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포자’ 많아 수능서 심화수학 뺀다니…한국 과학 미래 포기하나[전문가의 세계 - 이종필의 과학자의 발상법]
상위권 변별력 유지한 채 “학습부담 축소” 모순
명문대 이공계·의과 신입생들 학력미달 현상 심화
미적분은 인간이 자연 이해하는 ‘기본적인 언어’
AI시대 외치며 고등교육서 수학 축소가 타당한가
1990년에 대학에 입학한 나는 학력고사 세대이다. 이과계열은 수학Ⅱ와 두 가지 과학과목을 배워야 했다. 물리학과에 진학하려고 했던 나는 당연하게도 물리를 선택하고 싶었다. 그러나 과학 ‘선택’ 과목은 내가 ‘선택’할 수 없었다. 학교에서 미리 물리·지구과학 반과 화학·생물 반을 정해 놓고 임의추첨 형식으로 고3 이과반 학생들을 둘로 나누었다. 일부 학생들이 물리·화학을 선택하고 싶으니 별도의 반을 만들어달라고 요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우등반이 만들어져서 고3 전체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다는 이유에서였다. 불행하게도 나는 화학·생물 반에 배정되었다. 원하지 않는 과목을 힘들여 공부하는 게 쉽지는 않았다. 천만다행으로 시험 점수가 잘 나와 무난히 대학에 합격할 수 있었다. 만약 물리·지구과학 반에 배정되었을 때에도 좋은 점수를 받아 입시에 성공할 수 있었을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어쨌든 원하는 대학의 원하는 학과에 진학했으니 나를 잘 가르쳐준 학교와 선생님들께 감사한 일이었다.
그러나 대학교 1학년 생활은 쉽지 않았다. 물리를 선택하지 못했기 때문에 일반물리학 수업을 따라가기가 힘들었다. 교재가 영어인 데다 고등학교 때 구경도 하지 못했던 고급 수학기법들이 마구 등장해서 어렵기도 했지만, 기본적인 물리학의 개념들이 내게는 거의 없었기 때문에 아예 고등학교 수준에 해당하는 내용부터 대학 신입생 때 다시 공부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동기들은 내게 고등학교에서 이런 것도 안 배웠냐고 핀잔을 주기 일쑤였다. 그때마다 나는 만약 고3 때 물리·지구과학 반에 배정되었더라면 대학에 합격할 수 있었을까 하는 의미 없는 가정법을 되풀이했다.
그나마 수학Ⅱ를 제대로 배워둔 덕분에 힘겹게나마 조금씩 따라갈 수 있었다. 대학교 일반물리학에서 쓰는 수학은 기본적으로 벡터미적분이다. 고등학교 과정에 나오는 어지간한 곱셈과 나눗셈은 상당부분이 벡터를 이용한 적분과 미분으로 다시 정의되었다. 그래서 미적분학 과목은 이공계 대학생이라면 반드시 수강해야 한다. 벡터미적분은 말하자면 이공계 대학생들이 반드시 익혀야 하는 새로운 언어와도 같다. 이 분야는 지금도 어렵기로 소문난 학력고사 시절의 수학Ⅱ에서도 배우지 않았다. 수학Ⅱ에는 지금의 미적분Ⅱ, 기하, 행렬, 확률 및 통계 등이 모두 포함돼 있었다. 거꾸로 말해, 고등학교에서 수학Ⅱ를 제대로 배우지 않았다면 벡터미적분을 곧바로 배우기가 어렵고 따라서 대학 신입생으로서 학업을 시작하는 데에 큰 지장이 생겼을 것이다.
오랜 세월이 지나도 이는 사실이다. 10여년 전 일반인 독서동호회에서 나에게 일반상대성이론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아인슈타인의 중력장방정식을 가르쳐달라고 요청한 적이 있었다. 일반상대성이론은 중력의 본질을 시공간의 기하로 이해하는 현대화된 중력이론이다. 일반상대성이론을 기술하는 수학적 언어가 다름 아닌 ‘미분기하학’이다. 얼마 전 교육부가 2028학년도 대학입시제도 개편안에서 미적분Ⅱ와 기하가 포함된 심화수학을 수능 출제과목에서 제외한다고 발표했을 때, 내 머릿속에는 일반상대성이론이 떠올랐다. 시공간에서의 에너지 분포와 그에 따른 시공간의 기하를 연결하는 중력장방정식은 미분방정식이다. 방정식을 이해하는 것조차 쉽지 않아서 물리학과에서도 고학년이나 대학원 정도 가야 그 의미를 제대로 배울 수 있다. 방정식을 푸는 것은 더 어렵다. 나에게 중력장방정식을 가르쳐달라고 했던 독서동호회 분들은 대부분 직장인으로 고등학교 때 배웠던 미분과 적분을 거의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분들에게 고등학교 수학부터 가르치기로 했다. 미분과 적분, 특히 미적분Ⅱ에 해당하는 내용을 익히는 것이 주목적이었다.
이분들을 위해 적당한 교재를 찾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서점에서 어느 대학이 발간한 미적분학 교재들을 발견했다. 대학에서 만든 교재였으나 그 내용은 거의 대부분 고등학교 교과과정, 특히 고교 미적분 관련 부분을 중심으로 다루고 있었다. 왜 대학교에서 고등학교 과정의 미적분 교재를 만들었을까? 서문을 읽어보니 궁금증이 해결되었다.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다. 교과과정이 바뀌면서 초월함수의 미적분 등을 배우지 않고도 대학에 입학할 수 있게 되면서, 또는 신입생들의 수학 학력 저하로, 학생들이 대학 이공계 교과목을 배우는 데에 어려움을 겪고 있어 별도로 고등학교 과정의 수학을 다루는 교재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게 벌써 10여년 전의 일이다. 이후로 교육당국은 계속해서 수학과목의 출제범위를 줄이는 방향으로 내달렸으니 이와 같은 증세가 완화되기보다는 악화됐을 가능성이 높다. 작년 5월 일간지들이 보도한 내용이 눈에 들어온다. 당시 서울대학교가 국회에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서울대 이공계 및 의학계열 신입생 대상 수학성취도 시험에서 무려 41.8%가 정규수업을 들을 수 없을 정도의 학력미달 성적을 받았다고 한다(중앙일보, “서울대 이공계 신입생 10명 중 4명은 고교수학 다시 가르쳐야” 2023·5·29). 이런 경향은 최근에 심화되고 있으며 서울대만의 문제도 아니다. 여기서 한 가지 궁금증이 생긴다. 대학신입생의 수학 능력이 이전보다 떨어진 만큼 고3 수험생의 시험부담이 줄어들었을까? 아닌 것 같다. 수학을 포기했다는 이른바 ‘수포자’는 고등학교 수학 부담을 줄이는 정책을 시행한 뒤에도 꾸준하게 늘었다. 작년 11월에 있었던 2024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에서는 킬러문항을 없앤다고 했지만 수학 22번 문항은 정답률이 극히 낮은 초고난도 문항이었다. ‘킬러문항’이 사라진 자리에 ‘어쌔신문항’, 또는 ‘연쇄살인문항’이 등장한 셈이다. 이런 상황에서 과연 학생들의 수학수업 부담이 줄어들 수 있을까?
수학교육과정이나 수능안이 나올 때마다 항상 두 가지 가치가 대립해왔다. 고교에서 수학을 어려워하는 학생들의 부담을 줄여줘야 한다는 주장과 대학에서 전문과정을 따라갈 수 있는 능력을 갖춰야 한다는 주장이 계속 평행선을 달려왔다.
나는 이 두 가지 가치가 현실에서는 너무 허구적으로 대립하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언뜻 보기엔 두 가치가 양립 불가능한 것 같지만, 여기에는 가장 중요한 한 가지 문제가 빠져 있다. 바로 수능의 상위권 변별력이다. 사태의 핵심은 상위권 변별력 때문에 문제를 꼬아서 킬러문항을 자꾸 만들어낸다는 점이다. 즉 시험범위의 문제가 아니라 난도 깊이의 문제이다. 시험범위가 넓더라도 기본적인 내용을 제대로 익혔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수준에서 문제를 출제하면 학습부담이 크게 늘어나지 않는다. 반면 아무리 시험범위가 좁더라도, 이번 수학 22번 같은 ‘대량살상문항’이 자꾸 출제되면 수험생의 학습부담은 그만큼 더 커질 수밖에 없다. 고득점을 받고 싶은 학생이라면 킬러문항 전문학원에 다니고 싶은 유혹을 이기기 어렵다. 이는 결국 사교육 부담 증가로 이어진다. 상위권 변별력을 그대로 유지한 채 학습부담을 줄이겠다고 학습범위를 축소하는 것은 말하자면 암세포는 그대로 두고 주변의 정상세포만 자꾸 죽이는 것과 다를 바 없다. 특히 인공지능과 빅데이터 시대가 본격적으로 도래하면서 무엇보다 수학의 중요성이 분야를 막론하고 커지고 있는 상황이다. 초등학교에서부터 코딩교육을 실시하는 것보다 기본적인 수학부터 착실하게 가르치는 게 훨씬 더 중요하다. 기술적인 코딩은 이제 인공지능에 맡겨도 되는 시대이다.
물리학자로서 한마디 보태자면, 미적분은 인간이 자연을 이해하는 가장 기본적인 언어라 할 수 있다. 근대과학을 확립한 뉴턴이 미적분을 개발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물리학에서 자연의 질서는 많은 경우 미분방정식의 형태로 표현된다. 뉴턴의 운동방정식, 전자기 현상을 기술하는 맥스웰 방정식, 양자역학을 대표하는 슈뢰딩거 방정식, 유체의 운동을 기술하는 나비에-스토크스 방정식, 그리고 아인슈타인의 중력장방정식도 그렇다. 현상을 구성하는 요소들의 미세한 변화가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를 수학으로 표현하면 대체로 미분방정식의 형태가 된다. 이들 방정식을 풀기 위해 우리는 미세한 변화들이 쌓여 추후에 어떤 결과로 귀결되는지를 추적해야 한다. 이 과정이 적분이다. 그렇게 방정식을 푼 결과를 토대로 우리는 현상을 분석하고 미래를 예측한다. 그러니까 미적분은 호모 사피엔스가 자연을 이해하고 분석하는 가장 기본적인 수단이다. 미적분을 이해하면 세상이 달라 보인다. 물론 수능에서 상위권 변별력이 필요한 이유도 있을 것이다. 이 문제는 대학서열화 내지는 대학의 존재이유와 역할, 대학입시 자체와 심지어 대학개혁의 이슈까지 심각하게 연결될 수 있다. 그래서 쉽지 않다. 그러나 쉽지 않다고 해서 본질적인 문제를 모른 체하고 다른 중요한 가치들을 손쉽게 훼손하는 방식은 옳지 않다.
또한 모든 사안을 오로지 수능 입시라는 관점으로만 바라보는 것도 당연히 문제이다. ‘고등학교 수업이 오직 대학에서 수업을 따라가기 위한 수단에 불과한가’라는 항변도 깊이 새겨들어야 할 주장이다. 그러나 한 나라에서 국가단위의 시험에 어떤 내용을 포함시킬 것인가 하는 것은 그런 내용을 국가가 얼마나 심각하고 중요하게 여기고 있는지에 대한 기본적인 태도의 문제이다. ‘대학수학능력시험’이라는 이름 그대로 대학에서의 고등교육을 정상적으로 이수하기 위해 우리는 최소한으로 이 정도 능력을 요구한다는 사회적 합의이다. 그 합의는 우리가 미래사회를 어떻게 예측하고 대비할 것인가에 대한 합의이기도 하다. 본격적인 인공지능 시대를 준비한다며 초등학생들에게까지 코딩교육을 실시하는 마당에 고등교육을 위한 국가차원의 시험에서 수학의 범위를 줄이는 것이 과연 일관적이고 타당한가, 하는 근본적인 고민부터 해야 하지 않을까? 그런 방향 속에서도 얼마든지 학생들의 부담을 줄일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할 수 있다. 이들 가치에 비하면 그놈의 상위권 변별력이라는 현실적인 문제는 오히려 하찮게 보일 지경이다.
■이종필 교수
1971년 부산에서 태어났다. 1990년 서울대 물리학과에 입학했으며 2001년 입자물리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연세대·고등과학원 등에서 연구원으로, 고려대에서 연구교수로 재직했다. 2016년부터 건국대 상허교양대학에서 조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 <신의 입자를 찾아서> <대통령을 위한 과학 에세이> <물리학 클래식> <이종필 교수의 인터스텔라> <빛의 속도로 이해하는 상대성이론> 등이 있고, <최종이론의 꿈> <블랙홀 전쟁> <물리의 정석> <스티븐 호킹의 블랙홀> 등을 우리글로 옮겼다.
이종필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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