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에 뿌리 내린 북한 새댁…‘복희네농장’ 김복희 대표의 소원[주성하의 북에서 온 이웃]

주성하 기자 2024. 1. 8. 11:48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제주 ‘복희네농장’ 대표 김복희 씨가 지난해 1월 비닐하우스에서 정성스럽게 가꾼 레드향을 수확하고 있다.
제주도는 우리나라에서 제일 처음 태풍을 맞는 곳이다. 제주 사람들에게 이곳에서도 가장 바람이 센 곳이 어디냐고 물어보면 주저없이 남서쪽 송악산과 산방산 아래에 위치한 대정과 안덕면을 꼽는다.
몇 년에 한 번 큰 태풍이 오면 숱한 나무들이 꺾여 쓰러지는 이곳 산방산 아래에 한 탈북 여성이 꿈을 꾸고 살고 있다. 어떤 바람에도 끄떡없이 단단히 뿌리를 내리고 있다.
안덕면에서 감귤농장인 ‘복희네농장’을 운영하는 김복희 씨는 1978년 남포에서 태어나 2018년 한국에 정착했다. 제주도 토박이인 남편을 만나 2020년 제주로 옮겨와 현재 4000평 규모의 감귤농장을 운영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시작에 불과하다.
“저는 잠잘 때도 늘 꿈을 꿉니다. 머리 속에 앞으로 해야 할 일만 가득한 것 같아요. 친구도 안 만나고 놀려 다닐 시간도 없습니다. 돈을 벌면 모두 식물과 장비를 사는데 씁니다.”
제주 정착 3년 만에 김 씨는 이미 감귤 재배를 위한 일반 기술을 모두 습득했고 조경수 사업도 성공시켰다. 주변에서 모두 “귤 농사나 잘 짓지 뭘 엉뚱한 일을 벌이냐”고 할 때 그는 결심을 굽히지 않았고, 지금은 조경수 판매로만 일반 농가의 소득이 나온다. “뭘 몰라서 그런다”고 하던 주변의 시선은 이제 “어떻게 그런 생각을 다 했냐. 머리가 참 좋다”라는 감탄으로 변했다.
“저는 5개년 계획이 있어요. 복희네종합테마농장을 만들 겁니다. 산방산에 놀려오면 꼭 들리게 되는 곳으로 만들려고 해요. 지금의 귤 농장은 누구나 무료로 와서 돌아볼 수 있고, 실비로 과일을 따는 관광체험농장으로 만들 겁니다. 그리고 이 주변에 누구나 와서 사진을 남기고 싶은 예쁜 야자수 숲을 만들고요, 동물농장도 만들 겁니다. 그러면 아담한 돌담을 두른 민박집도 있어야겠죠. 그 집은 새들이 지저귀고 아름다운 꽃들이 가득한 정원으로 둘러싸게 될 겁니다. 이곳을 머무는 것만으로도 힐링이 되는 곳으로 만들려고 합니다.”
아름다운 정원과 과수원은 제주에 와서 갑자기 떠오른 아이디어가 아니었다. 그것은 그의 어린 시절 머리 속 어딘가에 저장된 아득히 먼 추억이기도 하다.
비닐하우스에서 재배하고 있는 수국의 향기를 맡는 김 씨. 그는 꽃을 가꿀 때 가장 행복하다.

● 평범했던 학창시절

김 씨가 태어난 고향은 유유히 흐르는 대동강 옆에 복숭아꽃, 살구꽃, 사과꽃이 만발한 마을이었다.
부지런한 어머니와 중국에 있는 아버지 친척들의 도움 덕분에 형제가 여럿이었어도 배고픔을 몰랐다. 학창시절 김 씨는 놀기를 좋아하고 공부엔 큰 관심이 없었던 학생이었다. 1994년 중학교를 졸업하게 되자 아버지는 군에 입대하라고 권했다. 군에 나가 노동당에 입당해야 출신성분의 굴레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날 수 있다고 말했다.
그의 부친은 중국에서 태어나 자랐다. 연변대학까지 졸업한 엘리트였지만, 1960년대 북한으로 넘어와 정착했다. 그러나 출신성분 때문에 노동당원이 될 수가 없었다.
아버지는 자신의 굴레를 자식에게 물려주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런 이유 때문에 김 씨의 두 오빠는 졸업과 동시에 주저 없이 군에 나갔고, 언니도 총을 메는 보위대에 입대했다.
김 씨는 군에 나가 청춘을 허비하고 싶지 않았다. 군대에 가지 않으면 사회에 진출해야 했다.
북한 당국이 김 씨에게 임명한 직장은 한 연합기업소의 선반공이었다. 막상 가서 일하고 보니 그곳도 진저리나게 싫은 일터였다. 뜨겁게 가열된 쇳밥이 얼굴에 튀어 오르고, 정신을 집중하지 않으면 선반에 말려들어가 신체가 잘리는 사고가 수시로 발생했다.
그가 사회에 나갔던 1994년을 기점으로 북한은 고난의 행군으로 접어들었다. 여기저기서 배급을 못 받았다는 아우성이 터지더니 급기야 1995년엔 김 씨의 직장에도 배급이 끊겼다.
직장에선 어린 노동자들을 선발해 서해 바다에 조개잡이를 내보냈다. 특히 어린 여성 직원들이 대거 발탁됐는데, 김 씨도 17세에 조개잡이 조에 차출돼 나갔다. 바다에 나가 조개를 잡으면 먹을 것은 주기 때문에 가정의 식량 부담을 조금이나마 덜 수 있었다.

감귤밭에서 가지치기 작업을 하는 김 씨.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하루하루가 흘러간다.

● 지옥의 조개잡이

조개잡이는 큰 배에 50~60명을 태우고 나가 진행했다. 바다로 한동안 달려 어디인가 정박하면 썰물 때 물이 빠져 배가 갯벌 위에 올라앉게 된다.
그러면 배에 탔던 사람들이 우르르 내려 갯벌을 열심히 파고 대합이나 백합과 같은 조개를 양동이에 주워 담는다. 밀물이 들어오면 다시 배에 올라간다. 이 생활이 3개월이나 반복됐다. 조개를 판 돈은 모두 당국에서 걷어갔다. 석 달을 작업했지만 월급도 제대로 받지 못하는 노예 생활이었다.
“그때는 정말 지옥이었어요. 여름에 나갔는데 석 달 동안 배에서 내리지 못했습니다. 목욕을 하지도 못하고 소금에 쩐 작업복을 그대로 입고 살아야 했습니다. 추운 밤에도 물이 빠졌다고 추운 갯벌에 내몰았어요. 한 배에서 남녀가 함께 생활하는데, 화장실도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고, 병이 나도 치료를 받을 수가 없었어요.”
김 씨가 북한을 떠올리면 가장 몸서리치게 기억되는 악몽이다. 김 씨는 멀미를 심하게 해 물이 들어오면 꼼짝없이 누워있어야 했다.
악몽 같은 조개잡이 동원을 마치고 돌아오니 공장에 출근하는 노동자들이 현저히 줄어들어 있었다. 배급을 받지 못하게 되니 모두 장마당에서 장사를 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즈음 집안 형편도 어려워졌다. 김 씨도 뭔가 집안에 도움이 될 것을 찾아야 했다. 하지만 장사를 하지는 못했다. 장마당은 밑천도 경험도 없는 17세 소녀가 뛰어들기 너무 위험한 곳이기도 했다.
김 씨는 조개를 잡아 팔면 식량을 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품었다. 결혼한 지 얼마 안 된 언니도 갓난아이를 부모에게 맡기고 동생과 함께 서해바다로 향했다.
1995년 12월 두 자매는 장화도 없어 맨발로 살얼음이 낀 갯벌에 뛰어들었다. 배가 없으니 해변에서 조개를 캘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수확은 신통치 않았다. 주위를 돌아보면 굶주린 사람들이 너도나도 바다에 나와 조개를 잡고 있었다. 하루하루가 죽느냐 사느냐를 가르는 전쟁터였다.
20일 남짓 바다에서 헤맸지만 벌어들인 밀가루는 2~3㎏ 밖에 안 됐다. 김 씨 자매는 다시 집으로 향했다. 돈이 없어 추운 날에 차도 잡아타지 못하고 하루 종일 걸어와야 했던 일도 김 씨에겐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은 추억이다.
봄이 되자 김 씨는 인근 밭에서 시래기와 이삭줍기를 하면서 끼니를 유지해야 했다. 산을 개간해 농사를 지을 생각이 없진 않았지만, 종자를 살 돈도 없었다.
이런 일을 겪으며 김 씨는 더는 북한에서 살고 싶지 않았다. 1996년 겨울 김 씨는 가족에게도 말을 하지 않고 북부 국경으로 향하는 열차에 올랐다.

지난해 11월 김 씨(왼쪽에서 두 번째)는 윤석열 대통령, 부인 김건희 여사와 함께 국민 대통합 김장 행사에 탈북민 대표로 참가했다.

● 동상을 입고 탈북

김 씨는 중학교 졸업반 때 중국에 가본 일이 있었다. 고난의 행군 이전부터 아버지는 몇 년에 한 번씩 형제들이 살고 있는 중국으로 가서 도움을 받았다. 어떤 때는 합법적인 증명서를 떼고 가기도 했지만, 어떤 때는 두만강을 도강해 갔다. 김 씨의 고모가 사는 집과 사촌오빠가 사는 아파트는 두만강 건너편 북한 쪽에서 빤히 바라보였다. 1990년대 중반까진 두만강에 국경경비대가 거의 없어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손쉽게 강을 건널 수 있었다.
김 씨가 컸을 때 아버지는 그를 데리고 함북 온성으로 가 중국 고모네 집으로 몰래 넘어갔다. 아버지는 중국에 다녀올 때마다 그곳이 너무 빠르게 발전하고 있다고 말했는데, 김 씨가 직접 가보니 차원이 다른 세계였다. 식량과 고기, 간식, 과일이 풍부했고, 각종 채널을 통해 신기로운 세상을 접할 수 있었다. 중국을 한 번 다녀온 북한 사람들은 절대로 그 경험을 잊지 못한다.
중학교 졸업 후 지옥 같은 삶을 2년이나 살다보니 김 씨는 중국에 가고 싶은 마음이 더욱 간절했다. 떠날 때는 탈북을 결심하진 않았다. 중국에서 도움을 받고 오자는 마음이었다.
집에 말을 하지 못하니 여비를 받을 순 없었다. 대신 그는 아버지가 중국에서 가져온 예쁜 옷들을 잔뜩 껴입고 떠났다. 가다가 옷을 팔면, 먹을 것은 살 수 있다고 타산한 것이다.
그러나 이 계획이 오산이었음은 얼마 안 돼 알게 됐다. 남포에서 온성까지 무려 한 달이나 걸렸던 것이다. 기차는 며칠에 한 번씩 다녔고, 정전 때문에 가다 서다를 반복했다. 기차 천정에까지 사람들이 새까맣게 매달렸다. 허허벌판에 기차가 서면 옷을 팔 곳도 없었다. 기차가 서면 주변 농촌 동네에서 이때라 생각하고 각종 음식을 만들어 달려 나와 승객들에게 비싸게 팔았다. 농촌 사람들에겐 옷은 사치품이었다. 김 씨는 눈물을 머금고 터무니없이 싼 값에 옷을 넘기고 먹을 것을 사먹었는데 며칠도 되지 않아 팔 옷도 떨어졌다.
이때부터 그는 꽃제비가 됐다. 어린 소녀라고 불쌍하게 여겨 먹을 것을 나눠주는 사람들도 적진 않았다. 발 디딜 틈도 없는 기차 안에서 여기저기 치이며 잠을 잤지만, 추위는 견딜 수가 없었다. 특히 발이 얼어들어가 동상을 입었다.
그 한 달의 여정은 김 씨에게 또 하나의 악몽이었다. 마침내 함북 온성역에 내렸을 때 그는 걸을 수조차 없었다. 어느 농가의 나무 울바자 밑에서 어두울 때까지 기다렸는데 동상을 입은 다리는 더 얼어 감각이 없었다.
그 다리를 끌고 그는 두만강으로 나갔다. 그리고 무작정 기어가기 시작했다. 몇 년 전 아버지와 강을 건널 때도 밤에 강에 나가 기어갔다. 그가 겨울에 떠난 이유도, 지금쯤 떠나면 얼어붙은 강을 기어가기 쉬울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두만강을 건너 고모가 사는 마을에 들어갔지만, 쉽게 찾을 것이라 생각했던 고모의 집은 나타나지 않았다. 비슷비슷한 집들이 늘어선 동네를 서너 시간 헤맨 끝에야 마침내 고모의 집을 찾았다.
갑자기 나타난 조카의 행색에 고모는 깜짝 놀랐다. 처음엔 움직일 수도 없어 대소변도 받아내야 할 상태였다. 그러나 가지를 다린 물에 다리를 씻으며 각종 약을 쓰고 나니 한 달이 되자 움직일 수는 있었다. 그는 1997년 설날을 고모집에서 맞았다. 처음으로 가족과 떨어져 보낸 슬픈 설날이었다.

한국 정착 초기의 김 씨. 제주도에 오기 전인 2019년 식당일을 하는 와중에 잠깐 카페에 들렸다.

● 중국에서의 삶

김 씨가 회복되자 고모는 “조선에선 사람들이 굶어죽는데 그런 곳에 너를 다시 내보낼 수가 없다”고 집에 돌아가는 것을 완강하게 반대했다. 하지만 북한에서 넘어오는 사람들이 늘어나 중국 국경 통제도 강화됐기 때문에 그곳에서 오래 있을 수 없었다.
고모는 그를 하얼빈에 사는 친척집에 다시 보냈다. 그곳에서 김 씨는 친척집 아이를 봐주는 보모로 3년을 지냈다.
하지만 아무리 친척이라도 남의 집에서 눈칫밥을 먹고 사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결국 그는 22살 때인 2000년 친척들의 소개로 조선족 남성과 결혼했다. 남자 쪽에서 합법적인 호구(신분증명서)를 위조로 만들어줘 북송될 걱정도 덜었다. 그해 딸도 태어났다.
나가서 일을 해야 했기에 중국어도 열심히 배웠다. 주변 사람들이 다 한족이라 언어 실력도 쑥쑥 늘어 몇 년 지나서 어디에 취직을 해도 의심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렇게 중국에서 2018년까지 무려 21년을 살았다.
어쩔 수 없이 선택한 결혼생활은 행복하지 않았다. 일당직 노동을 하는 남편이 워낙 말이 없어 둘 사이 소통이 잘 되지 않아 너무 답답했다. 그렇지만 다시 돌아갈 곳도 없어 모든 불만을 억지로 참고 살아야 했다. 그는 점점 더 일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중국에서 그는 한 직장에 취직해 10년 동안 매니저로 살기도 했고, 식당을 차려 운영하기도 했다.
1년에 많이 쉬어야 1주일을 넘긴 적이 없을 정도로 열심히 일만 하고 살다보니 돈도 적잖게 벌었다. 물론 그래봐야 한족 동네의 평균 수준이었지만, 그래도 먹고 사는 데는 지장이 없었다.

동물을 좋아하는 김 씨는 2022년 풍산개 ‘강산’이를 식구로 받아들였다.

● 짐을 가장 많이 갖고 온 탈북자

어느덧 딸이 17살이 돼 학교를 졸업할 나이가 됐다. 그런데 딸이 한국으로 유학을 가겠다고 결정했다. 김 씨는 공부를 더 할 수 없었던 자신의 처지를 비관했던 터라 더 공부하겠다고 하는 딸이 대견스러웠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중국에서 버는 돈으로는 딸의 학비를 감당하기 어려웠다. 김 씨는 결단을 내렸다.
“내가 서울로 가서 돈을 벌어 딸의 뒷바라지를 하자. 딸 때문에 억지로 살았는데, 딸이 중국을 뜨면 이걸 기회로 희망이 없는 이 삶도 청산하자.”
2017년 말 김 씨는 한국 영사관에 전화를 걸었다.
“저는 사실 탈북자인데 한국에 가도 되나요? 한국에 가서 북한말을 하게 되면 간첩으로 잡힐지 몰라서요.”
그는 그때까지 한국에 수만 명의 탈북자가 사는 것도 몰랐다.
대사관에선 “당연히 한국에 가면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다”고 대답했다. 딸이 서울에 들어온 지 1주일 뒤 김 씨도 비행기표를 끊고 하얼빈 공항을 떠나 인천공항에 내렸다. 중국 호구가 있기에 비행기를 타고 직접 오는 것이 가능했던 것이다. 한국으로 떠날 때 김 씨는 “저기는 물가가 비싸니 아무 것도 사지 말고 여기서 다 챙겨가자”고 생각했다. 인천공항에 내렸을 때 그는 커다란 캐리어를 서너 개 갖고 내렸는데 마중 나온 요원들이 “이렇게 짐을 많이 갖고 온 탈북자는 처음 봤다”고 혀를 내둘렀다.
김 씨를 태운 버스는 합동조사센터에 들어갔는데, 모든 물품은 물론 휴대전화도 압수된 채 독방에 들어갔다. 김 씨는 한국에 가면 조사를 받는다는 사실을 몰라 체포된 줄로만 알았다. 며칠 동안 김 씨는 “왜 이런 곳에 잡아넣지? 내 인생은 여기서 끝나겠구나. 바보처럼 내가 발등을 스스로 찍었구나”하는 생각에 끝없이 홀로 자책했다. 차츰 시간이 지나면서 그는 이것이 통상적인 과정임을 알았다.
하나원을 거쳐 김 씨는 대한민국 국민으로 제2의 인생을 살게 됐다. 행운도 따랐다. 이전까진 중국에서 10년 이상 산 탈북민에겐 집을 주지 않았는데, 그가 올 즈음엔 법이 바뀌어 임대주택을 주었다. 2018년 3월 김 씨는 인천에 집을 받고 한국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다.

1년 동안 열심히 가꾼 과일을 수확할 때면 언제나 뿌듯한 마음이 든다.

● 제주도에 새 둥지를 틀다

사회에 나오자마자 김 씨는 한 식당에 취직해 돈을 벌기 시작했다. 일도 쉽지 않았지만, 한국어 소통도 어려웠다. 중국의 한족 동네에서 20년 넘게 살다보니 한국어도 많이 서툴렀다.
중국에서 새벽 2시에 출근하며 식당까지 운영했기에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지만, 한국 식당 서빙의 강도는 훨씬 더 높았다.
돈을 아끼려고 겨울에 난방도 틀지 않고 살았지만 남는 돈이 없었다.
한국 사회에 어느 정도 눈을 뜨자 지인이 동탄에 있는 골프장 식당이 더 좋다고 소개해주었다. 그 식당에서 그는 먹고 자면서 열심히 일했다. 쉬는 날엔 다른 알바를 하면서 돈을 벌었다. 식당일을 계속하니 다리가 끊어질 정도로 아파오기 시작했다.
“내가 한국에서 죽을 때까지 이렇게 허망하게 살다 죽는 건 아닐까”
이렇게 회의하던 순간 지인이 “아직 나이도 젊은데 여기서 혼자 열심히 살기보단 서로 의지해 사는 것이 좋다”며 오래 전에 상처한 한 남성을 소개해주었다.
둘은 몇 달 동안 전화를 하면서 서로를 알아갔다. 남자는 서울에서 30년 가까이 살면서 해외에서 회사를 운영했는데, 코로나로 여건이 악화돼 모든 것을 접고 부모가 사는 제주도로 내려가 귤 농사를 하며 새롭게 살려고 결심하던 차였다. 남자의 다정다감한 풍모에도 끌렸지만, 김 씨의 마음을 무엇보다 끌어당긴 것은 ‘과수원’이란 단어였다. 나무를 키우며 사는 삶은 김 씨의 오랜 소원이기도 했다.
둘은 여생을 함께 하자고 언약을 하고 제주도 서귀포시 안덕면에 둥지를 틀었다.
“남편이 손에 물을 묻히지 않게 하겠다고 했지만, 제주도에 오자마자 그게 이뤄질 수 없는 약속임을 알았습니다. 물론 남편은 절대 힘든 일을 하지 말라고 하지만 어디 그렇게 되나요. 내려와서 과수원 정리를 하면서 돌을 옮기다가 허리 디스크에 걸리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남편이 참 잘해주니 힘든 것들을 잘 넘깁니다.”
남편은 귤 농장에 ‘복희네농장’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김 씨는 드디어 뭔가 이룰 수 있는 목표가 생겼다는 것이 너무 기뻤다.

농사를 잘 하고 시부모를 잘 모시는 등의 모범적 삶을 인정받아 지난해 지역에서 받은 상패들.

● 취미로 시작한 조경식물 사업

4000평의 귤 밭을 가꾸는 일은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꽃과 열매솎기, 가지치기, 수확 등의 일정이 365일 동안 쳇바퀴처럼 돌아갔다.
열심히 농사일을 하는 와중에도 예쁜 농원을 만들고 싶은 김 씨의 꿈은 지치지 않았다. 어렸을 때부터 꽃과 식물을 좋아한 그는 5일장에 가면 다른 가게에 가지 않고 식물을 파는 곳에만 가서 시간을 보냈다. 꽃나무들은 생각보다 비쌌다. 그가 식물 가게에서 웅크리고 앉으면 남편이 비싼 식물을 사서 키우는 것은 낭비라며 자꾸 잡아끌었다.
그런 속에서도 그는 한라봉, 레드향, 천혜향, 황금향 등의 귤 묘목들과 레몬나무, 낑깡나무, 금목서, 은목서, 동백나무 등 수십 종류의 정원수 묘목을 사와 키우기 시작했다. 과일 밭에 사계절 꽃향기가 퍼지기 시작했다. 김 씨의 기분도 덩달아 좋아졌다. 주변에서 “시골에 왔으면 농사나 잘 하지 쓸데없는데 시간을 팔고 있다”는 소리도 들려왔다.
식물들이 너무 많아지자 김 씨는 작년 10월부터 남는 식물을 인터넷에 올려 팔았다. 그런데 너무 잘 팔렸다. 이유를 알아보니, 제주도에선 주택이나 숙박시설 등을 지어 허가를 받으려면 나무를 얼마 심어야 한다는 규정이 있었다. 인근에서 건설공사들이 많이 벌어지는데, 조경수나 꽃나무를 판매하는 곳이 주변에 없었던 것이다.
처음에 그럴 의도가 아니었지만, 뜻밖에 취미로 시작한 식물 재배에서 가능성을 발견한 김 씨는 이제는 조경수 사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귤을 판매한 돈보다 조경 식물을 판 수입이 더 많아지자, 이젠 남편도 아내를 적극 응원하기 시작했다. 주변에서 이제는 “초보농부가 머리가 좋다”는 말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돈을 버는 것도 물론 중요합니다. 그런데 저는 정말 식물을 가꾸고 키우는 것을 좋아하거든요. 그리고 제가 사는 제주도 여기저기서 이 손으로 키운 식물이 뿌리를 내리고 푸른 숲으로 성장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렇게 기분이 좋을 수가 없습니다. 제가 구슬땀을 흘리며 키운 식물이 아름다운 정원도 만들고, 지구도 살리고 있으니 얼마나 행복한 일입니까.”

지난해 11월 농장에서 재배한 레몬나무를 다듬고 있는 김 씨. 식물 키우기는 그가 가장 좋아하는 취미이다.

● 제주도에 남길 삶의 흔적

조경 식물 사업을 하면서도 본업인 귤 농사도 놓치지 않고 있다. 감귤 재배 방법도 열심히 배워 지난해엔 당도 16브릭스의 고품질 감귤을 생산하는데 성공했다. 제주도에서 나는 평균 귤 당도보다 2브릭스나 높았는데, 이런 우수한 감귤을 생산하는 농장은 많지 않다.
이런 노력을 인정받아 김 씨는 올해 ‘장한 안덕면민상’ ‘서귀포시 시장상’을 잇따라 수상했다. 하지만 아직 갈 길이 멀다. 다음 목표는 제주에서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우수한 감귤을 생산하는 것이다.
과원 주변에 아름다운 정원수들을 심고, 제주도 전통의 아담한 민박집을 갖춘 ‘복희네종합테마농장’을 만들려면 아직 할 일이 태산이다. 자연의 아름다움을 찾는 사람들에게 오아시스처럼 구원을 안겨주는 농장이 그가 그리는 꿈이다.
“제가 자꾸 일을 만들어서 남편도 덩달아 고생이죠. 그런데 어쩔 수가 없어요. 내년에는 더 바빠질 거니까요.”
김 씨는 친구도 만나지 않고, 놀려 다니지도 않으며 꿈을 실현하는데 모든 힘을 쏟고 있다. 남들이 버린 가구나 가전제품을 가져다 쓰고, 옷도 거의 사지 않는다. 그렇게 아낀 돈은 모두 장비와 식물을 사는데 쓴다.
“예전에 삶의 목표가 없을 때는 ‘사람이 잘 먹고 즐기면서 살아야지’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하지만 이젠 꿈이 있습니다. 제가 살아온 삶의 족적을 제주도에 남기고 죽는 것이 목표입니다. 언젠가 통일도 되겠죠. 그때가 되면 북한 사람들도 제주도로 놀려올 겁니다. 그들이 산방산 아래의 아름다운 농장이 남포에서 온 김복희 씨가 갈 수 없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품고 평생을 바쳐 가꾼 것이라고 알아줬으면 좋겠습니다.”
그 꿈을 위해 오늘도 그는 한 그루의 나무를 심는다.

동아일보·남북하나재단 공동기획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Copyright © 동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