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웨이퍼·스마트폰·컴퓨터 쌓인 여긴…고물상 아닌 ‘금광’[도시광산]

이재덕 기자 2024. 1. 8. 2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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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삼성전자가 작은 제련소에서 금 가져오는 까닭은
지난달 19일 경기 평택시 도시광산업체 NH리사이텍에서 한 직원이 폐가전제품에서 뽑아낸 황토색 금이 든 가루에 열을 가해 순도 99.999% 금으로 만들어내고 있다. 이 업체는 금괴로 만들어 팔거나, 산업용 소재로 가공해 대기업에 공급한다.
‘도시광산업’ NH리사이텍 공장선
폐웨이퍼·회로기판 등 사들인 후
숙련된 기술자 손 거쳐 금·은 분리
불순물까지 제거 후 완성된 ‘순금’
거래소에 팔거나 대기업 공급도

지난달 19일 경기 평택시 도시광산업체 ‘NH리사이텍컴퍼니’. 한 곳에 12인치 반도체 웨이퍼 90여장이 쌓여 있었다. 반도체 회사에서 테스트용으로 사용한 웨이퍼다. 웨이퍼 위에 반도체를 만들 때 다양한 금속이 들어가는데 NH리사이텍은 여기에서 금과 은을 빼낸다.

웨이퍼 표면은 열기가 남아 있었다. 나윤호 NH리사이텍 전무는 “고온의 물에 박리제를 풀어 웨이퍼에 있는 금을 뽑아낸다”며 “온도와 약품 농도를 제대로 맞추지 않으면 녹아 나온 금이 다시 웨이퍼에 붙기 때문에 실력 있는 기술자만 공정에 투입된다”고 말했다.

“다들 10년 이상 경력자예요. 물건만 보면 금이 몇 그램(g)인지, 어떻게 벗겨낼지 딱 알죠.”

이곳에 쌓여 있는 반도체 웨이퍼 더미에서 약 500g의 금이 나온다고 했다. 금 1g당 8만7000원, 총 4350만원어치다. 메모리를 주로 다루는 업체의 웨이퍼에서는 금이, 비메모리를 다루는 업체의 웨이퍼에서는 은이 많이 나온단다. 금과 은을 회수한 테스트용 웨이퍼는 해당 회사에 반납한다.

테스트용으로 쓰인 실리콘웨이퍼에서 금과 은을 뽑아낸 뒤 반도체 공장에 반납하기 위해 쌓아놓은 모습(위 사진). 폐가전제품 등에서 분리한 PCB에는 금·은 외에도 갈륨 등이 있다(가운데). 자동차 다운파이프(촉매변환기)와 같은 차량 부품에도 팔라듐 등 희소금속이 있다.

웨이퍼만이 아니다. 이곳에는 폐스마트폰, 폐컴퓨터, 폐가전 등이 잔뜩 쌓여 있었다. 모두 입찰을 통해 기업으로부터 사들인 것들이다. 여기에서 인쇄회로기판(PCB)을 분리한 뒤 박리제를 사용해 금과 은을 벗겨낸다.

때론 반도체 패키징(포장 등 후공정) 공장에서 불합격 판정을 받은 칩이 다이싱 테이프(완성된 칩을 잘라낼 때 칩의 비산을 방지하기 위해 사용하는 테이프)에 붙은 채 몇 톤(t)씩 들어오기도 한다. 금으로 된 골드와이어까지 포함된 값나가는 제품이다.

반도체를 만드는 기업에 칩 정보는 기밀이기에 해당 기업이 금 회수 전체 과정을 참관한다. “그걸 우리 직원들이 다 달려들어 일일이 손으로 떼어내요. 칩 분리부터 금 회수까지 일주일 정도 걸리죠.”

이외에도 도금업체에서 사온 폐액, 전자회사에서 사들인 귀금속 스크랩(부스러기) 등에서도 금과 은을 뽑아낸다. 화합물에서 귀금속을 추출하는 건 비용이 많이 들지만, 스크랩에서 분리하는 건 저렴한 편이다.

금의 경우, 박리 과정을 거치면 부산물을 질산과 염산을 섞은 왕수에 용해한다. 이어 요소(암모니아)를 추가하면 황토색 금가루가 생성된다. 나 전무가 사기그릇에 담긴 금가루를 보여줬는데, 금보다는 누런 흙에 더 가까워 보였다.

이어 직원이 금가루가 담긴 사기그릇에 1000도가 넘는 불꽃을 대며 가열하자 불순물이 연소되면서 순도 높은 금 용액만 남았다. ‘파이브 나인’이라고 불리는 99.999% 순금이다. 이걸 금괴 틀에 넣어 굳히면 금괴가 만들어진다.

이 업체는 제품의 상당량을 금괴로 만들어 금거래소에 팔지만, 일부는 산업계에서 쓰는 골드와이어로 가공해 대기업에 공급하기도 한다.

삼성 등 원재료 일부 재활용 충당
‘분쟁광물’ 이슈 덜고 공급처 다변

대기업은 금 공급처를 구하는 일에 신중하다. 금은 탄탈룸, 텅스텐, 주석과 함께 아프리카 콩고민주공화국(DRC) 등 분쟁지역에서 나는 대표적인 분쟁 광물에 속한다. 광물 채취 과정에서 인권 유린이 자행되고, 광물 수익은 해당 지역 군부 등에 흘러간다. 이에 미국의 도드-프랭크법은 미국 증시에 상장한 기업과 이들의 거래 기업이 분쟁 광물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제한한다. 삼성전자·LG디스플레이 등 대기업들도 매년 분쟁 광물 관리 보고서를 작성해 자신들이 사용한 광물이 분쟁과는 상관없다는 것을 증명해야 한다.

도시광산 같은 재자원화 사업은 이런 분쟁 광물 이슈에서 자유로울 뿐 아니라, 일부 국가에 편중된 공급 의존도도 낮출 수 있다.

실제로 삼성전자는 자사 제품에 들어가는 금 원재료를 구할 때 일부를 재활용 금으로 충당한다. 국내에서는 NH리사이텍, LS MnM, 성일하이메탈 등으로부터, 해외에서는 벨기에 유미코어, 일본 도와 등에서 가져온다. NH리사이텍은 미국의 인증업체로부터 자사의 금이 분쟁 광물이 아니란 사실을 인증받았다.

나 전무는 “미국에서 세 명이 와서 나흘간 공장을 시찰하고, 매입 영수증·장부 다 대조해가며 검토하는데, 그 이후에도 1년 이상을 지켜본 뒤에야 겨우 ‘오케이’를 해줬다”면서 혀를 내둘렀다.

이 업체는 가솔린차·디젤차 등 내연기관차 부품에서 희소 귀금속도 뽑아낸다. 내연기관차에는 배기가스를 정화하는 촉매변환기가 붙어 있는데 여기에 촉매로 팔라듐이 쓰인다. 팔라듐은 40% 이상이 러시아에서 생산되다 보니 2022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터지면서 가격이 크게 뛰었다. 당시만 해도 g당 10만원 수준으로 금(당시 g당 7만원)보다 비쌌다. 하지만 이젠 g당 4만~5만원 수준으로 하락했다. 향후 전기차가 보급되면 팔라듐 수요가 줄어들 것이라는 전망에 선물 가격이 내려가고 있기 때문이다.

반도체 웨이퍼·PCB·자동차 부품 등에서 귀금속을 뽑아내지만 사실 회수하지 못하는 금속이 더 많다. 예를 들어 스마트폰의 경우 PCB에 금·은 외에도 갈륨과 탄탈룸이, 터치스크린에 인듐이, 디스플레이에 터븀·유로퓸·디스프로슘 등이, 진동모터에는 네오디뮴과 터븀 등이 소량 포함됐다. 모두 자원 안보를 위해 정부가 비축 대상으로 지정한 광물이다.

국내 재자원화 시장 규모 25조원
금속자원 수요의 약 25% 대체 중
대부분 철·범용비철·귀금속 편중
희소금속 회수율은 1% 채 안 돼

산업통상자원부에 따르면, 국내 금속 재자원화 산업 시장 규모는 2019년 기준 25조3000억원 수준으로, 국내 금속자원 수요(약 100조원)의 약 25%를 대체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재활용 대상이 주로 철, 범용비철, 귀금속 등으로, 희소금속 회수율은 1%가 채 안 된다. 회수 기술이 없거나, 기술이 있더라도 비용이 너무 커서 포기한 금속들이다.

현장에서 보는 도시광산업 전망은 어떨까. 나 전무가 “경기 변화에 상당한 영향을 받는다”며 이렇게 말했다. “저희 업은 기업에서 제품을 많이 만들어서 불량이 많이 나오든지, 기리빠시(잘리고 남은 부분)가 많이 나오든지 해야 잘되거든요. 근데 지금은 그렇지 않아요. 코로나19 이후 전자업계 경기가 안 좋아지면서 다들 20%씩은 매출이 빠졌어요.”

글·사진 이재덕 기자 duk@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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