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줌인/임현석]거장의 마지막 대답

임현석 DX본부 전략팀 기자 2024. 1. 7. 2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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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류이치 사카모토: 오퍼스’는 피아노를 연주하는 고인의 검버섯 핀 얼굴과 지휘하는 듯한 손짓, 가시처럼 마른 손을 찬찬히 담았다. 엣나인필름 제공
사카모토 류이치(坂本龍一·1952∼2023)의 마지막 연주는 재작년 9월에 촬영됐다. 그가 온몸으로 전이된 암과 투병 중이던 때다. 굽은 등, 옴팍한 볼, 야윈 손가락에서 이미 병세가 완연해 보인다. 죽음을 예감한 이의 마지막 연주.

자리를 청한 건 사카모토 본인이다. 사카모토는 2020년 12월 11일 암으로 인해 이대로 두면 살 날이 6개월뿐이라는 통보를 받는다. 그럼에도 사카모토는 바로 다음 날 온라인으로 전 세계에 송출될 솔로 콘서트에 예정대로 나선다. 그는 스태프들에겐 시한부 통보를 받은 사실을 알리지 않았고, 그날 표정 변화가 거의 없는 얼굴로 담담히 연주한다.

임현석 DX본부 전략팀 기자
그러나 실제로는 죽음을 머릿속에서 떨쳐낼 순 없었고, 자신의 연주를 썩 만족스럽게 여기지 않았다. 이 완벽주의자는 생각했다. 한 번 더 납득할 수 있는 연주를 하고 싶다고. 사카모토는 자신의 스완송(Swan Song·최후의 작품 내지는 활동)을 완성시켜줄 사람으로 영화감독 소라 네오를 찾아간다. 소라는 자신의 아들(어머니의 성을 따른다)이다.

아들은 마지막 연주를 찍기로 승낙하면서 연주할 곡 목록부터 정해줄 것을 요청했고, 사카모토는 음악가로서의 삶을 관통하는 스무 곡을 미리 선별한다. 연주 장소는 사카모토가 일본에서 가장 좋은 소리를 내는 곳으로 여긴 ‘NHK 509 스튜디오’. 촬영은 7일간 이뤄졌으니, 하루에 대략 세 곡씩이다. 곡마다 2∼3번씩 테이크.

소라 감독은 사카모토의 마지막을 담은 영화 ‘류이치 사카모토: 오퍼스’(이하 오퍼스)에서 가장 인상적인 대목으로 열한 번째 곡 ‘통푸(Tong Poo)’ 연주 장면을 꼽는다. 그 장면에서 사카모토는 연주 안에 젊은 날의 작의를 담아내기 위해 분투하고 있다. 하지만 도무지 손이 받쳐주질 않는다. 몸이 쇠한 그는 악보대로 타건하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럴수록 스튜디오에 설치된 세 대의 4K 카메라는 사카모토의 표정과 손을 파고든다. 사카모토는 거의 울먹이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사카모토의 팬이라면 하필 그가 어려워하는 그 곡이 통푸라는 게 저릿할 수밖에.

사카모토가 마지막 연주를 위해 선별한 스무 곡이 각 시절을 상징한다면, 통푸는 사카모토의 청년기에 해당한다. 한때 그는 백남준의 전위 예술과 영화 문법을 파괴하는 장뤼크 고다르의 영화에 심취했다. 고다르의 영화 제목 ‘동풍’(東風·일본식 발음은 통푸)과 ‘중국 여인’을 자신의 음악 여정 중 초창기에 몸담은 옐로 매직 오케스트라(YMO) 곡 제목으로 가져왔을 정도.

고다르를 의식하며 작곡한 통푸는 젊은 사카모토의 미래 선언문 같기도 하다. 1978년에 무기적이고도 단속적인 기계음을 중심에 놓고 만든 이 곡을 듣고 있노라면, 그가 자신의 전도유망함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다는 점이 매우 강하게 와닿는다. 그는 고교 1학년 때 쓴 곡으로도 도쿄예술대 작곡과에 합격할 만하다고 평가받은 천재 아니던가.

그는 1983년 YMO 해체 이후 영화 음악가이면서 배우, 모델로서도 명성을 쌓는다. 그러면서도 피아노 연주자 커리어를 포기하지 않았다. 그의 피아노 독주에서도 통푸는 포함됐는데, 원곡처럼 빠른 템포로 어레인지했다. 여전히 음은 조밀하고, 틈을 허용하지 않는다. 젊은 시절의 연주는 에너지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마지막 연주에서 통푸는 다르다. 그는 간신히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한 발씩 나아갈 때마다 음을 아주 깊숙한 심연으로 떨어트리면서다. 소라 감독은 힘에 부친 사카모토를 그대로 담았다. 소라 감독이 가장 인상적이라고 말할 때, 그건 사카모토의 젊은 날과 말년의 교차를 뜻하는 것이다.

오랜 시간을 거친 뒤 한계에 직면한 인간이 거기에 있다. 사카모토가 한계 속에서 분투하는 장면은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의 내면과 회한까지도 넘겨 보게끔 한다. 사카모토가 숨을 고르며 연주를 이어가는 동안 음 사이는 넓어진다. 그리고 이는 곡과 곡 사이에 있는 여백과도 포개진다. 그 진공 속에선 낮은 기침 소리나 흐느낌, 벅찬 숨소리까지도 음악이 돼서 뒤섞인다.

그것은 벅차기도 애처롭기도 해서 도대체 음악이란 무엇이기에 이렇게까지 전념하고 있느냐고 묻고 싶어진다. 그리고 그 질문에 사카모토는 말없이 연주를 이어간다. 영상 속 그는 평생에 걸쳐 대답하고 있다.

임현석 DX본부 전략팀 기자 lh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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