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예제 두루뭉술 답변...헤일리 이어 트럼프도 ‘남북전쟁’ 휘말렸다

김은중 기자 2024. 1. 9. 0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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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 성향 강한 남부 지지층 의식
노예제 언급 않고 두루뭉술 대답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6일 아이오와주 뉴턴 유세에서 연설을 하고 있다. /AFP 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6일 아이오와주(州) 선거 유세에서 남북전쟁(1861~1865)에 대해 “많은 실수가 있었고 협상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고 말해 구설에 올랐다. 또 다른 공화당 경선 후보인 니키 헤일리 전 유엔 대사가 남북전쟁의 원인을 묻는 질문에 노예제를 언급하지 않아 논란의 중심에 선 지 일주일 만이다. 11월 치러질 미 대선 레이스가 본격적으로 막을 올린 가운데 공화당 후보가 가는 유세 현장마다 ‘남북전쟁의 원인’에 대한 입장을 밝히라는 요구가 잇따르고 있다. 이를 묻는 ‘사상 검증’성 질문이 쏟아지자 이를 두루뭉술하게 넘어가려다 곤욕을 치르는 일이 반복되고 있다. 160여 년 전의 내전(內戰)은 어쩌다 21세기 대통령선거의 핵심 의제가 됐을까. 미 언론은 남북전쟁의 원인을 노예제로 보지 않는 것이 ‘진짜 보수’의 가늠자처럼 된 미 보수 사회의 민낯을 지목하고 있다.

트럼프는 이날 연설에서 남북전쟁과 관련 “너무 많은 사람이 죽었고 그것은 재앙이었다”, “만약 협상이 됐다면 에이브러햄 링컨이 누군지 당신은 모르겠지만 그것은 괜찮다”고 했다. 미국의 16대 대통령인 링컨은 1863년 노예해방선언으로 미 연방을 보존하고 반(反)노예 진영의 전쟁 승리를 이끌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협상이 필요했다”는 트럼프의 발언은 노예제 종식을 위해 전쟁까지 갈 필요는 없었다는 취지라고 미 언론들은 해석했다.

역사학계에선 “초등학교 수준의 허튼소리이자 무지한 발언”(데이비드 블라이트 예일대 교수)이라는 비판이 쏟아졌다. 공화당 경선 후보인 크리스 크리스티 전 뉴저지 주지사는 “일부 유권자의 심기를 거스르기가 두려워 진실을 말하기보다 그들에게 영합하는 것을 우선순위에 두고 있다”며 “이래서 푸틴 대통령, 시진핑 주석에게 맞설 수 있겠느냐”라고 했다. 크리스티가 언급한 ‘일부 유권자’는 트럼프 극렬 지지자인 이른바 ‘마가(MAGA)’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Make America Great Again)’의 영문 앞글자를 딴 ‘마가’는 트럼프의 2016년 대선 캠페인 구호였는데 최근엔 광적인 트럼프 지지자를 일컫는 말로 쓰인다.

그래픽=박상훈

남북전쟁은 1861년 북부를 중심으로 한 연방 정부(Union)와 11주로 구성된 남부 연맹(Confederacy) 사이에 벌어진 내전이다. 4년 동안 치열한 전투가 이어져 60만명이 넘게 희생됐고, 1865년 4월 남부 연맹이 항복하면서 전쟁이 끝났다. 미국이 건국된 1700년대 후반부터 노예제 기반 농업이 중심인 남부와 공업이 주력인 북부 간 갈등이 상당했는데 노예제 폐지에 대한 이견이 전쟁의 도화선이 됐다는 게 정설(定說)이다. 하지만 일부 친(親)남부·보수 역사학자들을 중심으로 전쟁의 원인을 ‘연방 정부의 주 정부 권리 간섭’ 등에서 찾는 ‘수정주의 시각’이 대두됐다.

수정주의 시각은 학계에선 논파(論破)됐다. 하지만 공화당 텃밭인 남부의 보수적 유권자 일부와 이른바 ‘마가’에겐 소구하는 측면이 있다. 민주당 지지자들이 이끄는 PC(political correctness·정치적 올바름)주의의 영향으로, 패장(敗將)인데도 탁월한 전략·인품으로 존경을 받아온 남부 연맹 로버트 리 장군이 인종차별 주의자로 몰리고 미 곳곳에서 동상이 철거당하는 상황 등과도 무관치 않다. 비슷한 맥락으로 2021년 미 국회의사당 점거 폭동, 2017년 버지니아 샬러츠빌 폭력 시위 때는 남부연합기가 등장해 여러 차례 논란이 됐다. 공화당 경선에서는 강경 보수의 표심이 중요한데 후보들로선 이런 정서를 무시하기 어렵다. 미 사회가 그동안 당연하게 받아들여온 남북전쟁의 원인인 ‘노예제’를 ‘노예제’라 부르지 못하는 상황에 봉착한 것이다.

니키 헤일리 전 유엔대사가 5일 아이오와주 디모인에서 유세 연설을 하고 있다다. /로이터 연합뉴스

또 다른 공화당 후보인 비벡 라마스와미도 3일 유세 현장에서 남북전쟁 발발 원인에 대한 질문을 받고 “남북이 관세 문제 등으로 일촉즉발인 상황이었는데 노예제라는 ‘성냥’이 불을 붙인 것”이라고 에둘러 답했다. 앞서 헤일리 후보는 “남북전쟁의 원인은 기본적으로 정부가 어떻게 운영되느냐의 문제였다고 생각한다”고 답해 노예제를 피해갔다. 폴리티코는 “복잡하게 답변하는 건 개인의 자유지만 노예제를 분명히 짚고 넘어갔어야 한다. 2023년에도 이래야 하는 게 믿을 수 없다”고 지적했다.

공화당 후보들이 남북전쟁을 둘러싼 문제로 수렁에 빠지자 민주당은 반색하는 분위기다. 노예제는 민주당의 주요 지지 기반이면서 최근 조 바이든 대통령에 대한 민심 이반이 심상치 않은 흑인 유권자들이 가장 민감해하는 문제이기도 하다. 바이든은 헤일리 전 대사 발언이 논란이 되자 자신의 X(옛 트위터) 계정에 영상을 공유하며 “원인은 노예제”란 글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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