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선 時代’ 본격 도래… HD현대 3세 경영, 9부 능선 넘었다
● 부회장 승진, ‘권오갑-정기선’ 투톱 체제
● 사장 임명 2년 만에 ‘차기 총수’ 이미지 각인
● 3년 연속 CES 참석, 그룹 미래 전략 ‘퓨처 빌더’ 진두지휘
● HD현대 지분율 끌어올리기는 숙제
이번 인사를 두고 크게 두 가지 해석이 나온다. 하나는 HD현대그룹의 3세 경영에 한층 속도가 붙으리라는 것이다. 정 부회장이 자산 규모 81조 원, 재계 9위 그룹의 차기 총수로서 입지를 공고히 다지고 있다는 사실을 대내외에 재확인한 셈이기 때문이다. 공정거래위원회가 지정하는 HD현대그룹의 동일인은 아직 정몽준 이사장이다.
30여 년간 이어온 전문경영인 체제가 막을 내리고 오너 경영으로 돌아간다는 의미도 있다. HD현대그룹은 국내 재계에서 드물게 소유와 경영이 분리된 기업으로 평가받아 왔다. HD현대 최대주주인 정 이사장이 1988년 정계에 입문, 경영에서 손을 떼며 약 35년간 전문경영인 체제로 운영돼 왔다. 현재는 2019년 말 회장으로 승진한 권오갑 HD현대 대표가 전면에서 그룹을 이끌고 있다.
변화의 조짐이 감지된다. 정 부회장의 승진이 가삼현 HD한국조선해양 대표(부회장), 한영석 HD현대중공업 대표(부회장)의 용퇴와 맞물리며 '권오갑-정기선' 투톱 체제가 갖춰진 것이다. 그룹에서 정 부회장보다 직위가 높은 사람은 권 회장이 유일하다. 권 회장은 정 이사장의 두터운 신임을 바탕으로 그룹이 정 부회장을 중심으로 재편되는 데 앞장서고 있다.
‘정기선의 HD현대그룹'이 머지않았다는 얘기가 나온다. 이번 인사를 기점으로 경영권 이양 작업이 막바지에 접어들며 '9부 능선'을 넘었다는 것이다. 한 걸음만 더 가면 그룹 승계에 마침표를 찍을 수 있다. 마지막 과제는 지주사 HD현대 지분 확보를 통한 그룹 지배력 강화다.
이재용·최태원·정의선과 어깨 나란히
이번 인사에서 기존 부회장들은 모두 용퇴를 결정하며 '3세 경영'에 힘을 보탰다. 2021년 말 나란히 부회장에 선임된 가삼현 대표와 한영석 대표가 일선에서 한발 물러나 자문역을 맡기로 했다. 그룹 내 유일한 부회장이 된 정 부회장의 경영 보폭이 더 커지고 입김도 세질 것으로 전망된다. '정기선 시대'가 본격 도래했다고 봐도 무리가 아니다.
정몽준 이사장의 장남인 정 부회장은 오래전부터 그룹 후계자로 거론돼 왔지만 실제 경영 전면에 나선 지는 오래되지 않았다. 2021년 10월 사장 승진과 동시에 그룹 지주사인 HD현대(당시 현대중공업지주)와 조선 부문 중간지주사 HD한국조선해양(당시 한국조선해양) 대표에 선임되며 행보를 본격화하기 시작했다.
정 부회장은 이 2년의 시간을 허투루 보내지 않았다. 정치인이자 축구 행정가로 이름을 떨친 부친의 그늘에서 벗어나 자신의 존재감을 각인하며 HD현대그룹의 차기 총수로 거듭났다. 최근엔 HD현대그룹을 대표해 윤석열 대통령의 해외 순방에 경제사절단으로 참여하는 등 대외 행보를 확대하고 있다. 2023년 1월 아랍에미리트를 시작으로 4월 미국, 6월 베트남, 10월 사우디아라비아를 잇달아 방문했다. 그룹의 해외 사업을 총괄하는 만큼 현지 정부·기업 관계자와 만나 협력을 논의하고 미래 먹거리를 발굴하는 모습이다.
경제사절단은 통상 최종 결정권을 쥔 그룹 오너나 고위 경영진이 주로 참가한다. 투자 등 사업 관련 논의가 주축이어서 때론 현지에서 결정까지 내려야 하기 때문이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과 최태원 SK그룹 회장,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 등이 '단골 멤버'임을 보면 알 수 있다. 정 부회장은 이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HD현대그룹 대표자로 인정받고 있다.
"다가올 50년, 과거 50년과 다르게 성장 하겠다"
HD현대그룹은 2022년 처음으로 CES에 참가해 전시관을 꾸렸다. 정 부회장 개인뿐 아니라 회사로서도 첫 도전이었던 셈이다. 전자·IT기업이 혁신기술을 뽐내는 CES에 배를 만드는 회사가 부스를 꾸린 건 전례 없던 일이다. 정 부회장은 프레스 콘퍼런스에서 HD현대그룹의 미래 비전으로 '퓨처 빌더(Future Builder)'를 제시했다.
2022년은 HD현대그룹이 창사 50주년을 맞은 해다. 정 부회장은 이 자리에서 "현대중공업그룹은 지난 50년 동안 세계 1위 십 빌더(Ship Builder)로 성장했다"며 "다가올 50년은 세계 최고의 퓨처 빌더(미래의 개척자)가 돼 더 지속 가능하고 똑똑하며 포용적인, 지금과는 다른 새로운 성장을 만들어가겠다"고 말했다.
2023년엔 한발 더 나아갔다. 그룹의 미래 전략으로 바다의 근본적 대전환, '오션 트랜스포메이션(Ocean Transformation)'을 꺼내 들었다. 글로벌 에너지 위기와 기후변화 등 인류가 직면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바다에 대한 관점과 활용 방식을 근본적으로 전환하겠다는 개념이다. 그는 "바다가 품고 있는 무한한 잠재력을 활용해 인류의 지속 가능한 미래를 구현하겠다"고 공언했다.
이는 HD현대의 기술력을 바탕으로 수소 등 친환경 에너지의 생산부터 운송, 활용까지 '전 단계 밸류체인' 구축에 나서겠다는 의미로 풀이됐다. 직전 해 밝힌 '퓨처 빌더'로서의 역할과 방향성을 구체화한 것이다. 그리고 정 부회장 자신이 이 같은 그룹의 미래 구상을 직접 진두지휘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정 부회장은 2024년에도 CES를 찾아 기조연설자로 나선다. 전시회를 주관하는 미국소비자기술협회(CTA)로부터 초청받았다. CTA는 "‘CES 2024'에 정 부회장을 기조연설자로 초청했다"며 "HD현대그룹이 미래를 내다보는 획기적 혁신으로 글로벌 지속가능성 이니셔티브에 크게 기여했다"고 밝혔다.
기조연설은 전 세계의 눈이 집중되는 CES의 하이라이트다. 삼성전자, LG전자 등 톱티어 회사의 고위 경영진에게만 주어진 흔치 않은 기회다. 2019년엔 박일평 LG전자 최고기술책임자(CTO)가, 2022년엔 한종희 삼성전자 부회장이 각각 '더 나은 삶을 위한 인공지능' '미래를 위한 동행'을 주제로 각각 기조연설을 했다. 이러한 무대에서 정 부회장은 지속 가능한 미래를 만들어가기 위해 기술을 활용하는 '기술 우선(Tech-First)' 전략을 공유할 예정이다.
증여 + IPO·배당 확대로 지분율 높일 듯
재계에선 이를 곧이곧대로 믿지 않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지주사 체제를 갖춰 후계를 준비하려는 사전 포석으로 여겼다. 당시 HD현대그룹은 현대중공업 → 현대삼호중공업 → 현대미포조선 → 현대중공업으로 이어지는 순환출자 형태를 띠고 있었다. 지주사 전환은 순환출자 해소는 물론 오너 일가의 승계에도 유리한 선택지로 꼽혔다. 지주사 지분만 확보하면 그룹 전반에 대한 지배력을 갖추게 되기 때문이다.
HD현대그룹은 현대중공업 분할 후 현대로보틱스를 지주사로 올리고 삼호중공업 분할·합병 등 지주사 행위제한 요건 해소에 나서 2018년 지주사 체제 전환을 완료했다. 이 과정에서 정 이사장의 지분율이 높아졌다. 당초 현대중공업 지분 10.15%를 갖고 있었지만 인적분할과 현대로보틱스 유증 참여 등을 거치며 25.80%가 됐다.
정 부회장이 HD현대 지분을 보유하게 된 때도 이 시기다. 2018년 3월 KCC로부터 83만1000주를 블록딜로 사들이며 정 이사장, 국민연금에 이은 3대주주(5.10%)가 됐다. 이전 보유량은 97주로 사실상 없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당시 취득자금 3540억 원은 정 이사장으로부터 증여받은 3040억 원에 대출받은 500억 원을 더해 마련했다.
이후 HD현대그룹은 2019년 현대중공업을 분할해 조선 부문 중간지주사 한국조선해양을 세우고 2021년 건설기계 부문 중간지주사 현대제뉴인(현 HD현대사이트솔루션)을 출범하며 현재 모습을 갖추게 됐다. 지배구조는 오너 일가 → HD현대 → HD한국조선해양·HD현대사이트솔루션→ 사업회사로 이어진다.
재계에선 정 부회장의 숙제가 HD현대 지분 추가 확보라고 본다. 경영권 확보에 더해 지분율에 근거한 지배력이 보장돼야 안정적 회사 운영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오너가 경영권을 지킬 수 있는 수준의 지분을 보유하지 못하면 외부 공격에도 취약해진다. 2023년 9월 말 기준 정 부회장의 HD현대 지분율은 5.26%다.
정 부회장은 보유하고 있는 계열사 주식이 많지 않아 현금 융통에 한계가 있다. 이를 고려할 때 정 부회장이 지분을 매집하기보다는 정 이사장의 보유 지분을 증여받을 것이 유력하다. 하지만 이 역시 증여세 부담이 만만찮아 자금 마련에 대한 고민이 상당할 것으로 보인다. 이에 업계에서는 HD현대가 마린솔루션(옛 현대글로벌서비스), 오일뱅크 등 계열사 기업공개를 통해 투자를 유치하고 배당을 늘려 자금을 마련하는 방안이 거론되고 있다.
유수진 연합인포맥스 기자 sjyoo@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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