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응준의 포스트잇] [19] 새로운 시작을 위한 사색

이응준 시인·소설가 2024. 1. 9. 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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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완 파이어볼러(fireballer)는 지옥에서라도 데려온다”라는 말이 야구에는 있다. 그만큼 왼손잡이 강속구 투수가 귀하고 파괴적이라는 뜻인데, 메이저리그 역사상 랜디 존슨(Randy Johnson)이 여기에 속하는 대표적인 선수였다. 2m 8cm의 키에서 뿌려지는 최고 구속 165㎞를 자랑했다. 메이저리그 통산 22시즌 618경기에 등판해 303승 156패 4857탈삼진 평균자책점 3.39, 사이영상 5회 수상, 1990년 6월 2일 노히트 노런, 2004년 5월 18일에는 40세의 나이로 퍼펙트 게임을 기록했다.

2001년 3월 25일 랜디 존슨의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와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의 시범 경기에서 기상천외한 일이 벌어진다. 랜디가 던진 공에 비둘기가 맞아 즉사한 것이다. 순간, 타자 캘빈 머리는 투수 랜디가 야구공이 아닌 ‘이상한 물질’을 던졌다고 착각했다. 타석 앞으로 날아든 비둘기가 ‘하얗게 폭발’하니 그럴 만도 했다. 주심은 해당 투구를 노카운트 처리했다. 타구가 아닌 투구에 새가 맞는 상황에 대한 규정이 없어서, 정식 시즌 경기가 아닌 게 천만다행이었다. 확률을 계산하니 190억분의 1이라고 한다.

‘문학의 시대’가 가버렸다는 생각(현실)에 작가로서 길을 잃었던 시기가 있었다. 그러다 ‘랜디와 비둘기 사건’을 사색(思索)하게 됐다. 190억분의 1의 확률이 저 비둘기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다. 새 한 마리가 죽으면 그 새에게는 전 우주가 사라진 것일 테니까. 유일한 자신에게 벌어진 일이니까. 인생은 대단하지 않고 또 대단할 필요도 없지만, 이미 저마다 태어날 때 해변의 모래 알갱이들보다 더 많은, 190억 개 이상의 우연들을 운명처럼 통과해 태어난 존재들이다.

내 존재의 영향력에 대한 우울과 절망을 나는 이렇게 극복했다. 문학이, 글이, 책이 세상을 바꾸지는 못할지 몰라도 세상을 바꾸는 한 사람을 불러내거나 일으켜 세울 수는 있다고. 그러니 다만 나는 나의 일을 멈추지 않다가 죽을 뿐이라고. 그건 뛰어난 인생이 아니라, ‘정상적인 인생’이라고. 단어 하나 문장 한 줄도 까다롭게 따져 쓰는 작가가 ‘성가신 외골수’로 취급받는 시대다. 하지만 정의로움을 자처하는 사람들 대신 나는 자신의 직업을 목숨처럼 여기는 이들만을 믿을 뿐이다.

직업정신과 직업윤리가 없는 자들의 민주주의 타령을 불신하면서부터 비로소 나는 ‘정치적 자유인’이 되었다. 구두 수선공도 다 같은 구두 수선공이 아니다. 그가 튼튼하게 고치고 빛나게 닦은 구두를 신은 누군가가 지금 세상을 그 구두처럼 변화시키고 있다. 죽음 앞에서 만인이 평등하듯 목숨에는 비수기나 유행이 없다. 인생에는 시범 경기도 노카운트도 없지만, 실패를 두려워하지는 말자. 랜디 존슨은 3시즌 연속 볼넷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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