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연주를 들으려면 휴대폰을 끄세요”…지메르만의 까칠함, 왜?
"쉼표 마저 음악”…완벽한 음악 완성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연주자의 강력한 요청에 의해 관람 수칙을 안내드립니다. 만에 하나 공연이 중단되는 불상사가 없도록 적극 협조 부탁드립니다.”
공연 전 팽팽한 긴장감이 객석마다 내려앉았다. ‘까다로운 완벽주의자’ 크리스티안 지메르만(67)의 피아노 리사이틀. 관객들은 다시 한 번 휴대폰의 상태를 살폈다. 연주회 도중 난데없이 울릴 수 있는 휴대폰 소음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서였다. 백발의 거장이 무대 위로 등장하자, 롯데콘서트홀을 가득 메운 2000여 관객들은 상기된 표정으로 박수를 보냈다. 첫 곡은 쇼팽의 녹턴 2번. 고고한 피아니스트는 흐트러짐 없는 자세로 의자에 앉아 여유롭게 연주를 마쳤다.
의외의 상황은 여기에서 나왔다. 첫 곡의 마지막 건반을 누르고, 숨을 돌린 그가 잔향 가득한 롯데콘서트홀이 울리도록 기침을 하자, 오래 참았다는 듯 관객들도 ‘기침 떼창’을 함께 했다. 관객들의 기침 소리에 지메르만은 꽤나 역동적인 손짓으로 오른손을 흔들며 “(곡이 끝났으니) 마음껏 기침하라”는 제스처를 보였다. 까칠한 거장의 ‘츤데레’ 면모에 객석은 이내 웃음이 터져나왔다.
크리스티안 지메르만은 지난해 연말 부산에서 시작해 오는 10일(롯데콘서트홀)까지 서울에서 관객과 만난다. 서울에서만 세 번의 공연(1월 3, 5, 10일)을 이어가는 일정이다. 열여덟 살에 쇼팽 피아노 콩쿠르에서 우승한 그는 이번 한국 리사이틀에서 1부는 쇼팽, 2부는 드뷔시와 시마노프스키를 들려주고 있다.
지메르만의 공연을 한 번이라도 가본 사람이라면 안다. 공연장을 방문하는 관객이라면 ‘관크(관객과 크리티컬의 합성어·타인이 공연 관람하고 있는 것을 방해한다는 뜻의 신조어)’의 우를 범하지 않기 위해 지켜야 할 공연 관람 수칙 같은 게 귀가 닳도록 울려퍼진다. ▷녹음, 녹화와 사진 촬영 금지 ▷휴대전화 전원 종료 확인 ▷앙코르와 커튼콜도 촬영 및 녹음 금지 등의 사항이다. 커튼콜에서의 촬영 금지를 제외한다면, 다른 공연보다 특별히 까다로운 수칙을 내건 것은 아니다.
다만 이 수칙을 직접 내걸고 ‘강력하게’ 요청한 사람이 연주자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지메르만이 직접 관객들에게 부탁한 것이다. 지메르만은 그의 천재성 뿐 아니라 공연 도중 에피소드로도 상당히 유명하다. 2022년 내한 당시엔 객석에서 휴대폰 불빛이 반짝여 2부 공연이 지연됐다. 당시 무대 뒤에서 그는 엄청난 불쾌감을 토로했다. 2018년 롯데콘서트홀 기획 공연으로 에사 페카 살로넨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와 함께 레너드 번스타인의 ‘불안의 시대’를 연주할 당시에는 원고지 2매 분량, 1분 이상의 멘트를 방송했다. 한국 관객에겐 생소한 곡인데다 37분간 이어지는 긴 곡이라 관람 에티켓을 더 신신당부한 것이다.
2003년 첫 내한한 서울 예술의전당 공연에선 콘서트홀 천장에 달린 비상용 고정 마이크를 확인하고는 무단 녹음을 우려, “나의 연주회에서 마이크는 용납할 수 없다”며 마이크 선을 자르려고 해 공연장을 당혹스럽게 하기도 했다. 이러한 에피소드로 인해 국내 클래식 애호가들은 지메르만의 심기를 건드리면 ‘그날의 연주’가 중단될 수 있다는 걱정을 공유, 최선을 다해 ‘관람 수칙’을 상기한다.
지메르만의 까칠함은 완벽한 음악으로 설명된다. 그가 연주하는 모든 시간은 고스란히 음악이다. 음표들이 이어져 건반 위로 내려앉는 순간, 유연한 손가락의 타건으로 소리가 만들어진 찰나, 피아노의 음색이 공연장의 벽마다 부딪혀 아름다운 음악이 되고, 마디 마디의 쉼표와 객석의 호흡이 어우러지는 모든 시간이 지메르만의 음악으로 완성된다. 피아노를 연주하지 않는 공백마저 음악이 되기에, 이 공간에서 잡음과 불빛은 음악을 해치는 요소가 된다.
그의 까다로운 음악성은 피아노를 선택하는 과정에서 더 두드러진다. 완벽주의자 피아니스트의 ‘무결점 음악’이 시작이 되는 지점이다.
지메르만은 자신이 직접 연주하는 공연장의 음향 특성을 일일이 파악해 컴퓨터에 입력, 피아노를 조정한다. 그는 언제나 피아노를 실어 연주하는 나라로 가져오고, 상황이 여의치 않을 경우 건반과 액션(건반을 누르면 해머가 현을 때리도록 하는 장치)이라도 싣고 와 직접 조립한다. 그도 마땅치 않을 땐, 피아노 자체를 공수한다. 지난 2019, 2022년엔 롯데콘서트홀이 가지고 있는 피아노로 전국 순회 연주를 했다.
이종열 대한민국 피아노 조율 명장은 그의 저서 ‘조율의 시간’에서 “(지메르만은) 네 번의 연주를 마치고 돌아가면서 롯데콘서트홀에 있는 모든 피아노는 다 훌륭하게 다듬어져 있고, 리허설룸의 작은 피아노까지도 잘 손질돼 있다고 칭찬을 쏟아냈다”고 회고했다.
지난 9월 독일 뉘른베르크 연주 땐 세 대의 피아노를 무대에 올린 뒤, 한국 공연과 같은 레퍼토리인 녹턴을 각기 다른 피아노로 연주했다. 더 나은 피아노를 선택하기 위한 까다로움이다. 이번엔 그가 사용하고 있는 ‘스타인웨이 앤드 선스(Steinway & Sons) 파브리니’를 가져와 연주했다. 그의 전속 조율사도 함께 왔다. 현재 이 피아노는 서울 공연 이후, 대구(1월 7일)에 들렀다. 현재는 마지막 공연을 위해 서울로 올 준비를 하고 있다.
지금까지의 한국 공연은 무사히 잘 넘겼다. 물론 지메르만의 요청에도 서울 공연에선 어김없이 휴대폰의 음성이 울렸고, 앙코르 중 곡을 검색하는 관객도 있었다. 2022년 공연에선 엄청난 ‘비극’이 벌어졌다. 앙코르 중 곡을 검색하던 관객 때문에 “시리(아이폰 인공지능 서비스)가 문의하신 음악을 찾지 못했어요”라는 말이 생생히 울려 퍼졌다. 다행히 지메르만은 그 소리는 듣지 못했다며 “걱정하지 말라”는 이야기를 들려줬다고 한다.
이번 한국 공연에서 그는 앙코르 곡의 공지를 하지 않고 있다. 지메르만의 요청이었다. 한 공연계 관계자는 “공연을 현장에서 듣는 여운과 감동보다 과시나 기록으로 기억하려는 것에 대한 일침이 아닌가 싶다”며 “사실 지메르만이 까칠한 완벽주의자로 유명해서 그의 공연 관람 수칙이 더 주목받지만, 이러한 수칙은 옆자리 관객을 위한 배려이자, 연주자에 대한 존중”이라고 말했다.
sh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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