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칼럼] ‘이 나라 보수’와 김건희 리스크
보수(保守) 중에도 존경하는 사람이 있고, 이 나라에 ‘합리적 보수’의 역할이 있다고 생각한다. 공과 사를 명확하게 구분하고 공동체를 진정으로 생각하는 보수가 있다면, 그런 보수는 이 사회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존재라고 생각한다.
보수의 정체성이란 뭘까? 다른 무엇보다도 보수는 지킬 것이 있어야 한다. 지킬 가치가 있어야 하고, 지킬 정체성이 있어야 한다. 그것이 없으면 보수라 부를 수 없을 것이다. 보수가 지켜야 할 가치에 대해서도 여러 의견이 있겠지만, ‘법치주의’가 빠질 수는 없다. ‘법치주의’의 의미와 내용에 대해서도 다양한 의견이 있겠지만, ‘법 앞의 평등’이 지켜져야 한다는 점에 대해선 이견이 없을 것이다. 최소한 공직자나 그 가족이 공직을 이용해 사적 이익을 추구해선 안 된다는 점에 대해서도 공감대가 있을 것이다. 누구의 배우자라 해서, 누구와 친하다고 해서 ‘현존하는 법’을 적용받지 않는 것은 ‘보수’의 가치와는 공존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현재의 정권과 집권여당은 ‘보수’의 자격을 상실한 지 오래다. 한동훈 국민의힘 비대위원장도 마찬가지다. 대통령의 배우자도 법을 지켜야 하고, 법을 위반한 의혹이 있을 때에는 수사를 받아야 한다. 그것을 위한 특별검사법을 ‘악법’이라 규정하는 것은 보수의 존재기반을 무너뜨리는 것이나 다름없다.
더구나 대통령의 배우자가 명품백을 받으면서 매우 부적절한 언행을 하는 영상까지 공개됐다. 대통령 배우자가 “남북문제에 직접 나서겠다”, 자신과 함께 “큰일을 하자”라는 말을 어떻게 할 수 있는가? 국민들은 대통령에게 권한을 위임한 것이지, 대통령 배우자에게 위임한 것이 아니다. 그야말로 나라의 근본이 흔들리는 상황이다. 이렇게 심각하고 참담한 상황이 드러났는데도, 여기에 대해 침묵하는 보수가 과연 법치를 얘기하고 보수임을 자처할 자격이 있는가?
그래서 이 나라 보수를 진심으로 걱정하게 되었다. 한 사회에는 다양한 의견이 공존해야 한다. 보수도 있고 진보도 있어야 한다. 빨간색도 있고 파란색·노란색·보라색·녹색도 있는 사회가 건강한 것이다. 이 나라 보수가 가치도 잃어버리고 정체성도 잃어버리고 있는 것은 보수가 아닌 사람에게도 매우 심각한 상황이다.
그런 속에서 2023년 12월8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이 나라 보수는 ‘김건희 리스크’를 더 이상 안고 갈 수 없다”는 칼럼은 신선하게 다가왔다. 이기홍 대기자는 이 칼럼에서 “하급직 공무원의 배우자라 해도 그런 선물(명품백)은 받으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할 것이다”라고 지적하고, 김건희 여사의 대국민 사과와 근신, 특별감찰관 임명과 국민권익위 조사를 촉구했다.
물론 이것으로 충분한 것은 아니다. 주가조작 등의 의혹에 대해서는 특별검사를 통한 수사가 이뤄져야 한다. 그러나 나는 이 칼럼을 보면서 ‘이 나라 보수’의 존재와 고민을 인식했다. 나와 의견이 다르더라도, 이런 보수라면 존중할 수 있고 대화할 수 있다.
안타까운 것은, 현재의 사태를 무마하려는 의도의 말과 글들이 여전히 눈에 많이 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나라 보수’가 언제까지 ‘김건희’라는 세 글자를 성역으로 놔둘 수는 없는 일이다. 진짜 보수라면 더 이상 비선을 용인하거나 대통령 배우자의 부적절한 처신을 용납해서는 안 될 일이다. 과거 비선과 국정농단으로 인해 보수 전체가 붕괴하다시피 했던 기억을 떠올린다면 너무나 당연한 얘기다. 그런데 이제야 제2부속실을 설치하겠다는 식으로 문제를 회피하려는 이야기들이 나오는 것을 보면, ‘이 나라 보수’의 상당수는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부디 지금이라도 ‘이 나라 보수’가 가치와 정체성을 회복하기를 바란다. 지금 나라를 위해서 토론할 주제가 얼마나 많은가? 심각한 불평등과 부채 문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가장 낮은 출산율 문제, 불안정한 국제정세 속에서 중심을 잘 잡아야 할 외교 문제와 남북관계, 수도권 초집중과 비수도권 지역의 어려움, 날로 심각해져가는 기후위기 등의 원인을 어떻게 진단하고, 어떤 해법을 모색할 것인지에 대해서 토론하기에도 시간이 너무나 부족한 상황이다.
그런데 주가조작과 비선 의혹, 그리고 양평 고속도로 특혜 의혹에 명품백 수수 의혹까지 있는 대통령 배우자를 둘러싼 논란으로 정치권이 시간을 보낸다는 것 자체가 너무나 낭비적인 일이다. ‘이 나라 보수’라는 자존감을 가진 분들이 하루빨리 용기 있는 목소리를 내어 ‘김건희 리스크’를 정리하고, 국가공동체를 위한 토론의 장으로 나오길 바란다.
하승수 공익법률센터 농본 대표·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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