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들기만 해봐라’ 벼르는 남북…365일 살얼음판 [정욱식 칼럼]
한반도 1년 내내 위기… 8월이 가장 걱정
트럼프 귀환시 한미관계 일대 격변 불가피
연말연시 지구촌 곳곳에서 전해지고 있는 소식은 올해에도 전쟁과 군비경쟁이 격화될 것이라는 암울한 전망을 낳고 있다. 우선 23개월째 접어든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장기화의 늪에 빠져들고 말았다. 작년 여름 서방 진영의 대규모 지원을 등에 업고 반격에 나선 우크라이나는 가을과 겨울을 거치면서 수세 국면에 몰리고 있다. 미국과 유럽연합의 지원 피로감과 내부 균열이 커지고 있는 반면에 러시아는 승기를 잡았다고 자신한다. 10월7일 하마스의 야만적인 기습공격과 이스라엘의 무자비한 보복공격으로 터진 가자지구 전쟁 역시 출구가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홍해, 레바논, 이란 등에서도 무력 충돌과 테러가 발생하면서 확전을 걱정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한반도로 시선을 돌려봐도 불안감은 가중된다. 2018〜2019년 한반도 평화프로세스가 황망하게 끝나면서 평화의 희망은 사상 최악의 군비경쟁에 자리를 내주고 말았다. 설상가상으로 2022년 5월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에는 군비경쟁뿐만 아니라 정치군사적 적대감도 최악으로 치달아 왔다. 올해 들어서도 남북한 당국이 날선 공방전을 주고받고 있다. 연초부터 한미연합군은 육·해·공에서 다량의 무기와 장비를 동원해 군사훈련을 실시했고, 이에 발끈한 북한은 서해에서 해상 사격 훈련으로 맞불을 놓았다. 과거에는 위기가 고조되다가 대화로 반전되는 경우가 많았는데, 최근 들어서는 대화는 사라지고 위기가 일상화되고 있는 형국이다. ‘이러하다 전쟁이 터지는 것이 아니냐’는 불안감을 토로하는 사람들이 늘어날 정도로 전쟁위기감이 우리 사회 곳곳에 스며들고 있는 것이다.
러-우 전쟁과 한반도 정세가 고도로 연결되고 있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작년 미국의 주요 언론들은 미국이 한국에서 제공받아 우크라이나에 공급한 155mm 포탄량이 모든 유럽 국가들의 공급량보다 많았다고 보도했다. 이러한 움직임을 예의주시하면서 ‘한러 관계가 파탄날 것’이라고 경고했던 러시아는 급기야 북한과 손을 잡았다. 작년 9월 북러 정상회담을 전후해 군사협력을 본격화했고 미국은 북한이 러시아에 포탄뿐만 아니라 탄도미사일과 발사대까지 제공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이러한 양상은 남북한이 유라시아 반대편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에 주요 무기 공급국이 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큰 틀에서도 볼 필요가 있다. 윤석열 정부가 표방해온 ‘가치 연대’와 김정은 정권이 ‘반미 연대’의 충돌이 바로 그것이다. 윤 정부는 우크라이나 간접 지원뿐만 아니라 미국이 주도해온 인도-태평양 전략, 한미일 준군사동맹 추구,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와의 관계 강화에 몰두해왔다. 자유·인권·시장경제 등 가치를 내세웠지만, 실은 동맹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고 있다. 그 결과는 참담하다. 북·중·러와의 관계는 1990년대 이래 모두 최악이고 물심양면으로 도와준 미국의 위상은 날개 없는 추락을 거듭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크라이나 사태와 관련해 전쟁 방지와 조속한 휴전에 도통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미국에 등을 돌리는 나라들이 늘어나고 있고, 이러한 추세는 가자지구에서 전쟁 범죄를 일삼는 이스라엘에 미국이 외교적 보호자를 자처하고 다량의 무기를 제공하면서 더욱 심해지고 있다.
대미 관계 개선의 미련을 접고 반미를 기치로 든 북한은 이를 기회로 삼고 있다. 두 개의 전쟁과 미중 전략 경쟁을 다극체제로의 전환 기회로 간주하고는 “미국과 서방의 패권전략에 반기를 드는 반제자주적인 나라들과의 관계를 가일층 발전”시키기로 한 것이다. 북한의 자신감은 대외 환경의 변화에서만 비롯된 것이 아니다. 북한의 핵과 미사일 능력 증강은 거의 모든 이가 인정하고 우려할 정도로 강해지고 있다. 특기할 점은 인민생활과 경제 분야이다. 북한은 작년에 ‘풍작’이라는 표현을 사용할 정도로 식량 증산에 성공했다. 또 연말에 있었던 노동당 9차 전원회의에선 작년에 목표로 삼았던 ‘12가지 고지’를 초과달성했고, 2021∽2023년 국내총생산액이 2020년에 비해 “1.4배로 늘어났다”고 밝혔다. 이러한 평가가 사실이라면, 북한이 만성적인 식량난과 경제난에서 벗어나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군사·외교·경제 등 각 방면에서 낯설지만 만만치 않은 북한이 등장하고 있는 셈이다.
올해 가장 큰 걱정거리는 한반도에서 무력충돌 발생 여부에 있다. 오늘날 한반도는 언제 어디서든 무력충돌이 발생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군사적 위기가 고조되고 있는 실정이다. 한미동맹은 북한의 핵무기 사용시 “정권 종말”을 가져올 정도로 압도적이고 강력한 대응을 공언하고 있고, 윤석열 정부는 북한의 도발시 ‘즉·강·끝’(즉시·강력하게·끝까지) 원칙으로 응징하겠다고 엄포를 놓고 있다. 북한의 발언 수위도 높아지고 있다. 9차 전원회의에서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적들의 무모한 북침도발책동”으로 언제든 전쟁이 터질 수 있고 전쟁이 발발하면 “남반부의 전 영토를 평정”할 수 있는 군사 준비태세를 갖추라고 지시한 것이다. 남북 모두 평화통일을 향한 노력은 접고 ‘전쟁 발발시’ 상대방을 점령하는 무력통일론은 펼치는 위험천만한 철부지 게임에 돌입한 셈이다.
오늘날 한반도의 위험성은 다층적이다. 남북대화와 북미대화가 단절된 지는 5년이 지나고 있고, 대화가 사라진 자리엔 극심한 군비경쟁과 설전이 똬리를 틀고 있다. 남북한의 갈등과 대결 중재자도 자취를 감추고 있고, 미국과 중국의 한반도 정책에 대한 관심도 크게 떨어진 상황이다. 설상가상으로 남과 북의 정치군사적 적대감이 최악으로 치닫고 있는 와중에 ‘군사적 거리두기’를 통해 우발적 충돌 방지에 기여했던 9·19 남북 군사합의도 백지화되고 있다. 한미, 혹은 한미일은 올해 사상 최대 규모의 연합훈련을 예고하고 있고, 북한은 이에 대해 강력한 대응을 경고하고 있다. 대북 전단 살포와 대북 확성기 방송 재개 여부 및 이에 대한 북한의 반응도 걱정거리이다. 그마나 다행스러운 점은 있다. “모든 옵션이 테이블 위에 있다”며 북핵 저지를 위해서는 선제공격도 검토하겠다던 미국이 이 옵션을 내려놓은 것이 바로 그것이다.
이는 수십 년 동안 한반도 상공을 배회해온 전쟁위기설이 북미관계 중심에서 남북관계 중심으로 옮겨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도 남북한 당국은 전쟁 예방과 위기관리에 힘쓰기보다는 ‘건들기만 해봐라’라며 상대를 벼르기에 여념이 없다. 설전과 무력시위 공방전으로 시작된 올 한해의 불안한 정세가 1년 내내 계속될 우려도 크다. 특히 한미의 ‘핵 작전 연습’이 예정된 8월에 한반도 위기가 절정에 달할 전망이다. 작년 하반기부터 ‘눈에는 눈, 이에는 이’식의 군사적 맞대응을 선택해온 북한도 ‘핵전쟁 훈련’으로 맞불을 놓을 공산이 크기 때문이다. 한미와 북한은 상대에게 최대한의 두려움을 안겨줘야 평화를 지킬 수 있다고 믿지만, 이 과정에서 인간의 오판과 오인, 그리고 기계의 오작동으로 전쟁이 일어나기도 한다는 것이 전쟁사의 교훈이다.
올해 세계 도처에서 실시될 선거도 주목된다. 한반도 정세와 관련해선 특히 두 개의 선거가 중요하다. 하나는 1월 13일로 예정된 대만 총통선거이다. 민주진보당(민진당)이 재집권에 성공하면, 동아시아 및 이와 연동된 국제정세의 불확실성도 커질 것이다. 대만 위기는 수교 이래 최악의 상태에 빠진 한중관계에는 ‘추가적인 부담’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높다. 한중관계 악화의 최대 원인은 윤석열 정부가 대만 문제와 관련해 미국의 입장을 철저하게 두둔한 데에 있어왔기 때문이다. 반면 대만 문제와 관련해 중국의 입장을 가장 강력히 지지해온 북한은 대만 위기를 기회로 간주할 것이다. 북한이 러-우 전쟁의 장기화를 기회로 간주했던 것처럼 말이다. 반면 국민당이 정권 탈환에 성공한다면, 양안 관계는 개선될 것이고 이는 동아시아 정세에도 큰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다. 중국의 대만 침공 준비설을 앞세워 동맹국들을 규합해온 미국의 전략이 설자리가 좁아질 것이기 때문이다.
올해 지구촌의 최대 관심사는 11월에 있을 미국 대선이라고 할 수 있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출마 여부 및 당선 가능성에 세계인의 시선이 쏠리고 있다. 그의 재임 당시에 가장 큰 영향을 받았던 한반도도 예외일 수는 없다. 트럼프는 집권 1년차였던 2017년 내내 김정은과 건곤일척의 승부를 벌이며 한반도 위기를 증폭시켰던 인물이다. 2018〜2019년에는 미국 대통령으론 처음으로 북한 지도자와 세 차례나 만나 ‘세기의 담판’을 벌였다. 한국을 상대로는 주한미군 철수를 ‘영업용 카드’로 삼아 무기 판매와 방위비 분담금 인상에 열을 올리기도 했다. 이랬던 그가 백악관의 주인으로 다시 돌아온다면, 한반도 정세에는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까?
일단 ‘시즌 2’는 1편 때와는 크게 달라진 상황에서 펼쳐질 수밖에 없다. 가장 큰 변화는 북한에서 일어나고 있다. 과거의 북한은 미국과 친해지길 간절히 원했었다. 김정은이 2017년에 전쟁 위기를 불사하면서까지 “국가 핵무력 완성”을 향해 질주한 것도 최대한 힘의 균형을 이뤄 트럼프와 담판을 짓고 싶었던 데에 있었다. 하지만 2019년을 거치면서 트럼프 행정부에게 농락·배신당했다고 결론짓고는 친미에서 반미로 돌아섰다. 또 트럼프에게 북한의 경제난과 대북 제재는 김정은의 양보를 받아낼 수 있는 유력한 카드였다. 그런데 이마저도 달라졌다. 북한은 제재를 자력갱생과 자급자족을 실현할 수 있는 “좋은 기회”로 간주하고 있고, 또 상당한 성과를 내고 있다고 자신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울러 북한은 “불가역적인 핵보유국”을 법제화하고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비롯한 핵미사일 능력을 배가하면서 ‘비핵화의 종말’을 선언한 상황이다.
아마도 김정은과 트럼프의 만남이 성사된다면, 북핵·ICBM 동결과 한미연합훈련 및 미국 전략자산 전개 중단이 논의될 것이다. 이른바 군비통제 모델이다. 트럼프는 이러한 거래가 북한의 ICBM 완성을 저지하고 북미관계 개선을 통해 중국과의 경쟁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하게 하는 것이라고 자랑할 것이다. 이러한 가능성보다 더 확실한 것도 있다. 트럼프가 윤 정부에게 방위비 분담금 인상을 강하게 요구할 것이라는 점이 바로 그것이다. 돈이 많이 든다며 연합훈련 축소나 중단을 지시할 수도 있고, 주한미군 철수를 언급할 수도 있다. 이러한 상황이 맞물리면 국내에서 독자적 핵무장론도 강하게 부상할 것이다. 트럼프의 귀환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면, 우리가 올해 하나둘씩 따져봐야 할 문제들이 아닐 수 없다.
정욱식 한겨레평화연구소 소장 wooksik@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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