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읽기] 피해자가 속한 공동체의 의무
해가 바뀌고 새로운 날들이 시작되는 1월이다. 사람들은 신년 달력을 구매하며 목표와 계획을 세운다. 하지만 올해 1월은 이상하게도 들뜨기보다는 가라앉는다. 새해 벽두부터 쏟아진 뉴스들마저 온통 부정적인 것들이라, 갈수록 세상이 더 나빠질 거라는 막연한 예감이 새해에 대한 기대감을 앗아가 버린 탓이다.
기대를 걸고 희망을 가져볼 만한 소식들은 드문데 세상은 거꾸로 퇴행하는 요즘이다. 비단 윤석열 정권의 문제만이 아니다. 사람들 사이에 예의가 사라지고 더 약한 이를 향한 혐오는 더 거세져 간다. 사람들은 점점 서로를 믿지 못하고 돕지 않는다. 사회는 무너져가는데 기후위기와 전쟁을 알리는 소식들은 미래마저 비관하게 만든다. 정치마저 제 역할을 손에 놓은 지 오래다. 앞으로 어디로 가야 할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지 누구도 알지 못한다. 길을 잃은 시대다.
그러나 새해 벽두부터 힘 빠지는 얘기만 할 수는 없겠다. 나는 희망이 필요할 때면 미래가 아니라 과거를 본다. 식민지, 전쟁, 냉전, 독재, 신자유주의, 한국사회가 숨 가쁘게 달려온 과거는 결코 만만치 않았다. 그럼에도 그런 어려운 과거를 잘 통과해, 여전히 문제가 많지만 좀 더 나은 사회를 만들어 왔다. 그 성과는 ‘민주주의’라는 단어에 아로새겨져 있다.
민주주의가 뭐냐고 묻는다면 보통은 선거라고 답할 것이다. 그러나 선거는 제도적 결과일 뿐 원인은 아니다. 애초에 권력에 의한 국가폭력에 고통받는 피해자와 이웃의 고통을 모른 척할 수 없던 시민들이 있었다. 사람을 때리고 죽이는 권력에 ‘어떻게 그럴 수 있냐’며 대항했고, 부정의한 권력을 정당화하는 제도를 바꿔 정의로운 공동체를 만들기를 열망했다. 당시 민주주의는 억울하게 고통받는 사람 곁에 선 평범한 시민들의 마음을 대변하는 단어였다.
민주주의란 단어가 과거와 같은 힘을 갖지 않은 지금도, 그 마음은 오래 지속된다. 지난 11월23일 서울고등법원 2심 재판부는 2016년 12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이 일본군을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청구 2차 소송에서 일본국의 손해배상 책임이 있다고 판결하였다. 2021년 4월 1심 재판부는 국가면제 원칙에 근거해 손해배상청구 각하 판결을 내렸으나, 이를 뒤집고 2심 재판부는 일본국의 불법행위에 의한 손해배상청구권이 성립된다고 결론 내린 것이다. 일본 외무상이 당일 성명을 내 반발했지만, 사실상 소송을 무시하는 것으로 대응해 온 일본 정부는 재판 결과에 상고하지 않음으로써 12월9일 재판 결과가 확정되었다.
1심과 2심 모두 핵심 쟁점은 ‘국가면제’의 적용 여부였다. 국가면제란 국제 관습법상 주권을 가진 국가들은 서로 대등하며 독립적이기에 주권국가를 다른 주권국가의 법정에 세울 수 없다는 내용의 법리이다. 19세기에 성립된 국가면제 개념은 국제질서란 곧 국가 간의 관계이며 국가만을 국제질서의 행위자로 보는 사고를 전제하고 있다. 하지만 외국국가에 의해 인권을 침해당한 세계 각지의 피해자들은 법정투쟁을 통해 그런 개념에 도전해 왔다. 이번 2심 판결 역시 이런 국제법의 변화 흐름 속에서 인권을 침해당한 개인이 국가 간의 외교적 관계를 통하지 않고도 외국국가를 대상으로 자신의 사법적 권리를 주장할 수 있음을 확인하였다. 이는 국제법의 변화를 선도한 판결이라 할 만하다.
외국국가에 인권을 침해당한 피해자가 자신의 권리를 구제하기 위해 마지막으로 그가 속한 공동체의 법정 문을 두드린다면, 공동체는 과연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이번 2심 판결은 공동체가 피해자를 지켜주어야 하고 부정의를 용인하는 제도를 변화시켜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것이 피해자가 속한 공동체의 의무라는 것이다. 그 의무는 한국사회가 오랫동안 품어온, 타인의 고통에 응답하는 마음이기도 하다. 지금도 그 마음이 길을 만들고 있다.
최성용 사회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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