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닭이 고추장을 먹으면 진짜 힘이 세져요?”

한겨레 2024. 1. 8.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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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로리딩 실천하는 초·중학교 교실
한 권의 책을 오랫동안 천천히 깊게 읽어나가는 슬로리딩을 실천하는 수업이 늘고 있다. 게티이미지뱅크

한학기 또는 한해동안 한권 읽기
단어·표현 꼼꼼히 챙겨 읽으며
샛길로 빠져 다양한 질문·활동도
결국은 살아가는 힘과 태도 배워

김민정 수석교사(경남 웅산여중)가 국어시간에 학생들과 함께 단편소설 ‘동백꽃’을 읽을 때였다. 한 남학생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동백꽃은 1930년대 일제강점기가 시대적 배경이라고 했는데, 왜 이렇게 평화롭지? 강원도 지역은 일제강점기 때는 관심 밖이었나?”

그 말을 놓칠세라 선생님이 바로 반응했다.

“그렇네. 너무 평화롭네요. 좋은 궁금증입니다. 그럼 우리 같이 일제강점기 때 우리나라의 상황, 강원도의 상황 등을 알아볼까요?”

그러자 다른 질문들이 하나둘씩 쏟아지기 시작했다.

“선생님, 1930년대에는 감자가 비쌌나요?”
“닭이 고추장을 먹으면 진짜 힘이 세져요?”
“점순이랑 주인공은 왜 학교도 안 갔어요?”
“일제강점기 때 학교에서는 뭘 배웠어요?”

보통 일반적인 국어 시간이었다면 ‘자, 그만. 쓸데 없는 질문은 됐고, 진도 나갑시다’라고 마무리됐겠지만, 이 수업시간에서 이 질문들은 모두 호기심 어린 탐구 질문으로 탈바꿈됐다. 그 이유는 이 수업이 ‘슬로리딩’으로 진행되는 수업이었기 때문이다. 김민정 수석교사는 7년째 한 학기 또는 한 해 동안 소설 한 권을 깊게 읽어나가는 슬로리딩 수업을 진행하고 있다.

‘천천히 읽기’로 번역될 수 있는 슬로리딩은 일본의 중학교 교사였던 하시모토 다케시가 학생들에게 실시한 독서법이다. 다케시가 30년간 국어 교사로 재직한 고베의 나다중학교는 일본 명문대 진학률이 유독 높고 사회 지도층을 많이 배출했는데, 그 배경에 다케시의 ‘슬로리딩’이 있다고 밝혀지면서 일본 교육계에서 큰 주목을 받았다. 다케시 교사는 학생들이 입학해서 졸업할 때까지 국어 시간에 단 한 권의 책만 가지고 수업을 했는데, 그것은 별로 두껍지도 않은 일본의 고전 소설 ‘은수저’였다.

다케시의 학생들은 수업 시간에 아주 조금씩 소설을 읽어나갔다. 대신 책 속의 단어 하나하나에 주목하고 동의어와 반대어도 찾아본다. 단락마다 제목도 붙여보고 주제와 소재도 찾는다. 주인공의 행동을 두고 토론도 벌이고 주인공이 한 활동을 직접 해보기도 한다. 밖에 나가서 연도 날리고 달리기도 하고 카드 게임도 한다. 관련 자료들을 찾아 글쓰기도 한다. 당시 학생과 학부모들 사이에는 이런 공부가 대학 진학에 무슨 도움이 될까 하는 의구심과 불안이 있었지만, 대입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어떤 해에는 다케시 수업을 들은 학생 250여명 중 120명이 도쿄대에 진학하는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몰입 독서 경험은 자기주도적 공부법과 자기주도적 삶으로 연결된다고 교사들은 조언한다. 한겨레 자료 사진

겉핥기식 양적 독서에서 몰입의 질적 독서로

부산에서 초등학생들을 가르치는 김홍태 교사는 5년째 슬로리딩 수업을 진행하고 있다. 아침마다 30분간 아이들과 한 권의 책을 1학기 동안 깊고 느리게 읽어나가고 있다. 처음에는 ‘가정통신문 소동’ ‘소리질러, 운동장’ 같은 유명 동화로 슬로리딩을 진행하다 지금은 자신이 쓴 장편소설 ‘그해 여름’을 아이들과 함께 3년째 읽고 있다. ‘그해 여름’은 모래톱 마을 전설의 섬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룬 미스터리 모험 소설이다. 아이들은 책을 읽으며 독후감도 쓰고 토론도 벌인다. 장기자랑이나 게임 등 책에 나오는 활동을 똑같이 해보기도 한다. 책을 읽으며 그때그때 느낀 점을 쓴 글을 모아서 나중에 문집을 완성하기도 한다.

김민정 교사는 “수업 개선에 대한 고민이 많았던 때에 우연히 ‘구름학교 교사성장학교’를 통해 슬로리딩을 접하게 되어 그동안 한번도 느껴보지 못한 천천히 깊게 읽는 즐거움이 무엇인지 알게 돼 학생들과도 함께 해보고 싶다는 욕구가 생겨 시작하게 됐다”고 말했다. 처음에는 ‘동백꽃’ ‘수난이대’ 같은 단편소설로 시작해 ‘아홉살 인생’ ‘어린 왕자’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같은 장편소설로 확대해갔다.

소설의 선정 기준은 당해 학년 또는 학기별 학생들이 배우고 익히길 바라는 핵심가치를 우선적으로 고민해 선택한다. 예컨대, ‘어린 왕자’를 통해선 소중한 관계를 배우고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을 통해선 평화롭고 정의로운 교실을 모색한다. 또 역사, 사회, 경제, 문화적인 측면에서 다양한 탐구거리가 있는 작품인지도 고려한다.

그는 학생들에게 슬로리딩을 통해 ‘몰입의 경험’을 주고 싶었다고 한다. “등장인물의 말과 행동을 좇아가며 공감하고 비판하면서 몰입하고, 스스로 질문하며 생각하는 힘을 기르고, 샛길로 빠져 탐구하는 등 한 권의 책을 ‘제대로’ 읽는 몰입의 경험을 통해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고 살아가는 힘을 길렀으면 합니다.”

김홍태 교사도 “아이들에게 그냥 책을 읽으라고 던져주면 줄거리 위주의 겉핥기식 독서를 많이 하고 읽은 권수만 중시하는 양적인 독서를 많이 하는 경향이 있어서 슬로리딩을 시작했다”며 “슬로리딩을 통해 아이들의 독서 문턱을 낮추고 깊이 읽기를 통해 자연스럽게 삶을 터득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독서 문턱을 낮추기 위해서 독서와 놀이를 연결시키고, 문해력을 키우기 위해 책에 나오는 단어와 표현들을 꼼꼼히 챙겨 읽는다. 김홍태 교사가 ‘그해 여름’에 관용구와 속담, 고사성어를 두루두루 넣은 이유이기도 하다. 이렇게 꼼꼼히 읽기가 학습적으로는 자기주도적 공부법으로 연결되고, 깊게 읽기는 아이들의 삶과 성장으로 연결되기를 바란다고 김 교사는 설명했다.

실제로 아이들은 점점 슬로리딩의 맛을 느껴간다. 김민정 교사는 “종이 쳐도 일어나지 않는 학생들이 다수 발견되기도 했고, 평가에 반영되지 않는 활동인 경우에도 스스로 더 탐구하려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고 전했다. 또 아이들이 책을 읽으면서 모르는 것, 궁금한 것을 그냥 넘기지 않고 찾아보고 생각해보는 시간도 늘었다. 그 내용을 각자의 방식대로 정리하고 표현하면서 읽고 쓰는 것에 대한 두려움도 많이 줄었단다. “특히 요즘 학생들의 문해력 저하가 큰 화두인데 이전에는 대충 넘어가며 읽던 습관이 있던 아이들도 꼼꼼하게 읽고 집중하며 생각하는 습관이 형성됐다”고 말했다.

중·고교에선 방과후나 동아리에서 시도해볼만

슬로리딩 수업을 진행하기 위해서 교사들이 따로 시간을 내어 수업 진행법을 연구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김홍태 교사는 “크롬북과 같은 아이티(IT) 기기로 패들렛 프로그램을 활용하는 게 도움이 됐다”고 전했다. 패들렛을 이용하면 댓글을 달 수도 있고, 서로가 쓴 글을 공유할 수도 있고, 출력을 해서 문집을 만들기에도 용이하다.

아무래도 중·고교에선 입시 준비로 인해 물리적 시간의 제약이 있다. 김민정 교사는 “슬로리딩을 정규시간에 진행하기에 부담스러울 수 있기 때문에 방과후교실이나 학생 자율동아리 활동, 학급시간을 통해 경험해보면서 감을 잡아가는 것도 좋을 것 같다”며 “정규수업 시간에 20∼30명을 데리고 진행하다 보면 생각한 만큼 진행이 잘 되지 않을 수도 있는데 그 목마름을 소수 학생들과 진행하면 충분히 좋은 기회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귀띔했다.

슬로리딩의 본질에 대해 김민정 교사는 “작품 내적으로는 ‘제대로 읽기’이고 작품 외적으로는 삶과 연계한 ‘샛길 탐구 읽기’가 병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즉, 작품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흥미 위주로만 샛길 읽기가 되어서는 깊이 있는 읽기가 이뤄지지 못하고, 작품만 집중적으로 읽는 것에 그치면 학생들의 흥미를 끌어내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김민정 교사는 이같은 슬로리딩의 수업 사례와 진행 노하우, 아이들의 성장 모습을 꼼꼼히 기록한 책 ‘국어시간에 슬로리딩을 만나다’(구름학교)를 펴내기도 했다. 이 책은 천천히 깊게 읽어나가는 과정이 어떻게 질문하는 힘과 생각하는 힘, 그리고 살아가는 힘으로 연결되어지는지 친절하게 보여준다.

김홍태 교사는 “슬로리딩을 통해 아이들이 평생 책을 가까이 하는 독자로 살아가길 바란다”며 슬로리딩에 용이하게 만들어진 ‘그해 여름’ 소설을 오는 2월 시중에 출간할 예정이다.

김아리 객원기자 ar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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