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 칼럼] 쓸모없는 아이들

황경상 기자 2024. 1. 8.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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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9년 남아프리카에서 보어전쟁이 발발하자 영국은 징병제를 실시했는데, 징병 대상자의 3분의 2 정도가 발육부진, 약시, 구루병 같은 영양결핍성 질환으로 부적격 판정을 받았다. 국민의 건강 상태에 충격받은 보수당의 솔즈베리 정부는 아동의 건강을 향상시키기 위한 제도를 모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전성원, <하루 교양 공부> 중)

전쟁에 동원할 병사가 없어서 아동 건강에 신경 쓰기 시작했다니 끔찍하다. 하지만 21세기 한국에서도 여전히 아이는 존재 그 자체로 인정받기보다 필요에 따라 대우받는다. 지난해 말 미국 방송 CNN은 낮은 출생률로 군 입대자가 줄어드는 현상을 보도하며 “현재 한국 군대의 가장 큰 적”이라고 했다. 1899년의 영국과 2024년의 한국은 다르긴 하다. 한국의 영아사망률과 아동빈곤율은 낮은 수준이다. 문제는 아이들이 사라지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 사회에서 아이란 어떤 의미인가.’ 이 물음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최근 스타벅스에서 커피가 들어가지 않는 음료를 주문할 때 추가로 받을 수 있는 소량(100㎖)의 우유를 두고 논란이 일었다. 이 우유를 본인이 먹지 않고 아이에게 주는 부모가 있다며 분노와 혐오의 표적이 됐다. 많은 논점이 얽혀 있지만, 그 기저에는 아이들에 대한 혐오가 담겨 있다는 점도 부인할 수 없다. 우리 사회에서 아이들은 ‘노키즈존’이나 ‘민식이법’ 논란처럼 자주 귀찮고 성가신, 무엇보다 ‘쓸모없는’ 존재로 묘사된다. 한국의 일상 커뮤니티 공간에서 아이들이 환대를 경험하는 일은 흔치 않다.

환대는 응석을 받아주자는 말이 아니다. 구성원으로서 자리를 내어주는 일이다. 잠시 경험했던 미국의 문화는 달랐다. 스쿨버스가 승하차를 위해 정차하면 뒤따르는 차량뿐 아니라 맞은편에서 오는 차량도 정지해야 한다. 아이들을 위한 배려는 어딜 가나 돋보였다. 마틴 루서 킹의 묘소가 있는 애틀랜타의 엄숙한 기념공간에도 놀이터가 있었다. 남자화장실에도 대부분 어린이를 위해 높이가 낮은 소변기가 따로 있다. 핼러윈도 기묘한 복장과 호박귀신의 날이 아니라, 나에겐 아이들에게 환대를 경험하게 해주는 문화로 여겨졌다. 낯선 집의 문을 두드리는 아이들을 기다렸다는 듯 맞이하며 사탕을 나눠주는 어른들에게서 조건 없는 따스함을 느꼈다.

아이는 리트머스 시험지다. 비단 아이들뿐 아니라 장애인, 성소수자, 홈리스 등 사회적 약자에게 자리를 내어주는 일에 우리는 때로 잔혹하리만큼 냉정하다. 박경석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상임공동대표는 집회에서 “지난 20년 동안 싸워왔는데 왜 우리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는지 아십니까”라고 청중에게 묻고는 이렇게 자답했다. “그것은 저희가 쓸모가 없기 때문입니다.”(경향신문 1월4일자 6면)

사다리 밑으로 떨어지지 않기 위한 분투는 우리 스스로에게까지 파고든다. 한국 시민들은 ‘쓸모없는’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 전쟁만큼이나 괴로운 일상을 겪고 있는지도 모른다. 환대가 사라진, 필요를 애써 증명해야만 하는 피곤한 세상에서 ‘쓸모없는’ 아이를 낳는 일은 사치가 돼버렸다. 저출생 국면에서 아이들은 부양할 사람이 없다, 경제가 위축된다며 다시 호출된다. 돈을 쏟아부어 아이들 건강을 증진시킬 수는 있겠지만 아이들을 태어나게 만들 수는 영영 없을 것이다.

황경상 데이터저널리즘팀장

황경상 데이터저널리즘팀장 yellowpig@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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