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안84를 '대상84'로 이끈 다큐적 진정성

아이즈 ize 이설(칼럼니스트) 2024. 1. 8. 09:48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아이즈 ize 이설(칼럼니스트)

사진=MBC

2023년 말 방송가의 최대 화제는 웹툰작가 기안84의 연예대상 수상이었다. 기안84는 지난 30일 열린 'MBC 연예대상'에서 최고상인 대상을 거머쥐었다. 개그맨이나 전문 MC가 아닌, 非연예인으로는 처음 있는 일. 방송가에서 서서히 일고 있는 세대교체의 시작을 알리는 듯했다.

4050 세대가 기억하듯이 연말연시에는 지상파 3사의 연예대상, 연기대상이 적지 않은 관심거리였다. 한해를 마감하면서 수많은 드라마와 예능 프로그램 속에서 누가 가장 큰 활약을 했는지 방송국마다 최고의 '대표 선수'를 뽑아 시상하는 모습이 제법 흥미진진했다. 그때 뽑히는 대상 수상자야말로 명실상부한 최고의 스타로 공인됐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연기대상, 연예대상에 대한 시청자들의 관심이 시큰둥해졌다. 요즘 MZ세대들이 TV를 보지 않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중장년 시청자들도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인다. 이 시상식이란 게 대개 자화자찬식이고, 공동수상을 남발하며, 어느 정도 예상이 되는 '공로상'의 성격이 짙기 때문이다. 당연히 누가 수상할지 두근두근한 긴장감이 없다.

또한 최근엔 이런 시상식 대신 찾아봐야 할 프로그램들이 너무 많다. 일주일마다 어김없이 업데이트되는 넷플릭스 화제작을 몰아봐야 하고, 유튜브와 숏폼의 인기 동영상도 체크해야 한다. 처음엔 '킬링 타임'용으로 시작했다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추천되는 알고리즘에 압도돼 도낏자루 썩는 줄 모르고 빠져들게 된다.

'태어난 김에 세계일주' 시즌3, 사진=MBC

사정이 이러하니 지난해 연말 시상식도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할 게 뻔했다. 그러나 기안84의 수상이 의외성에 불을 지폈다. 드디어 방송국 시상식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아시다시피 기안84는 웹툰 작가다. 2008년 웹툰 '노병가'로 데뷔해 2011년 '패션왕', 2014년 '복학왕' 등을 인기리에 연재하면서 명성을 얻었다. 학창시절이나 군대 생활 등 자신의 실제 경험에 근거해 현 세태를 솔직하게 묘사한 점이 많은 공감을 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다가 그가 방송과 인연을 맺은 건 '패션왕'이 알려질 즈음이다. 웹툰작가라는 희소성을 바탕으로 예능 프로그램에 종종 얼굴을 내비쳤다. 그런데 역시 방송에서도 그의 웹툰 못지않게 소탈하고 솔직하며 엉뚱한 언행으로 눈길을 끌었다.

인기 예능 MBC '나 혼자 산다'와 인연을 맺은 건 2016년이다. '복학왕'을 장기 연재할 때다. 늘 외롭게 마감 시간과 싸워야 하는 무미건조한 웹툰 작가로서의 일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며 본격적으로 관심을 끌기 시작했다. 처음엔 미풍에 지나지 않을까 생각했다. 다른 배우나 가수 출신의 출연자에 비해서는 너무 평범해 보였기 때문이다. 시청자들이 TV에서 솔직함을 좋아한다지만 그래도 재미가 있으려면 어느 정도의 판타지가 필요한 법. 그러나 기안84의 일상엔 환상이나 허세 따윈 없었다. 그저 본업인 작가로서의 애환, 30∼40대 대한민국 남자로서의 고민이 대학 하숙생 같은 싱글 라이프 속에 너무나 진솔하게 드러났다. 그가 여행이나 캠핑을 가서 실수를 연발하는 모습, 죽을 힘을 다해 뛰다가 결국 길바닥에 그대로 쓰러져 구토하는 장면 등은 지금껏 보지 못한 '리얼리티'였다. 웃음이나 감동을 위한 꾸밈은 전혀 없었고, 42.195㎞ 마라톤을 완주하는 데에서는 뜨거운 진심과 감동이 느껴졌다. 비록 예능에 몸담고 있지만 그의 일상은 차라리 다큐멘터리 '인간극장'에 가까웠다.

기안84가 '대상84'로 우뚝 선 배경에는 바로 이런 다큐멘터리의 힘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예능계의 대부로 불리는 이경규를 몇 년 전에 만난 적이 있다. 새로 론칭하는 예능 프로그램을 소개하는 자리였다. 그는 오랜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자신감과 함께 특유의 넉살을 보여줬다. 변함없이 호통을 치며 말했지만 선을 넘지 않았고 빈말은 없었다. 그에게 "예능의 궁극적인 형태는 무엇일까"라고 묻자, 주저 없이 "예능의 미래는 다큐멘터리"라고 답했다. 예능은 본디 웃음을 유발하는 것에서 시작하지만 그렇게 발전하고 진화하다 보면 결국 다큐멘터리에 이르게 된다는 뜻이었다. 

'나 혼자 산다', 사진=MBC

2022년 말부터 방송을 탄 '태어난 김에 세계일주'는 기안84의 다큐멘터리적 진정성을 극대화한 프로그램이다. 계획도 없이 친구들과 즉흥적으로 떠나는 여행이 콘셉트다. 1편에선 지구 반대편의 머나먼 나라 페루, 시리즈 2편에선 인도를 방문했다. 페루에선 그 흔한 호텔 예약도 하지 않아 현지에서 모든 것을 이 대신 잇몸으로 해결하는 모습이 흥미진진했고,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인도 갠지스강에선 정말 발가벗고 강에 뛰어드는 호기를 선보여 신선했다. 갠지스강은 다큐멘터리에서 한 번쯤 접한, 호기심은 있었으나 선뜻 용기가 나지 않았던 미지의 공간. 하지만 기안84는 이까짓 것쯤이야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현지에 동화됐다. 아프리카 남동부 미지의 섬 마다가스카르를 다녀온 3편도 비슷했다. 그야말로 극사실주의. 인기 여행 유튜버 빠니보틀이나 곽튜브가 수많은 여행 콘텐츠 중에서도 최고로 인정받는 이유는 그들이 '오지'에 가서 극한의 체험을 하기 때문인데, 기안84는 유튜브를 방불케 하는 솔직함과 즉흥성으로 시청자를 놀라게 했다. 그러니 10년 넘게 연예대상 단골이었던 유재석과 신동엽, 그리고 최근 가장 인기가 높은 MC인 전현무가 연예대상 후보로 그친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으리라.

연예대상의 감격과 흥분을 조금 가라앉힌 지난 2일 기안84는 한 유튜브 채널을 통해 방송 활동에 대한 소신을 한마디로 정리했다. 그는 "요즘은 너무 좋다. 과분할 정도로 해외여행을 다니고 맛있는 것을 먹고, 복 받은 삶이라고 생각해서 버릇 나빠지지 않고 타성에 젖지 않으려고 노력한다"고 말했다. 대상을 받았지만 초심을 잃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읽힌다. 그의 다큐멘터리 같은 진정성을 계속 볼 수 있었으면 한다. 그래서 요행과 꾸밈보다 노력과 솔직함이 더욱 크게 평가받는 문화가 도래하길 빈다. 

Copyright © ize & iz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