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로 할 수 없는 마음 표현하는 몸짓… 대사 없이도 관객들이 운다

이태훈 기자 2024. 1. 8.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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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로 극장에 ‘피지컬 시어터’ 2편
‘네이처 오브 포겟팅’과 ‘템플’
치매를 앓는 남자의 기억들을 무대 위에 재생하는 ‘네이처 오브 포겟팅’ 속 자전거를 타는 꿈 장면(위 사진)과 자폐를 딛고 동물학자가 된 템플 그렌딘의 일대기 ‘템플’에서 사춘기의 신경 발작을 표현한 장면(아래 사진). /연극열전·공연배달서비스 간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러 가는 길, 심장이 먼저 쿵쿵 뛰고 호흡은 가빠진다. 애끓는 슬픔과 고통에 부닥치면 몸 여기저기가 조여들고 울음이 터지기 전 어깨가 먼저 들썩인다. 감정이 요동칠 때 저도 모르게 반응하는 것이 사람의 신체. ‘피지컬 시어터(Physical Theater)’는 바로 그 몸짓언어를 음악, 음향, 조명과 같은 무대 언어와 역동적으로 조합해 이야기를 풀어내는 공연 양식이다. 흔히 만나기 어려운 피지컬 시어터 장르 두 작품이 서울 대학로 무대에 나란히 오르고 있다. 소극장을 가득 채운 관객들은 배우들이 몸짓언어로 전하는 이야기 속으로 빨려들어 속절없이 울고 웃는다. 마법 같은 무대다.

◇신경과학, 신체 언어와 만나다

“아빠, 남색 재킷은 행어 맨 끝에, 빨간 넥타이는 주머니에 있어요.” ‘네이처 오브 포겟팅’의 시작은 치매를 앓는 55세 남자의 생일, 딸의 이 쉬운 말도 남자는 행동으로 옮기지 못한다. 대신 행어의 서로 다른 색깔 옷에 손을 댈 때마다 남자는 옛 기억 속으로 빠져든다. 아내를 처음 만났던 학창 시절, 교실에서 웃고 떠들다 처음 쪽지를 주고받던 날, 첫 데이트를 하던 극장의 기억, 결혼과 출산, 말다툼. 아름답거나 괴로운 기억들은 이어지고 끊기고 구겨지고 확장되다 끝내 부서진다. 배우들은 무대 위가 마치 자유자재로 속도를 조절하는 동영상 속인 듯 그 기억을 오직 몸짓으로 재현한다. 관객은 이 기억의 혼돈 속으로 빨려 들어가 희로애락의 물결에 휩쓸린다.

제작사 연극열전이 만든 라이선스 공연. 원작자인 영국 극단 시어터 리(Theater Re)는 16개월간 런던대 신경과학자 팀과 협업해 치매 환자들과 워크숍을 열고 알츠하이머 환자 및 가족을 인터뷰하며 기억의 구성과 해체, 재구성과 오류에 관한 신경과학의 최신 성과들을 흡수했다. 이 극은 인간의 기억에 대한 과학의 새로운 발견을 배우들이 가진 몸의 상상력으로 다시 써 내려간 결과물이다.

사람의 뇌는 기억을 위해 먼저 공간을 구현한다는 점에 착안, 배우들은 장소를 먼저 구성하고 사람과 상황을 채워나간다. 여자 친구를 태운 자전거의 페달을 밟으며 달려나가는 ‘자전거 꿈(Bicycle Dream)’ 장면에선 상쾌한 공기가 뺨을 스치는 듯하고, 결혼식의 혼돈을 표현하는 ‘결혼 연회(Banquet Trans)’에선 극한의 행복과 그 기억을 잃어가는 아픔이 객석으로 밀려든다.

2019년 오리지널 내한 7회 공연이 전석 매진, 2022년 4월 라이선스 2주 공연도 전석 매진. 이번 라이선스 재연 역시 70% 이상 객석 점유율을 기록 중이다. 공연은 대학로 아트원씨어터 2관에서 28일까지.

◇자폐인 머릿속 세상을 무대에

올해 창단 20주년인 극단 ‘공연 배달 서비스 간다’(이하 ‘간다’)의 공연 ‘템플’의 키워드는 ‘자폐’다. “뇌과학 책을 읽다가 자폐가 있는 미국 동물학자 템플 그렌딘 이야기를 만났어요. 안무가 심새인에게 말했죠. ‘추상적 개념은 이해 못 하고 시각 이미지로만 세상을 보는 사람이 있어. 그 사람이 보는 세상이 무대에서 관객들에게 보이도록, 안무를 해야 되는 거야.’ 눈을 반짝반짝 빛내면서 자기가 하겠다던걸요, 하하.”

‘간다’ 대표 민준호 연출은 어디에서도 본 적 없는 형식의 공연 ‘템플’이 태어나게 된 시작을 이렇게 기억했다. 그는 ‘템플’의 극본을 쓰고 안무가 심새인과 함께 공동 연출했다. 자폐는 냉담한 부모 때문에 생긴 트라우마가 원인이라 여겨지던 시대, 모든 편견을 극복하고 미국 내 가축 시설의 60%를 설계한 동물학자가 된 템플 그렌딘의 이야기에 객석은 매회 눈물바다가 된다.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의 실제 모델로 화제가 됐던 사람이다.

템플의 삶은 자폐만큼이나 두꺼운 편견의 벽 앞에 자주 가로막힌다. 자폐는 장애가 아니라 뇌 작동 방식이 다른 것임을 몰랐던 시절. 자폐가 있는 사람은 왜 신체적 접촉을 고통스러워하는지, 왜 때때로 폭력적으로 변하는지 아무도 이해 못 하던 때, 딸을 이해하고 한 인간으로 키우려는 엄마의 눈물겨운 노력과 한 발씩 자기 자신을 알아가며 변화해가는 그렌딘의 노력이 눈물겹다. 한 아이가 어른으로 자라기 위해선 부모와 가족뿐 아니라 수많은 주변 사람의 이해와 사랑이 필요했다. 그 이해와 사랑은 그렌딘뿐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기도 하다.

‘네이처 오브 포겟팅’과 달리 대사가 있지만, 극 진행의 주요한 요소를 몸짓 언어로 표현하는 극단 ‘간다’의 스타일이 잘 드러나는 연극. 극도로 민감해진 사춘기 소녀 그렌딘의 신경 발작을 붉은 로프와 조명, 배우들의 몸짓으로 표현하는 장면, 추상적 개념을 이해할 수 없던 그렌딘이 공사 중인 기숙사 사다리를 올라 창문 밖 풍경을 내다보며 마침내 ‘천국의 문’과 ‘구원’ 같은 개념을 이해하게 되는 장면은 연극이 끝나도 오래 마음에 남는다.

“사람은 일생 중에 독립적인 존재가 되기 위해 하나의 문을 걸어 나가야 할 때가 있습니다”로 시작되는 그렌딘의 대학 졸업 연설이 시작되는 엔딩에 이르면 객석에 눈물 흘리지 않는 사람을 찾기 힘들다. 놀라운 공감의 힘을 가진 신체극이다. 공연은 대학로 서경대 공연예술센터 1관에서 2월 18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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