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몰자 묘지 위 용서와 화해를 위한 노력
[세계의 창] 하네스 모슬러(강미노) l 독일 뒤스부르크 에센대 정치학과 교수
최근 영화 ‘서울의 봄’이 개봉되어서 그런지, 옛 신문을 보다가 우연히 의미심장한 기사가 눈에 띄었다. 12·12 군사쿠데타 때 반란군과, 반란에 맞선 헌병대의 죽음에 대한 보도였다. 젊은 두 사람은 어쩌다가 서로 적대하는 진영에 편입이 되어 유명을 달리한 뒤, 서울 국립현충원의 불과 5m 떨어진 곳에 나란히 안장되었다. 그리고 16년 뒤 이 묘역에서 만난 유족들은 두 망자 모두 신군부 세력의 희생자라며 서로 위로했다는 내용이었다. 현충원은 한국 현대사의 역동성과 모순성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기억 공간이기 때문에 종종 이념의 전장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1995년 한겨레 기사 ‘‘적 아닌 적’ 12·12 유족 국립묘지 기구한 만남’에 실린 위 이야기는 오히려 용서와 화해의 방법과 가능성을 말해준다.
2차 대전 후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말을 새겨들은 독일에서도 (국립)묘지를 용서와 화해의 매개로 주목했다. 독일 전몰자 묘지관리 연맹(Volksbund Deutsche Kriegsgräberfürsorge)이라는 비정부기구의 주도로 독일은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독일군 전몰자 묘지를 체계적으로 조성하고 관리하기 시작했다. 첫걸음은 1950년대 초 연맹의 후원으로 벨기에에 조성된 독일 전몰자 묘지에서 독일 청년을 비롯한 각국 젊은이들이 모여 같이 묘지를 관리하는 봉사활동으로 시작되었다. 구상 시에도 나오는 “은원(恩怨: 은혜와 원한)의 무덤”을 용서와 화해의 매개공간으로 삼아, 자국과 타국의 전쟁과 국가폭력 희생자를 더불어 기억하며 추모함으로써 평화의 중요성을 심어주는 노력이다. 연맹이 활동을 시작하며 만든 “무덤 위의 화해, 평화를 위한 봉사”(Versöhnung über Gräbern, Arbeit für den Frieden) 표어는 오늘날까지 사용되고 있다.
분명한 전쟁범죄 국가인 독일과 달리 남한과 북한은 아직 전쟁이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상황이 훨씬 복잡하다. 그럼에도 일찌감치 김영삼 정부 시기인 1996년에 이른바 적군묘지(전 북한군·중공군 묘지, 현 북한군 묘지)를 조성해 또 하나의 잠재적인 용서와 화해의 매개공간을 마련했다. 조성 초기부터 북한군, 남파간첩과 중국군이 안장된 이곳에서 군승법사가 위령제를 지냈다. 물론 당시 묘지 조성은 제네바협정 추가의정서와 인도주의에 따른 것이었고, 파주 외곽 군부대 야산에 건설한 탓에 오랫동안 일반인들에게 전혀 알려지지도 않았다. 또 출입이 통제되고 있어 접근하기 어려웠다. 김대중 정부 시기인 2000년에는 묘역을 확장하며 이름을 ‘북한군, 중국군 묘지’로 바꾸고 개방도 했다. 이명박 정부 시절에는 묘역을 찾는 중국 추모객들이 늘면서 ‘관광지’로 만들기 위해 5억원 예산으로 묘역을 정비했다.
박근혜 정부 때 화해의 제스처로 안장된 중국군 유해가 모두 고국으로 송환됨에 따라 북한이 여태껏 돌려받기를 거부한 북한군 유해만 남게 되어 묘지는 다시 조용해졌다. 문재인 정부 때는 용서와 화해를 위한 노력의 하나로 묘역을 평화공원으로 조성할 계획이 세워졌지만 결국 무산되고 말았다. 즉, 북한군 묘지는 남한과 북한에서 모두 외면받고 있어 용서와 화해를 매개하는 장소로서의 잠재력을 아직껏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28년 전에 북한군 묘지가 조성된 날부터 현재까지 위령제, 미사 등의 방식으로 일부 종교·시민단체와 개인들의 자발적인 추모 활동은 이어지고 있다.
현재 남북 당국의 관계가 “적대적인 두 국가 관계”로 규정되는 상황에서 남과 북이 ‘적이 아닌 적’이 되기는 불가능해 보여도, 용서와 화해를 위한 노력은 호시우행(虎視牛行: 호랑이 눈으로 날카롭게 살피고 황소처럼 우직하게 걸어가기)의 자세로 계속되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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