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주변 살피더니 임산부 배려석에 슬쩍 "임신한 사람 여기 없잖아"

임윤지 기자 2024. 1. 9. 0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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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넘은 임산부 배려석 정착 요원…공허한 저출산 대책 '단면'
"법제화는 오히려 갈등 초래…'핑크라이트' 같은 적극 행정 필요"
8일 오후 4시30분쯤 서울지하철 4호선 열차 임산부 배려석에 임산부가 아닌 시민들이 앉아있는 모습. 2024.1.8/뉴스1 ⓒ News1 임윤 기자

(서울=뉴스1) 임윤지 기자 = "임신한 사람 지금 여기 없잖아요"

8일 오후 4시30분 서울 지하철 4호선 혜화역 열차 안. 희끗한 머리에 모자를 푹 눌러쓴 노장년층 여성이 열차에 타 주변을 둘러보더니 슬쩍 임산부 배려석에 앉았다. 노약자석이 텅 비어있음에도 이 여성은 임산부 배려석으로 향했다. "임산부 배려석인데 앉으신 거냐"고 기자가 조심스레 묻자 이렇게 반박했다.

옆 칸으로 옮겨가봤지만 마찬가지였다. 임산부가 아님에도 배려석에 앉아 눈을 감고 있거나 짐을 올려두는 사람들도 볼 수 있었다. 등산복을 입은 중년 남성들도 임산부 배려석에 앉아 다리를 주무르기도 했다.

임산부 배려석은 임신과 출산을 장려하고 임산부 배려 문화를 확산하고자 지난 2013년 서울 지하철에 도입됐다. 하지만 도입 후 10년이 넘게 지났지만 임산부 배려석은 임산부들에겐 '그림의 떡'이다.

이는 통계로도 확인된다. 최근 인구보건복지협회가 임산부와 일반인 각각 1000명씩을 대상으로 진행한 '2023년 임산부 배려 인식 및 실천 수준 조사 결과'에서 임산부의 86.8%가 임산부 배려석을 이용해 본 적 있다고 답했다. 하지만 그중 42.2%는 '이용이 쉽지 않았다'고 호소했다.

임신 7개월차에 접어들었다는 신모씨(35)는 "임신 초기 당시 임산부 배지를 들고 열차에 탔는데 한 중년 남성이 임산부 배려석에서 잠자고 있어 차마 말을 못 걸었다"며 "퇴근길이라 열차 안에 사람도 많았는데 힘겹게 집에 왔던 기억이 난다"고 아쉬움을 드러냈다.

지난해 5월 출산한 이모씨(37)는 "임산부 배려석에 앉는 사람들 대부분 고개를 숙이고 있거나 휴대전화만 보고 있어 옆에 있던 사람이 비켜주곤 했다"며 "노산으로 힘겹게 아기를 가진 만큼 지하철을 탈 때마다 마음이 조마조마했다"고 말했다.

또 이씨는 "임신 초기 언제 한번은 임산부 배려석에 10대 학생들이 앉아 있어 어쩔 수 없이 서서 가고 있는데 누가 내 배를 실수로 친 적이 있다"며 "그때 이후로 무서워서 자가용이나 택시를 타고 출퇴근했다"고 말했다.

이같은 임산부들의 불편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과거에도 여러 차례 국민청원 게시판 등에 "임산부 배려석을 지정석으로 법제화해달라"는 청원이 올라온 바 있다.

여전히 서울에서는 하루 평균 20건 이상씩 민원이 들어오는 상황. 8일 서울교통공사에 따르면 임산부 배려석 관련 민원은 2020년 8733건(하루 평균 23.9건), 2021년 7434건(20.4건), 2022년 7334건(20.0건) 발생했다. 마찬가지로 지난해 7월까지 관련 민원은 4347건(20.5건)으로 집계됐다. 실제 민원 내용도 임산부 배려석 안내방송 송출 요청, 비임산부 이용 조치 요청 등 다양했다.

임산부의 날인 10일 오후 서울 지하철 7호선에서 한 시민이 임산부석에 앉아 있다.. 2017.10.10/뉴스1 ⓒ News1 임준현 인턴기자

임산부 배려석을 항상 비워둬야 하는지는 해묵은 논쟁거리다. 강제성이 없어도 비워둬야 한다는 의견과 굳이 그럴 필요까진 없다는 의견이 팽팽하다. 지난 2021년 한국리서치 조사에 따르면 '임산부 배려석을 항상 비워둬야 한다'는 응답은 51%로 겨우 절반을 넘었다.

실제로 이날 오후 혜화역 승강장에서 만난 박모씨(52)도 "임산부를 거의 본 적이 없을 만큼 출산율이 낮은데 반해 임산부 배려석의 비율이 높다고 생각한다"면서 "지하철에서도 '양보하세요'라고 방송하지 비워두라고 하지는 않는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전문가들은 임산부 배려석 확보 문제를 두고 강요보단 자율에 맡기면서도 지금보다 더 적극적인 행정 정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한다.

허민숙 국회입법조사처 조사관은 "심각한 저출산 문제를 겪는 한국 사회에서 임산부는 배려 대상"이라며 "하지만 비워두기를 법제화하는 것은 성별·세대 등 사회적 갈등을 유발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이어 "10년이 넘도록 임산부 배려석 좌석 확보가 여전히 힘든 상황이라면, 단순히 캠페인을 통한 시민들의 인식 개선에만 의존하는 걸로는 부족하다"며 "일부 지자체처럼 임산부가 근처에 오면 임산부 배려석 손잡이 부분에 핑크라이트가 켜지는 장치 등을 도입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라고 설명했다.

immune@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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