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점] '중진국 함정' 피한 4龍···생산성 제고·저출산 대응에 미래 달렸다
대만 총통선거 결과, 양안관계·미중 패권전쟁 향배 영향
싱가포르, 첨단바이오·반도체·모빌리티 등 혁신 생태계
홍콩은 中의 과도한 개입으로 ‘3대 금융허브’ 위상 흔들
노동·교육·연금개혁, R&D 지원으로 잠재성장률 높여야
미중 패권 전쟁의 한 축인 대만의 총통·입법위원 선거가 이달 13일 실시된다. 총통 선거에서 친미 성향인 집권당 민주진보당의 라이칭더 후보와 친중 성향인 야당 중국국민당의 허우유이 후보 중 누가 승리하느냐에 따라 글로벌 정세가 요동칠 것이다. 민진당은 ‘민주주의 길을 계속 가느냐, 중국 품으로 들어가느냐’, 국민당은 ‘전쟁이냐, 평화냐’를 외치고 있다. 판세는 민진당이 오차 범위 내 백중 우세이지만 막판 국민당이 역전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3위인 대만민중당의 커원저 후보는 “왜 싱가포르에 뒤처졌느냐. 민진당과 국민당은 기득권 당”이라며 거대 양당을 비판하고 있다
중국이 사이버 공격과 정찰풍선 비행 등 다양한 방식으로 개입하는 가운데 이번 대만 선거는 사실상 미국과 중국의 대리전으로 비화했다. 차이잉원 현 총통의 경우 2016년과 2020년 선거에서 홍콩 민주화 운동에 대한 중국 탄압 과정의 반사이익을 거뒀다. 당시 ‘(중국의 주장대로) 일국양제(一國兩制·한 국가 두 체제)를 하면 홍콩처럼 될 수 있다’는 비관적 전망이 확산됐기 때문이다.
이번 선거 결과는 중국과 대만의 양안 관계는 물론 동북아 질서의 변화, 미중 패권 전쟁의 향배에도 큰 영향을 줄 것으로 보인다. 만약 정권 재창출이 이뤄지면 미국과 대만의 추가 밀착과 중국의 대만 압박 강화가 예상된다. 반면 정권이 교체될 경우 양안의 평화 분위기 모색 과정에서 미국의 대중 견제에 균열이 생길 가능성이 크다. 경제적으로는 민진당 승리 시 중국의 대만산 물품 관세 감면 혜택 축소 검토, 국민당 승리 시 양안 교역 확대가 전망된다.
특히 세계 최대의 파운드리(반도체 위탁 생산) 기업인 TSMC의 경우 딜레마에 처해 있다. 민진당이 재집권하면 중국의 위협이 커질 수 있고 국민당이 승리하면 서방과의 활발한 거래가 위축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필요시 군사력으로 통일을 달성할 것이라고 위협하고 있다. 구정모 대만 CTBC비즈니스스쿨 석좌교수는 “비록 박빙이기는 하지만 민진당 후보의 우세가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며 “반도체 분야에서 미국과 일본이 대만을 우선시하는 상황에서 대만이 한국의 반도체 산업을 계속해서 앞질러나갈 정치 지형이 완성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과거 무서운 기세로 고도성장을 이뤘던 ‘아시아의 네 마리 용(한국·대만·싱가포르·홍콩)’ 중 하나인 대만이 갈림길에 서 있다. 대만은 18년 만에 처음으로 2022년 근소하긴 하지만 한국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을 추월했다고 환호했다. 대만은 1992년 노태우 정부 말 한중 수교 과정에서 한국이 자신들을 매몰차게 버렸다는 기억에 한국보다 오히려 일본을 더 가깝게 여긴다. TSMC가 올여름 일본 규슈 구마모토 제2공장을 착공해 2027년부터 6㎚(나노미터·10억분의 1m) 반도체를 양산하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2조 엔(약 18조 원)의 투자액 중 일본 정부가 최대 9000억 엔을 지원한다. TSMC의 구마모토 제1공장은 이르면 올해 말 12나노 반도체의 첫 출하를 목표로 설정했다. 제1공장은 1조 1000억 엔의 투자비 중 40%를 일본 정부가 댔다. 물론 일본이 현재 40나노 반도체 생산에 머무는 데 비하면 상당히 진일보한 것이지만 삼성전자와 TSMC가 ‘2세대 3나노 공정’을 놓고 진검 승부를 벌이는 것과 비교하면 뒤처진 셈이다.
시 주석이 대만 무력 점령의 의지를 내비치는 것은 해양 진출과 관련이 있는 데다 TSMC의 기술력을 탐내고 있기 때문이다. 역으로 미국이 대만을 준군사동맹 관계로 대우하는 것도 안보와 경제 전략 때문이다. TSMC는 세계 파운드리 시장에서 지난해 3분기 기준 57.9%의 점유율로 2위인 삼성전자(12.4%)를 압도하며 비메모리 시장 1위를 달리고 있다. 삼성전자는 메모리 시장의 점유율이 40% 이상으로 세계 선두다. 다만 메모리 시장은 전체 반도체 시장의 4분의 1가량에 그친다.
아시아의 4룡이라는 말이 회자되던 1970년대 말~1990년 초만 해도 네 나라는 유교 문화권으로서 식민지라는 아픔을 딛고 높은 교육열과 근면성, 권위주의 통치 체제, 정경 유착과 관치 금융이라는 공통점을 갖고 압축 성장을 했다. 이후 경제적으로 ‘중진국의 함정’에 빠지지 않고 선진국까지 도달했다. 이제는 극심한 저출산·고령화를 제외하면 국가 전략에서 확연한 차별화가 이뤄지고 있다.
원래 4룡은 1970년대 말에 일본이 처음 사용한 용어다. ‘아시아의 대룡’인 자국을 빠른 속도로 추격하는 나라들을 ‘아시아의 4소룡’이라고 칭한 것이다. 한국에서는 이를 ‘아시아의 네 마리 용’으로 바꿔 부르다가 2000년대 들어 거의 쓰지 않는다. 한국은 민주화에 성공한 데 이어 2018년·2020년 세계 10위의 경제 대국으로 떠올랐다. 또 국방력은 세계 6위 수준이고 K팝·드라마·영화·음식 등 한류가 확산돼 다른 3룡과는 차원이 달라졌다. 대만 국민당의 정리원 입법위원이 2021년 이 같은 맥락에서 “한국은 ‘아시아의 네 마리 용’에서 벗어나 유럽·미국·일본과 같은 반열이 됐는데 대만은 더 나아가지 못한 채 소외됐다”고 말했다.
국제통화기금(IMF)에 따르면 지난해 말 명목 GDP에서 한국이 1조 7092억 달러로 세계 13위를 기록한 데 비해 대만(7519억 달러)은 22위, 싱가포르(4973억 달러)는 32위, 홍콩(3855억 달러)은 40위였다. 이는 한국의 인구가 5175만 명으로 대만(2395만 명), 홍콩(740만 명), 싱가포르(600만 명)보다 훨씬 많은 것과도 관련이 있다. 1인당 GDP로 보면 싱가포르(9만 1100달러), 홍콩(5만 2429달러), 대만(3만 3907달러), 한국(3만 3393달러) 순이다. 실질 구매력을 반영한 1인당 GDP는 격차가 더 벌어진다.
화교권인 싱가포르는 인민행동당의 일당 독재에도 부패 척결을 통한 정치적 안정성, 우수한 관료 체제, 영어 공용화, 산학 협력을 바탕으로 아시아의 기업 허브로 군림하고 있다. 중국과 경제·군사 협력을 하면서도 대만에 군사훈련장을 둘 정도로 실용적이다. 반도체, 첨단 바이오, 모빌리티 제조업까지 탄탄하다.
싱가포르의 반도체 산업 생태계는 연구개발(R&D), 설계, 소재·장비, 제조, 테스트, 인프라까지 잘 구축돼 있다. 해외 반도체 기업들이 잇따라 싱가포르 공장을 확대하는 이유다. 싱가포르 GDP에서 차지하는 반도체 비중이 7% 선인데 갈수록 증가할 것으로 전망된다. 실제 세계 3위의 파운드리사인 미국의 글로벌파운드리가 지난해 40억 달러를 투자한 300㎜ 웨이퍼 공장이 최근 가동에 들어갔다. 웨이퍼는 직경이 클수록 적은 비용으로 효과적인 생산이 가능한데 300㎜는 첨단급이다. 대만의 파운드리사인 UMC는 50억 달러를 투자해 월 3만 장의 웨이퍼를 생산할 수 있는 300㎜ 공장을 올해 말 완공한다.
대만 TSMC와 네덜란드의 NXP, 싱가포르 정부가 합작한 SSMC, TSMC의 전력 반도체 자회사인 뱅가드도 각각 싱가포르에 웨이퍼 공장 추가 건설을 모색하고 있다. 프랑스 소이텍은 4억 3000만 달러 규모의 웨이퍼 공장 증설에 나섰다. 미국 어플라이드머티리얼즈(AMAT)는 4억 5000만 달러를 투입해 올해 말을 목표로 생산 시설 확장에 나섰다. 세계 3위의 메모리 회사인 마이크론, 유럽 최대의 시스템반도체 기업인 STM, 칩 설계 기업인 AMD, 테스트사인 아덴텍도 싱가포르에 둥지를 틀고 있다. 조남준 싱가포르 난양공대 석학교수는 “싱가포르는 글로벌 인재들과 기업들을 끌어들여 성숙한 반도체 생태계를 구축했다”며 “미중 패권 전쟁에도 불구하고 생존과 국익을 위해 실용 외교를 펴는 것이 특징”이라고 말했다.
바이오헬스 분야에서도 다국적 제약사들이 싱가포르에 대부분 R&D센터와 생산 기지를 갖추고 있다. 현대차도 최근 현지에 R&D, 생산, 판매·서비스 시설을 모두 구비한 첨단 모빌리티 테스트베드를 구축했다.
싱가포르·대만과 달리 홍콩은 중국의 특별행정구가 되면서 뉴욕·런던과 함께 세계 3대 금융 도시라는 명성에 금이 간 지 오래다. 1997년 영국에서 중국으로 반환된 뒤 당초 ‘일국양제’ 약속이 깨지면서 홍콩에서 2014년 우산혁명, 2019년 범죄인송환법 반대 시위 등이 발생했다. 하지만 2020년 중국이 국가보안법을 실시해 정치, 사상·언론·출판의 자유를 억압하고 미국은 홍콩의 특별무역지위 박탈로 맞대응하면서 문제가 심화됐다.
이 사이 홍콩의 상당수 기업인과 부자·지식인들이 싱가포르·대만·영국 등으로 이주했다. 홍콩 경제도 2020년부터 3년 동안 중국의 ‘제로 코로나’ 정책으로 큰 타격을 받았고 지난해 초 경제활동이 재개된 뒤에도 중국의 경기 침체 여파에 시달리고 있다. 외국 투자가의 이탈 행렬로 인해 홍콩 항셍지수는 지난해까지 4년 연속 하락했다. 최근 한국에서 논란이 불거진 홍콩 주가연계증권(ELS) 피해도 이 같은 배경에서 초래된 것이다. 홍콩에서 기업들이 지난해 기업공개(IPO)를 통해 조달한 자금은 약 59억 달러로, 2020년보다 무려 88%나 급감했다. 오정근 한국금융ICT융합학회장은 “올해 홍콩의 IPO 자금 조달 규모는 지난해보다 두 배가량 늘어날 것으로 보이지만 상당 기간 과거의 명성을 되찾기는 힘들 것으로 전망된다”며 “안전한 기업 여건이 보장되지 않는 한 외국인들의 신뢰를 회복하기는 쉽지 않다”고 밝혔다.
오세정 전 서울대 총장은 “우리나라의 지난해 3분기 합계출산율이 0.7명까지 떨어지는 등 4룡이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심각한 저출산·고령화 위기를 맞고 있다”고 말했다. 오 전 총장은 이어 “갈수록 노동과 자본 투입이 한계를 보이는 상황에서 R&D를 통한 기술 개발 지원과 노동시장 대혁신, 교육 혁명, 연금 개혁을 통해 생산성과 잠재성장률을 높여야 글로벌 경제·기술 패권 전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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