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가의 시선은 고고학자와 어떻게 다른가…강운구, 8개국 암각화 신작

노형석 기자 2024. 1. 8. 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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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운구 전 ‘암각화 또는 사진’
2018년 카자흐스탄 사이말루 타시에서 찍은 강운구 작가의 암각화.

항상 끈질기게 입증해야 한다. 자기의 시선으로 투과시킨 세상의 이미지들은 예술이라는 것을.

사진 찍는 작가들은 고단하다. 그들의 작업 자체가 차별적인 예술가의 산물임을 드러내어야 하는 존재증명의 숙명을 피할 수 없다. 19세기 초 프랑스의 다게르가 발명한 이래 빛으로 찍는 그림이라는 뜻을 지닌 ‘포토그래프’로 서구에서 이름 붙여진 사진은 사실적 재현 측면에서 회화를 압도했다. 하지만, 그게 맹점이었다. 사진기는 누구나 갖고 다니며 찍을 수 있다. 21세기 디지털 혁명의 산물인 폰카는 물 쓰듯 사진 이미지를 세상에 범람시키고 있다.

지금 시대 사진가들의 영역은 되레 훨씬 좁아진 양상이다. 사진가들은 이미지가 등장하는 어떤 영역이든 뛰어들어 자신만의 시선을 투영하며 정체성을 드러내려 한다. 이런 시도들이 대개 성공했는지는 미지수지만.

지금 서울 북촌의 삼청동 ‘뮤지엄한미 삼청’에 차린 원로 다큐사진가 강운구(83)씨의 근작전 ‘암각화 또는 사진’은 21세기 사진가들의 존재론적인 고투와 그 결과물에 대한 성찰을 일으키는 전시마당이다. 이 전시의 정체는 간단히 말하면, 강 작가가 울산 반구대 암각화를 처음 보고 품게 된 물음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2017년부터 중앙아시아 파미르고원, 톈산산맥, 알타이산맥 등 8개국 30여곳을 일일이 돌면서 사진으로 담은 160여 점의 각양각색 암각화 이미지들을 전시장마다 구성을 달리하면서 내걸어 놓은 것이다.

2019년 울산 반구대에서 찍은 암각화의 고래무리 부분.

작가는 50여년 전 울산 반구대 암각화의 바위 면에 새겨진 고래 떼들의 이미지를 보면서 왜 고래들이 서 있는 모습으로 등장할까란 의문을 갖게 됐고 거기서부터 이번 전시의 실마리가 풀려나왔다고 한다. 지난 수년간 러시아와 중국, 중앙아시아 주요 나라들을 돌았다. 이 나라들에 걸친 파미르고원, 톈산산맥, 알타이산맥 등 각지의 고대 암각화 유적지를 다니면서 찍은 사진들이 반구대와 천전리 암각화를 소개한 사진들과 함께 전시되고 있다.

지하와 1층 전시장에 선보이는 사진들은 다양한 윤곽선을 한 사람들의 무리와 활 등을 당기는 사냥의 몸짓, 사슴, 표범 등이 동물, 큰 나무 등의 식물, 산과 태양, 달 등의 여러 기하학적 도상들을 보여준다. 작가는 여기에 현지의 광야나 설산, 안개 낀 산맥의 이미지 등 암각화의 배경으로 등장하는 대자연과 현지 주민과 어린이 같은 인간의 풍경들을 담은 사진들을 섞어 배치해놓았다.

관객마다 보는 시선은 주관적으로 다를 수 있다. 하지만, 촬영 지역별로 분류한 출품작들은 암각화하면 떠올리는 일반적인 이미지들처럼 옛적 사람과 자연이 공존하며 어우러졌던 여러 전형적인 풍경과 움직임의 모습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도상의 전형성 때문에 지난 수십여년간 국내외 고고역사학계나 인류학계 등에서 학자들이 답사하면서 숱하게 찍고 분석해서 연구서나 보고서 등으로 공개해온 암각화 사진 혹은 재현그림들과 견주어 도드라진 차이점을 발견하기란 쉽지 않다.

강운구 작가는 1982~1987년 경주 남산 마애불들을 대상으로 새김의 윤곽이 가장 뚜렷하게 드러나는 시간대를 찾는 지난한 노력 끝에 낱낱이 세부를 포착해낸 ‘남산’ 연작을 발표해 한국 다큐사진사에 기념비를 세운 주역이다. 이런 경험들로 쌓은 출중한 앵글의 감각으로 빛이 암각화의 돌올한 조형적 윤곽을 적실하게 드러내는 때를 포착해 부각시키거나 주위 자연의 정경과 인상적인 조화를 이루는 순간을 잡아낸 부분들이 엿보인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차별화되는 사진 자체의 맥락이 무엇인지는 여전히 의문으로 남는다. 울산 반구대 암벽에 새겨진 무리 속 고래의 이미지가 왜 서 있는 모습인지 애초 의문을 가졌다는 작가의 말도 기실 배 위에서 본 수면 아래 고래의 모습을 담은 것이라는 학계의 상식적 추론보다 설득력이 약해 보인다.

결국 중요한 것은 시선과 관점, 그리고 분석과 상상력의 차이일 것이다. 고고학자나 인류학자, 미술사학자가 고대인의 미의식, 생활상을 탐구하면서 포착한 암각화의 이미지들과 사진가가 특유의 눈썰미로 담은 미학적 맥락의 암각화 사진들은 어떤 차이점을 지니고 있을까. 또 현대 사진작가들의 예술가적 정체성은 어떤 성격일까. 이런 물음들을 곱씹어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이 암각화 전시의 의미는 충분해 보인다. 3월17일까지.

글 ·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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