3국과 함께 러시아가 제기하는 안보 위협에 가장 민감한 나라다.

정신 건강에 대한 폴란드인들의 우려와 관심도 아주 높은 것으로 조사됐다. 페제트우 의뢰로 실시된 여론조사에서는 응답자의 84%가 전반적인 복지에 가장 영향을 끼치는 요인으로 정신 건강을 꼽았다. 또 피고용자의 90%는 기업 내 정신 건강 관리 프로그램 도입을 희망했다. 아가토프스카 최고경영자 등은 “피고용자의 이런 바람과 달리, 조직 내에서 정신 건강 문제를 터놓고 보고할 수 있다는 이들은 18.5%에 불과했다”고 지적했다.

케냐 나이로비의 빈민가에 코로나19의 위험성을 알리는 벽화가 그려져 있다. 나이로비/AP 연합뉴스

아프리카, “침묵과 낙인의 베일”에 감춰져

정신 건강 문제는 아프리카에서도 ‘조용한 유행병’처럼 번지고 있다. 비정부기구 ‘탄자니아 건강 증진 지원’의 리처드 캄바랑궤 고문은 최근 개발 전문 매체 데벡스에 기고한 글에서 “아프리카에서 정신 건강 위기가 커지고 있지만 침묵과 낙인의 베일에 감춰져 제대로 조명받지 못한다”고 경고했다. 그는 아프리카의 경우 성인들보다 청소년들의 정신 건강 문제가 훨씬 큰 문제로 떠오르고 있다고 덧붙였다.

세계보건기구(WHO)의 2022년 자료를 보면, 아프리카의 한해 자살자는 인구 10만명당 11명으로 세계 평균(9명)보다 더 높다. 세계보건기구는 “자살률 세계 상위 10개국 가운데 6개 나라가 아프리카 국가”라며 “부분적으로는 정신 보건 문제를 겪는 인구가 1990년 5300만명에서 최근 1억1160만명까지 늘어난 탓”이라고 지적했다.

아프리카과학재단의 프로그램 책임자 모지스 알로보는 “2022년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코로나19 대유행 여파 등으로 자살이 급증하면서 레소토, 에스와티니, 짐바브웨, 모잠비크, 중앙아프리카공화국과 함께 자살률이 가장 높은 나라로 떠올랐다”고 전했다. 그는 “케냐, 나이지리아, 이집트 등에서도 우울증과 자살이 꾸준히 느는 등 정신 건강 위기가 아프리카 대륙을 조용히 괴롭히고 있다”고 평가했다.

아프리카인의 정신 건강 위기는 코로나19 대유행이나 에너지 위기 등 세계 공통의 문제 외에도 고질적인 식량 부족과 빈곤 등 때문에 더 심각해지고 있다. 캄바랑궤 고문은 “아프리카는 급격한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전통적인 지원 시스템이 무너졌다”며 “이 때문에 많은 개인들이 새로운 스트레스와 도전에 직면하는 등 정신 건강의 위기가 아주 복합적”이라고 진단했다. 그는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의 후천성면역결핍증후군(에이즈) 환자 중 우울증 비율이 비감염자보다 8배나 높은 24%에 달하는 것도 아프리카인의 정신 건강에 어려움을 더하는 요인으로 꼽았다.

비셴 세계경제포럼 건강·보건센터 대표와 아가토프스카 페제트우 최고경영자는 “우리는 (정신 건강 문제에 있어서) 중대한 시점을 맞고 있다”며 “배려의 문화, 정서적 지원 구조, 유연한 노동 정책, 신뢰의 정신 등을 정착시키는 전체론적 대응 전략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두 사람은 이를 위해서는 정부, 고용주, 비영리단체, 의료계의 긴밀한 협력 체제가 작동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아프리카 같은 개도국의 경우는 정부의 정신 보건 관련 투자 확대를 위한 국제적인 지원도 빼놓을 수 없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했다.

신기섭 선임기자 marish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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