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여덟 어른’이 비빌 언덕
[똑똑! 한국사회] 손자영ㅣ자립준비청년
최근 정책과 제도의 변화를 넘어 자립준비청년을 가까이에서 돕고자 하는 이들이 많아졌다. 자립준비청년의 사회적 지지 체계를 위한 멘토링 사업이 증가하는 게 대표적이다. 실제 지난 2023년에는 유독 어떻게 하면 좋은 멘토링 프로그램을 만들 수 있을지에 대한 질문과 함께 자립준비청년에게 어떤 어른들이 필요한지에 관한 인터뷰나 강의 요청이 많았다. 자립준비청년에 대한 관심과 지원이 경제적 측면을 넘어 그다음 단계를 이야기하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반갑기도 하다. 강연이나 인터뷰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느꼈던 점과 고민을 살펴본다.
일단 멘토링 필요성에는 충분히 공감한다. 멘토링을 통해 얻을 수 있는 타인의 지지, 미래에 대한 희망, 어려움을 해결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 같은 ‘마음의 힘’이 자립 과정에서 중요하다는 것을 당사자로서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변 멘토링 참여 당사자 중에는 멘토링 과정에서 상처받거나 마음의 문을 닫고 멘토에게 실망하는 경우도 많았다. 소통 방식에서 충분한 공감을 받지 못했다거나, 생각했던 멘토의 모습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열여덟 어른’(자립준비청년)에게 필요한 멘토는 어떤 사람일까. 과거 나에게 어떤 어른이 필요했는지 생각해보니 금방 답이 나왔다.
먼저, 오래 옆에 있어주는 사람이다. 현재 여러 기관에서 진행 중인 멘토링 프로그램을 보면, 한정된 기간 안에 정해진 횟수를 채워 만나는 형태가 많다. 그러다 보니 서로 알아갈 시간을 충분히 가지지 못한 채 멘토링이 종료되곤 한다. 이 경우 단순하게 어려움을 물어보는 단기적 관점, 관계의 멘토링에 머물게 될 가능성이 크다. 심리학자 그로스먼·로즈의 ‘시간의 시험: 청소년 멘토링 관계 지속 기간의 예측 변수 및 효과’ 연구에 따르면, 멘토링은 오래갈수록 긍정적인 결과물을 내놓고, 일찍 종료되는 멘토링은 오히려 해로울 수 있다고 한다. 우리에게는 잠깐 만나는 멘토가 아니라 지속해서 안부를 물어보고 대화할 수 있는 어른이 필요했다.
둘째, 들어주는 사람이다. 나에게 의미 있고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는 어른들은 나의 이야기를 한없이 들어주었던 분들이었다. 보육원에서 오랜 단체생활을 하는 동안 나 개인에 관해 이야기한 경험은 별로 없다. 그래서 누군가를 만나 내 이야기를 꺼내기까지 시간이 필요했고, 자주 망설였다. 그럼에도 그 어른들은 내가 망설이는 시간을 자신의 말로 채우지 않고 그저 내가 이야기를 시작하기까지 기다려줬다. 덕분에 조금씩 입을 열고 내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우리에게는 자신이 살아온 경험을 들려주려는 멘토가 아니라, 우리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공감해주는 어른이 필요했다.
셋째, 함께 성장하는 사람이다. 매번 멘토로부터 도움받고 감사함을 느껴야 하는 존재로만 머물게 되면, 어딘지 부담스럽고 빚을 지는 것 같아 발을 빼게 된다. 주는 처지와 받는 처지로 구분해 틀을 만들고, 멘토는 도움을 주면서 감사한 태도를 기대한다면 진심을 담은 관계 형성은 어려울 수 있다. 함께 성장해 간다는 동반자적인 태도가 소중한 이유다. 내가 좋아하게 된 어른에게 처음으로 밥을 사주었을 때의 기억을 잊을 수 없다. 그 순간 나는 도움만 받는 존재가 아니라 소중한 누군가에게 작은 것이라도 베풀 수 있는 존재가 되었다. 그 몽글몽글한 뿌듯함 덕분에 앞으로 더욱 잘 살아야지, 다짐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우리에게는 서로 바라보며 함께 걸어나갈 수 있는 어른이 필요했다.
언젠가 한 예능프로그램에서 본 방송인 이경규와 딸이 나눈 대화가 떠오른다. 결혼을 앞둔 딸에게 이경규는 “아빠는 네 언덕이야. 언제든지 비빌 수 있는 언덕.” 결혼 뒤에도 딸의 안식처가 돼주고픈 아빠의 진심이 담긴 말이었다.
자립준비청년들에게도 이런 비빌 언덕들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 쉴 곳을 오래 내어주는 언덕, 언제든지 이야기를 들어주는 언덕, 함께 오를 수 있는 언덕 말이다. 우리에게 어른은 거대한 산이 아니라 작고 따듯한 비빌 언덕이니까.
Copyright © 한겨레신문사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 [단독] ‘김건희 명품백’ 제공 목사 “대통령실에서 어떤 연락도 없었다”
- 전쟁·기후위기·경제난에 ‘정신건강’ 글로벌 의제 급부상
- ‘통계조작 의혹’ 문재인 정부 고위관료 2명 구속영장 기각
- 국가 소송 외부 자문 받겠다더니…‘국가송무자문위’ 2년간 딱 1번 열렸다
- 오늘 15㎝ 눈폭탄…이젠 ‘11온10한’, 삼한사온 어디 갔어
- ‘김건희 특검 거부권 행사’ 헌재로 가면 어떤 결정 나올까
- 히잡 안 썼다고 태형 74대…이란, 30대 여성에 야만적 대응
- 친미 vs 친중 ‘누가 웃을까’…국외 거주 대만인들 투표 귀국길
- 이준석 창당 전 정책부터 발표…공영방송 ‘낙하산 사장’ 차단
- 정부 “남북 적대행위 중지구역 더는 없다” 선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