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설] ‘강남 8학군 출신’ 강조의 이유

기자 2024. 1. 8.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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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트루먼 쇼> 같은 가짜 세상에 갇힌 듯한 혼란을 종종 느낀다.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의 외모를 칭송하는 기사들을 접할 때다. 내 심미적 기준이 정상인지가 혼란의 원인이기는 하지만, 여기서 가져야 할 객관적 의문은 다른 쪽이다. ‘얼평금지’(얼굴 평가 금지)가 이 시대의 보편적 규범이 아니었던가? 그래서 스포츠 중계에서도 선수의 외모 언급이 사라지지 않았나? 그런데 왜 갑자기 정치인의 외모를 언급하는 기사들이 쏟아지는가?

답은 어렵지 않다. ‘팬덤 정치’의 한 단상인 것이다. 생각해보면 정치인의 젊은 시절 사진을 공개하며 팬덤을 만들려는 시도는 이전에도 있었다. 그렇지만 이번에는 다른 점이 있다. ‘호감형’ ‘준수하다’ ‘세련됐다’ 등 칭찬에 대체로 따라붙는 말이 있다. ‘강남 8학군 출신’이라는 표현이다. 주의 깊게 봐야 하는 것은 이 말들을 엮어내는 의도다.

따져보면, 한 위원장에게 ‘강남 8학군 출신’이란 수식은 좋게 봐줘도 사족이다. 서울대 법대 졸업, 사법시험 패스, 초고속 승진 등 한국에서 가질 수 있는 최고 엘리트 간판을 모두 가졌는데 그런 수식이 왜 필요할까? 같은 간판을 가진 사람 중에서라면 낙후한 지역 어려운 가정 출신인 편이 더 대단하다 할 텐데, ‘강남 8학군 출신’을 강조하면 오히려 그 성과를 축소하는 게 아닐까?

실상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프랑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의 ‘구별짓기’ 이론으로 설명할 수 있다. 부르디외는 사회적 계층을 나누고 공고하게 하는 데에는 경제적 자본만이 아니라 문화적 자본도 작용한다고 했다. 상위 계층의 문화적 선호, 소비 양식이 ‘세련된 취향’으로 여겨지고, 이것이 하위 계층이 아무리 노력해도 갖기 어려운 고유한 특성으로 자리 잡게 되면 계층 이동이 더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이런 현상은 의도적으로 증폭될 수도 있다. 2011년 영국의 연구활동가 오언 존스의 책 <차브>는 ‘노동계급’을 게으르고 무책임하고 상스러운 집단으로 묘사하는 미디어와 이를 이용하는 정치인들의 행태를 고발했다. 많은 영국인에게 ‘노동계급’은 산업혁명기 투쟁으로 이룩한 자랑스러운 이름이었지만 이들을 ‘차브’란 멸칭으로 부르며 편견을 조장하려는 시도는 단숨에 그 이름을 폄훼했고 계층 갈등을 일으켰다.

문화적 자본의 작동은 ‘능력주의’도 왜곡한다. 미국 사회학자 로런 리베라가 로스쿨 학생들이 최상위권 로펌에 입사하는 과정을 연구해보니 상류층 자제들의 말투, 태도, 취미와 문화생활 경험이 합격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반면 서민 가정에서 자란 학생들은 같은 로스쿨 출신에 성적도 좋았지만 면접관의 태도와 질문에서 느껴지는 불편함과 이질감에 당혹스러워했다. 몇몇은 지레 지원을 포기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강남 8학군 출신으로 경제적, 문화적 결핍이 없는 환경에서 반듯하게 자란” 사람이라며 한 위원장을 칭송하는 것은, 단순히 팬덤으로만 볼 수 없는 현상이다. 계층화를 심화시켜 사회의 활력을 떨어뜨리고, 갈등을 조장하려는 시도인 것이다. 어쩌면 이는 한 위원장이 공적 리더십을 가졌는지 판별해줄 가늠자가 될 수도 있다. 그 위에 올라타서 누리려 하는지, 아니면 공동체를 위해 단호히 배격하려 하는지 지켜보면 되기 때문이다.

황세원 일in연구소 대표

황세원 일in연구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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