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력을 잃은 화가, 세상은 끝나지 않았다···기억과 촉각으로 그리는 그림
HIV 합병증으로 스물 여섯에 시력 상실
“세상이 끝났다”고 생각했지만
캔버스에 못과 핀, 철사로 윤곽 잡고
‘촉각’으로 그리는 법 찾아
시각을 잃고도 그림을 그릴 수 있을까. 멕시코 출신으로 독일 베를린에서 활동하는 화가 마뉴엘 솔라노(37)는 “그렇다”고 말한다.
솔라노는 2014년 스물여섯의 나이에 HIV 합병증으로 시력을 완전히 잃었다. 시각 예술을 하는 화가로서 시력을 잃는다는 것은 모든 것을 잃는 것과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하지만 시력의 상실이 그림을 그리고자 하는 욕망과 의지를 중단시키지는 못했다. 세상이 끝난 것 같은 좌절에 빠졌던 솔라노는 예술만이 자신을 암흑 속에서 구할 것이라는 듯 다시 그림을 그리는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눈을 감으면 더 잘 보이는 풍경, 즉 기억의 생생한 조각들을 꺼내 캔버스 위에 옮기기 시작했다. 벽에 스테이플러로 캔버스를 고정시킨 후 그리고 싶은 대상의 윤곽을 못과 핀, 줄을 이용해 구획한 후 손에 물감을 묻혀 손끝의 감각으로 그림을 그려 나간다. 기억과 손끝의 감각으로 그린 그림들이다.
서울 종로구 페레스프로젝트에서 솔라노의 한국 첫 개인전 ‘파자마’가 열리고 있다. 현재 베를린에 머물며 작업하고 있는 솔라노를 e메일로 인터뷰했다.
“시력을 잃었을 당시엔 예술가로서 모든 것이 끝났구나 생각했습니다. 예술을 이어간다고 하더라도 사람들이 제 병력에 대한 호기심과 동정심으로만 제 작품을 바라볼 거라고 생각했죠. 한 친구가 ‘실험(experiment)’이라는 명목으로 작업을 이어 나가는 게 어떠냐고 설득했어요. 그렇게 시력을 잃은 후 처음 완성한, 도전적이고 강렬했던 작품 ‘Blind Transgender With AIDS’(2014) 연작이 탄생했습니다. 그 이후 본격적으로 작업을 이어 나가기 위한 방법을 연구했어요. 모든 걸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습니다.”
답은 ‘촉각’에 있었다. 솔라노는 “스스로 작업을 컨트롤할 수 있기 위해서는 촉각을 사용해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하루는 작업실 벽에 캔버스를 크게 펼쳐보았는데, 작업이 잘 풀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캔버스에 핀 또는 못을 박고, 거기에 모루 철사와 끈 등을 묶어 도상의 윤곽선을 만들었다. 구도를 파악하고 채색하는 모든 과정에 촉각을 사용한다”고 말했다. 솔라노의 그림들은 ‘호기심과 동정심’을 넘어 세계적으로 주목받았다. 그의 작품은 뉴욕 솔로몬 구겐하임 미술관에 영구 소장돼 있다.
한국에서 열리는 전시 ‘파자마’에서 솔라노는 유년 시절의 즐거운 기억들을 생생히 포착해 그린 작품들을 선보인다. 생일을 맞아 장난감과 사탕이 든 인형 탈 ‘피냐타’를 방망이로 두드려 터뜨리는 어린 시절 모습을 그린 ‘빅버드(Big Bird)’엔 종이 인형의 뻣뻣한 질감과, 아이가 입은 털옷의 부슬부슬한 질감까지 섬세하게 표현돼 있다. 목욕 후 침대 위에서 어머니가 입혀준 파자마를 입은 모습을 그린 ‘파자마’, 유년 시절 절친한 친구와 입맞춤을 하는 모습을 그린 ‘나의 첫 키스’, 어머니가 공룡 옷을 입은 동생을 찍어주는 장면을 그린 ‘햇빛 또는 티라노사우루스 의상’ 등이 전시돼 있다.
솔라노는 “어린 시절의 나, 현재 어른이자 예술가가 된 나 사이의 연속성에 초점을 맞춰 이야기하고 싶었다”며 “어린 시절의 나와 지금의 나는 변함없이 똑같다. 장난기 가득하고 창의적인 사람이다. 내 자신을 표현할 수 있고, 다른 사람들이 나를 볼 수 있도록 시각적으로 스스로를 표현할 방법을 찾아낼 수 있음에 감사한다”고 말했다.
작품만 봐서는 그가 시각장애인이란 걸 알아채기 힘들다. 하지만 가까이서 들여다보면 팽팽히 당겨지지 않고 느슨하게 벽에 걸린 듯한 캔버스, 그림 속 윤곽선에 뚫린 수많은 구멍들이 드러난다. 손끝에 묻힌 물감으로 그림을 그리는 작가가 살짝 잘못 묻힌 듯한 물감의 흔적도 볼 수 있다. 구멍과 물감의 흔적은 그림의 ‘티끌’이 아니라 그림의 일부를 구성하는 것으로, 솔라노가 그림을 그려 나가는 ‘과정’이 캔버스에 고스란히 담겨 있는 것이다.
작업은 솔라노 혼자의 힘으로 이뤄지지 않는다. 솔라노는 그림을 그리기 위해 타인의 시각과 판단에 기꺼이 기댄다. 동료와 자원봉사자들의 도움을 받아 윤곽선을 캔버스 위에 표시하고 자신이 표현하고자 한 색감과 질감 등이 제대로 표현됐는지 확인한다. 그림을 그린 후 자원봉사자에게 스마트폰 영상으로 그림을 보여주고 확인을 받기도 한다.
“앞을 볼 수 있는 사람들로 구성된 팀과 함께 작업하는데, 이들은 제가 구상한 스케치의 구현과 조색을 도와줍니다. 팀원들과의 수많은 커뮤니케이션이 요구되고, 서로에 대한 신뢰가 돈독해야 하죠. 제 독자적인 영감과 취향을 제외하고, 제 작업에서 가장 중요한 세 가지 요소는 촉각, 소통, 신뢰입니다.”
예술가라고 하면 흔히 떠올리는 ‘독자적이고 독립적인 예술가’가 아닌 자신에게 결핍된 감각을 타인의 감각에 대한 신뢰로 보완하는 ‘의존하고 협력하는 예술가’ 상을 솔라노는 보여준다.
전시에 선보이는 작품 가운데엔 솔라노의 유년 시절을 촬영·편집한 영상들도 있다. 그의 회화 작품들은 영상 속 정지화면을 확대해 그린 듯 재현율이 높다.
“제 뇌는 시각 중심이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저는 본 것을 사진 찍듯 선명하게 기억하는 능력(포토그래픽 메모리)에 특화돼 있어요. 내 회화는 늘 머릿속에 맺히는 정확하고 세밀한 이미지에서부터 시작해 캔버스로 옮겨집니다. 화면 위 이미지들은 휘발되지 않고 머릿속에 그대로 남아있는 기억이며, 기억 속 이미지 속 색감에 대한 재현율은 제 손길에 더해 주변과의 소통을 통해 완성됩니다.”
솔라노는 트랜스여성(MTF)이기도 하다. 작품 속에 그의 젠더 디스포리아(지정 성별에 대한 성별불쾌감)나 성별정체성이 직접적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절친한 친구가 생일파티에서 자스민 공주 의상을 입은 모습을 그린 ‘다른 자스민 의상’ 등에선 여자아이였던 친구를 동경하는 작가의 마음이 느껴지기도 한다.
솔라노는 ‘트랜스젠더, 시각장애인’과 같은 수식어에 갇히는 걸 거부한다.
“시각장애가 저를 예술가로서 존재하게 하는 요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실명 전과 후의 나는 똑같은 예술가이며, 겉모습은 바뀌었지만 작업의 근원은 같은 곳에서 출발하고 본질도 동일합니다. 예술은 나 자신을 세상에 알리는 수단이자 타인과 소통하는 수단입니다.”
전시는 14일까지. 무료
이영경 기자 samemind@kyunghyang.com
Copyright © 경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무료 공영주차장 알박기 차량에 ‘이것’ 했더니 사라졌다
- ‘블랙리스트’ 조윤선 서울시향 이사 위촉에 문화예술계 등 반발
- [전문] 아이유, 악플러 180명 고소…“중학 동문도 있다”
- 미납 과태료 전국 1위는 ‘속도위반 2만번’…16억원 안 내고 ‘씽씽’
- 고작 10만원 때문에…운전자 살해 후 차량 불태우고 달아난 40대
- 평화의 소녀상 모욕한 미국 유튜버, 편의점 난동 부려 검찰 송치
- “내가 죽으면 보험금을 XX에게”···보험금청구권 신탁 내일부터 시행
- 경북 구미서 전 여친 살해한 30대…경찰 “신상공개 검토”
- 가톨릭대 교수들 “윤 대통령, 직 수행할 자격 없어” 시국선언
- 김종인 “윤 대통령, 국정감각 전혀 없어” 혹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