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능에서 전례 없는 판박이 지문… 출제진·일타강사 거래 의혹

김연주 기자 2024. 1. 8. 0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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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출제 수능 영어 23번 논란

수능이나 수능 모의 평가 직후 특정 학원 또는 강사의 문제집과 유사한 내용이 출제됐다는 논란은 종종 불거졌다. 그때마다 교육 당국은 “완전히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라며 넘겼다. 학원과 강사들은 “적중률이 높다는 증거” “족집게”라고 홍보에 활용했다. 그러나 7일 드러난 것처럼 수능 지문과 강사 문제집이 판박이인 경우는 전례를 찾기 힘들다. 교육부가 경찰 수사를 처음 의뢰한 것도 ‘우연’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최근 ‘EBS 교재’는 수능 연계율이 50%에 달한다. 일선 학원이나 강사들도 EBS 교재를 변형한 모의고사 문제를 많이 낸다. 그러다 보니 EBS 교재와 유사한 문제가 수능에 출제되거나 사설 문제집에 실리는 경우는 적지 않다. 그러나 2023학년도 영어 23번 지문은 EBS 교재에 나온 적이 없다. 특정 강사의 수능 직전 문제집 지문이 그대로 수능에 나온 전례도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이 문제 정답률은 61%(메가스터디 기준)로 고난도는 아니었지만, 지문을 본 적이 있는 수험생은 해석 시간을 절약할 수 있었다. 그해 수험생들은 “EBS 교재도 아닌 일타 강사 문제집과 수능 지문이 어떻게 똑같을 수 있느냐”고 했었다.

그래픽=송윤혜

지난 2016년 수능 모의 평가 국어에선 유명 강사가 학원 수강생들에게 알려준 내용이 그대로 출제된 적이 있었다. 해당 강사 수업을 들은 학생에게 매우 유리했던 것이다. 당시 경찰 수사에 따르면, 국어 강사가 수능 모의 평가 검토위원이던 현직 교사에게 돈을 건네고 출제 문제를 넘겨받은 것으로 조사됐다. 학원 강사와 수능 모의 평가 출제진인 현직 교사와의 유착 관계가 드러나 두 사람 모두 유죄 판결을 받았다. 교육계 인사는 “수능을 출제할 만한 현직 교사의 풀이 넓지는 않다”며 “학원과 수능 출제진, 현직 교사가 부적절한 관계를 맺었을 가능성을 배제하긴 어렵다”고 했다. 2023학년 수능 영어 23번 논란도 결국 강사와 수능 출제진 간 유착 의혹을 밝히는 것이 수사와 감사의 핵심으로 보인다.

수능 영어 지문 논란과 관련, 평가원 관계자는 “영어 지문은 해외 원서에서 가져올 때가 많아 우연의 일치로 겹치는 경우가 과거에도 있었다”고 했다. 이어 “수능 출제진은 문제를 내기 앞서 시중 문제집을 대부분 살펴보지만 강사 개인이 수능 직전에 파는 문제집은 다 확인하기 어렵다”고 했다. 강사가 소속된 메가스터디 측은 “수능 영어 지문이 문제집과 겹치는 일은 출제 특성상 종종 발생하기 때문에 문제될 것이 없다고 본다”고 했다. 교육부 관계자는 “지문은 같지만 문제 유형이 달랐다”며 “해당 문제를 ‘전부 정답’ 처리하면 더 큰 혼란이 발생할 수 있었다”고 했다. 그런데 작년 ‘사교육 카르텔’ 제보를 받으면서 이 논란이 다시 불거지자 의혹 해소를 위해 경찰에 고발했다는 것이다.

그래픽=정인성

현 정부 들어 진행한 ‘사교육 카르텔’ 조사에선 수능을 출제한 현직 교사들과 대형 입시 학원, 일타 강사들이 ‘문항 거래’를 한 사실이 드러났다. 2023학년도까지 수능 고득점을 받으려면 초고난도 문항인 ‘킬러 문항’을 많이 풀어봐야 했다. 이 때문에 수험생들은 킬러 문항을 다양하게 제공하는 입시 학원에 비싼 수강료를 내고 다니곤 했다. 그런데 학원에 ‘킬러 문항’을 만들어 판 사람들 중 현직 교사가 다수 적발된 것이다. 특히 이 중 상당수는 수능이나 모의고사 출제진으로 참여한 경력이 있었다. 학원·강사로부터 최대 5억원까지 받은 교사도 나왔다.

수능 출제진의 경우 ‘최근 3년간 학원 문제를 출제한 적 없다’는 서약서를 써야 한다. 그러나 이를 어기고 수능 출제에 참여한 교사들도 적발됐다. 수능 출제 경력으로 학원에서 더 많은 돈을 받은 것이다. 교육부는 작년 9월 이런 교사 24명을 경찰에 고발·수사 의뢰했다. 경찰은 지난 10월 교사 111명(79건)을 수사했고, 이 중 64명을 검찰에 송치했다. 경찰은 수능 모의고사 문항을 판매한 대가로 대형 입시 학원이나 일타 강사들에게 금품 수수 의혹을 받는 전·현직 교사가 총 700여 명에 이른다고 했었다.

한 입시 전문가는 “학원과 강사 몸값을 올리는 것이 ‘수능 적중 문제’”라면서 “수능 문제와 학원 모의고사가 너무 유사하게 나오는 것은 철저하게 조사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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