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사기엔 ‘각자 알아서 해결’…건설사 PF 위기엔 ‘혈세’
‘세금 감면해 집 떠안아라’ 그쳐…LH 1만호 매입, 기존 대책 중복
2조~4조 추산 전세사기 선구제 지원 ‘외면’…PF엔 85조 ‘퍼주기’
“전세사기 피해자들의 2023년은 그야말로 전세지옥이었다. 특별법이 만들어졌지만 피해자 인정, 보증금 회수, 금융 지원 중 무엇 하나 제대로 이뤄진 것이 없다.”
이철빈 전세사기 피해자 전국대책위 공동위원장은 지난 4일 오전 국회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이같이 말했다. 이날 정부는 민간 건설업자들의 규제를 전방위적으로 풀고, 다주택자 규제를 완화하는 내용을 골자로 한 ‘2024년 경제정책방향’을 발표했다.
경제정책방향은 정부가 올 한 해 한국 경제를 어떻게 운용할 것인지에 대한 큰 틀의 방향과 주요 정책을 제시하는 내용이다. 50페이지 분량의 이날 발표문에는 ‘전세사기특별법’(특별법) 개정과 관련한 내용은 한 줄도 등장하지 않았다. 한 페이지 분량에 담은 ‘다세대·다가구 지원’ 정책만이 전세사기 피해 예방차원에서 담겼다. 반면 민간기업 살리기는 전방위적 지원책이 4페이지에 걸쳐 담겼다. 2022년 기준 전 국민 10명 중 4명가량이 임차인이다. 건설업 위기가 국가 경제에 미칠 파장 못지않게 왜곡된 전세제도가 미치는 영향은 막대한데 전세시장 문제는 정부의 관심사에서 뒤처져 있는 것으로 보인다.
박상우 국토교통부 장관은 지난해 후보자 시절 인사청문회에서 전세사기에 대해 “정책 영향도 있었음을 인정한다”며 정책 실패를 인정했다.
■ 정부 정책은 한마디로 ‘빚내서 버텨라’
정부는 올해 ‘임대차 리스크’를 관리하기 위해 다세대·다가구 지원 3종 세트를 추진하기로 했다. 먼저, 세입자가 자신이 전세나 월세로 살던 소형주택(60㎡ 이하·취득가액 수도권 3억원·지방 2억원 이하)을 매입할 때 취득세 최대 200만원을 깎아주기로 했다. 이 경우 추후 청약을 할 때 무주택자 지위도 유지시켜준다. 또 등록임대사업자들은 1인당 1가구까지 소형주택을 한국토지주택공사(LH)와 지방주택공사에 양도할 수 있게 만들고 LH와 지역주택공사는 구축 다세대·다가구 주택 1만호 이상을 매입해 공공임대주택을 늘린다.
전세사기 피해자들은 ‘3종 세트’를 보고 허탈한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가장 납득하기 힘든 정부 정책은 세입자에게 세금을 깎아 살고 있던 소형주택을 매입하도록 유도한 정책이다. 정부는 빌라 기피 현상으로 역전세난이 커지자, 임차인이 매입하도록 해 피해를 최소화시키겠다는 의도로 이 정책을 내놓은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지난해 서울 월간 다세대연립 매매거래량은 2년 전과 비교해 절반가량 떨어지며 매매가가 추락했고 역전세가 전국적으로 문제가 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정부 조치는 역전세로 보증금사고 피해가 우려되는 임차인에게 ‘빚내서 알아서 해결하라’는 시그널을 준 것으로도 볼 수 있다. 홍정훈 한국도시연구소 연구원은 “소형주택을 취득세 감면으로 임차인에게 넘기겠다는 건 역전세 위험을 고스란히 임차인에게 떠넘기는 방식”이라고 말했다. 설사 인위적으로 수요가 늘어 가격이 오른다고 해도 이는 일시적일 가능성이 높아 결국은 임차인들이 시한폭탄을 떠안게 될 수 있다는 것이다.
■ 기존 우선매수권도 작동 안 하는데…
LH가 다세대·다가구 주택 1만호 이상을 매입한다는 내용은 이미 전세사기 피해 주택을 대상으로 시행된 특별법의 LH 우선매수권과 중복된다. 특별법의 우선매수권은 피해자가 매수를 원치 않을 때 LH가 우선매수권을 넘겨받아 집을 사들인 뒤 피해자에게 임대해준다는 게 골자다. 하지만 이 법은 시행 반년이 지나도록 매입 사례가 한 건도 나오지 않고 있다. LH 관계자는 “지난해 8월 이후 우선매수권 신청을 꾸준히 받고 있지만 경공매 유예 기간이 남은 물량이 상당수 있어 실질적으로 실적은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피해자들은 LH의 우선매수권 대상 기준이 너무 높다고 말한다. 발코니 확장 등 불법 증축한 경우나 근생빌라, 반지하 주택 등은 모두 매입 대상에서 제외된다. 면적도 전용면적 14㎡~85㎡ 이하 주택으로 한정돼 소형 원룸에서 생긴 피해에 대해선 우선매수권으로 보호가 안 된다.
이 때문에 특별법 개정을 통해 우선매수권 대상을 확대하는 대신, 일반적인 공공임대 매입을 늘린다는 추가 정책을 내놓은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비판이 나온다. 우선매수권은 경매 절차를 통해 감정평가액보다 낮아진 낙찰가로 공공이 매수할 수 있는 반면, 경제정책방향에서 내놓은 일반적인 LH 주택 매입은 단순 감정평가액으로 사들이기 때문에 공적 자금이 투입되는 규모도 훨씬 커진다.
경실련은 이날 성명에서 “공공 우선매입은 단 한 건도 안 하면서 매입가격 현실화라며 비싼 가격에 다세대·다가구 주택을 매입하는 것은 가격 거품유지를 위한 의도임에 분명하다”고 지적했다.
■ 캠코 통한 피해자 지원 요구엔 콧방귀
전세사기 피해자들은 경제정책방향에 나온 부동산 프로젝트 파이낸싱(PF) 위기 사업장에 대한 정부 대처를 보고 상대적 박탈감을 호소했다. 정부는 4페이지 분량으로 민간 건설사 살리기, 부동산 프로젝트 파이낸싱(PF) 위기 사업장 관리 방안을 내놓았다.
위기 PF사업장 관리를 위해 정부는 지난해 9월 주택공급 활성화 방안에 담았던 85조원 수준의 유동성 공급 프로그램을 조속히 집행하고 사업성 있는 위기 PF사업장은 LH가 직접 매입하게 만든다고 밝혔다. 채권시장안정펀드로 돈을 넣고, 회사채를 사들이는 식의 전방위적 구제 대책에 85조원을 투입한다는 의미다. 민간기업들이 영리활동을 하면서 생긴 위기에는 정부가 매우 적극적으로 구제를 해주고 있다.
반면 전세사기 피해자에 대한 정부의 대응은 달랐다. 원희룡 전 국토부 장관은 “사인 간 계약에 따른 피해”라며 전세사기 피해자 구제에 대한 선을 그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정부는 ‘선 구제-후 회수’(선 구제 후 구상권 청구)로 전세사기 피해자를 지원하자는 특별법 개정 논의에 소극적인 입장이다. 야당과 피해자들은 기존의 특별법은 경매 권리관계 후순위 피해자의 보증금 손실은 보호하지 못한다면서, 선 구제 후 회수안을 요구하고 있다. 정부가 피해 보증금을 먼저 보전해주고, 추후 정부 또는 공공기관이 경매나 임대인에 대한 구상권 청구를 통해 피해액을 회수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전세사기 피해자인 하정희 전세사기 전국대책위 공동위원장은 “전세사기 피해자에 대한 선 구제 후 회수 관련 지원금은 2조~4조원가량으로 추산되는데 여기엔 묵묵부답이면서 85조원 투입은 정부가 적극적으로 결정했다”며 “민간기업이 잘못 투자한 결과야말로 사인 간 거래로 인한 손실인데 거기에는 선 지원을 하면서, 정책실패로 생긴 전세사기 피해자들을 외면하는 것은 힘 있는 사람만 정부가 대변해주겠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번 경제정책방향에 담긴 캠코를 통한 PF사업장 지원책도 피해자들의 공분을 샀다. 정부는 사업성이 떨어지는 위기 PF사업장은 2조2000억원 규모 ‘PF 정상화 펀드’를 통해 유동성을 지원하기로 했다. 한국자산관리공사(캠코)와 민간이 공동 출자한 ‘PF 정상화 펀드’ 내 PFV(프로젝트금융투자회사)가 부동산을 매입할 때는 세금을 감면하는 대책도 냈다.
앞서 피해자들은 전세사기 피해 선순위 저당채권을 캠코가 매입해서 후순위 임차인들이 강제퇴거를 당하거나 비인권적 추심을 당하지 않게끔 해달라고 정부에 요청했다. 캠코가 부실채권을 매입해 가지고 있으면 추후 주택가격이 오를 때, 후순위 피해자들에게 배당이 더 돌아갈 수도 있다. 정부는 여기에 대해서도 이렇다 할 입장을 내놓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최은영 한국도시연구소 소장은 “캠코를 통한 전세사기 피해자 지원은 꾸준히 시민사회가 요구했지만 꿈쩍도 하지 않다가 건설업계 문제에 대해선 적극적으로 캠코 출자 펀드를 운용한다는 점이 실망스럽다”고 말했다.
국토부는 지난 4일 전세사기피해지원위원회를 통해 688건을 전세사기피해자로 인정했다. 이에 따라 누적 피해자 인정건수는 1만944명에 달한다. 피해자로 결정되어도 실제 지원을 받는 실적은 미미하다. 긴급 경공매 유예 협조 요청을 받은 건은 757건이다.
윤지원 기자 yjw@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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