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헌 살롱] [1428] 선비의 사귐-허여(許與)

조용헌 건국대 석좌교수·문화컨텐츠학 2024. 1. 8.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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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풍(古風)이 그립다. 옛날 냄새를 어디 가서 맡을 수 있을까. 안동에 가면 고택(古宅), 고문(古文)이 아직 멸종되지 않고 남아 있다. 돈도 안 되는(?) 고택과 고문을 아직도 부여잡고 몸으로 지키고 있는 안동 양반 집안 후손들을 보면 그저 고마운 생각이 든다. 이 사람들이 없으면 어디에 가서 조선 선비의 체취를 맡을 수 있단 말인가!

학봉(鶴峯) 김성일(1538-1593) 종가의 삼남 김종성(73). 사귄 지는 25년쯤 되는 것 같다. 영남 가풍을 잘 몰랐던 호남 출신 필자에게 안동 추로지향(鄒魯之鄕)의 깊은 이야기들을 해준 인물이다. 그 가운데 하나가 허여(許與)에 대한 이야기였다. ‘허여’는 깊은 사귐을 가리킨다. 서로 간에 ‘허여’가 되는 관계는 동지적 결속을 의미한다. 상대방에 대한 인격적인 신뢰가 깔려 있는 관계이다. 난세에는 서로 행보를 같이하는 운명 공동체까지 간다. 그러니까 허여의 관계는 아무하고나 쉽게 맺는 관계가 아니다. 상당한 관찰과 검증을 거쳐야만 허여가 되는 법이다.

60년대 초반. 한학자 벽사(碧史) 이우성(1925-2017)이 30대 후반의 새파란 시절이었다. 학봉종가를 찾아가서 고문서를 좀 보고 싶다고 부탁하였다. 당시 종손은 김시인(金時寅, 1917-2008). 필자도 여러번 뵈었지만 약간 무뚝뚝하면서 쉽게 범접하기 어려운 카리스마를 풍기는 선비였다. 김시인은 초면의 벽사 요청을 단번에 거절하였다. ‘안 됩니다’. 얼마 후에 벽사가 두 번째로 찾아갔을 때에도 거절하였다. ‘우리 집안 문서를 함부로 보여줄수 없습니다’. 세 번째 찾아갔을 때 벽사는 김시인에게 “저도 계남(溪南) 출입입니다”라고 하였다. “계남 어디요?” “쌍취당(雙翠堂) 사위입니다”. 계남은 도산서원 근처의 냇물인 토계(兎溪)의 남쪽에 있는 마을 이름이다. 퇴계 후손들의 집성촌이다.

계남에 살았던 쌍취당은 종손 김시인의 증조부인 서산(西山) 김흥락(金興洛,1827-1899)의 매형인 이만운을 가리킨다. 벽사의 부인이 쌍취당의 증손녀이다. 김시인의 고모가로 8촌이 되는 셈이다. “계남 쌍취당이라면 문서를 보여 드려야죠”.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김시인과 8세 연하의 벽사는 허여의 관계가 되었다. 물심양면으로 지원하였음은 물론이다. 1987년 학봉가의 고문서를 보관하는 운장각(雲章閣)을 건립할 때 그 이름도 벽사가 작명한 것이다. 90년대 중반부터 영남학파의 좌장 역할을 하였던 벽사는 학문이 한참 무르익기 시작하던 젊은 시절에 학봉가와 이런 허여가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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