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진핑도 언급했던 '노량해전'의 이순신과 진린
진린은 어떤 인물이었나… 실제 기록도 영화처럼 다면적
이순신에게 존칭 쓰고 죽음에 크게 슬퍼했던 진린
일제강점기 소설 때 부정적 묘사, 한중협력 필요할 땐 '한중우호' 상징으로
[미디어오늘 금준경 기자]
영화 <노량>이 정재영이 연기한 명나라 수군 도독 진린을 큰 비중으로 다루면서 진린에 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 기록을 보면 진린 도독에 대한 다양한 평가가 가능한 가운데 일제강점기 이광수 소설에선 폄하됐고, 한중 협력 국면에선 '한중우호'의 상징으로 다시 부각되기도 했다.
포악하고 탐욕 vs 욕심 없는 명장
영화 <노량>에서 진린 도독은 다면적이다. 포악하고 탐욕스러운 면이 그려지는가 하면 진심으로 이순신을 존중하고 용기 있게 전투에 임하는 모습도 나타난다.
실제 진린 도독에 대한 기록도 여러 평가가 가능하다. 유성룡이 쓴 <징비록>에선 진린의 군사들이 사신 접대를 담당하는 관리의 목을 줄로 매고 끌고 다녀 피투성이로 만든 대목이 나온다. <징비록>은 진린을 가리켜 “성격이 포악하고 남과 어울리지 못하는 사람이어서 모두 그를 꺼려했다”고 했다.
영화 <노량>에는 진린 도독이 철군을 하려는 고니시 유키나가로부터 뇌물을 받는 모습이 나오는데 이순신 장군의 사후 조카 이분이 쓴 <이충무공행록>에 유사한 장면이 나온다. <선조실록>에 따르면 진린 도독이 공을 세우지 못한 상황에서 공을 세운 것처럼 허위 보고를 했으나, 이순신 장군이 진린 도독이 난처해지지 않도록 수급을 양보하는 모습이 그려진다.
반면 진린 재평가 과정에서 언급된 기록들을 보면 상반되는 면도 많다. 이순신 장군이 쓴 <난중일기>에는 “도독이 보자고 하기에 갔더니, 도독이 말하길 순천 왜교의 적들이 10일 사이에 철수하여 도망한다는 기별이 육지로부터 왔으니, 급히 진군하여 돌아가는 길을 끊어 막자고 했다”는 내용이 있다. 이 때는 노량해전 열흘 전으로 진린 도독이 적극적으로 공격을 제안하는 모습이다. <선조실록>에는 이항복이 진린 도독을 가리켜 “명장입니다”라고 선조에게 설명하는 대목이 나온다. 또 진린 도독이 선조에게 선물을 받자 값비싼 것들은 돌려보냈다는 기록도 있다.
이순신과 진린의 관계는?
영화에선 진린 도독이 이순신 장군에게 '노야'라는 호칭을 쓴다. 실제 '연려실기술' '이충무공행록' 등 기록을 보면 이순신 장군에게 '이야'(李爺), '노야'(老爺)라는 호칭을 썼다고 한다. '야'(爺)는 윗사람에게 쓰는 존칭인데, 진린 도독은 이순신 장군보다 나이가 많았음에도 이 호칭을 썼다는 점에서 이순신 장군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보여주는 대목이다.
'충무공 이순신 신도비'에는 전쟁이 끝난 후 진린 도독이 선조에게 이순신 장군은 큰 공로가 있다고 밝혔다는 내용이 있다. 조선 후기에 쓰인 <연려실기술>은 진린 도독이 이순신 장군의 전공을 명나라 황제에게 알렸다는 내용이 있는 등 이순신 장군을 높게 평가했다.
진린 도독은 이순신 장군의 죽음에 크게 슬퍼했다. <선조수정실록>은 노량해전 직후 상황을 이렇게 묘사한다. “진린이 이순신에게 사람을 보내 자기를 구해준 것을 사례하다 비로소 그의 죽음을 듣고는 놀라 의자에서 떨어져 가슴을 치며 통곡했다.” <연려실기술>은 “이순신의 죽음을 듣자 진린은 배에서 엎어지고 넘어지기를 세 번이나 하면서, '함께 일할 이가 없구나'라고 했다”라고 기록했다. <제조번방지>에 따르면 진린 도독이 한양으로 향하던 중 이순신 장군의 고향에 들러 곡하고 그 아내와 아들을 조문했다는 기록도 있다.
명나라 황제가 이순신 장군에게 하사한 것으로 알려진 '팔사품'(여덟가지 물건)이 황제가 하사한 것이 아닌 진린 도독이 이순신 장군 가족에게 선물한 것이라는 주장도 제기됐다. 2014년 장경희 한서대 문화재보존학과 교수는 실제 황제의 공식 인장과 다르고 이순신 장군과 진린 도독의 사이가 각별한 점 등을 이유로 제시했다.
다시 소환된 진린
진린 도독은 시대에 따라 평가가 극단적으로 바뀌기도 하고, 새롭게 의미부여되기도 한다. 조선시대 당대 기록에는 진린과 명나라에 대한 긍정적 기록이 많지만, 일제강점기 이광수가 쓴 소설 <이순신>에선 진린과 명나라가 시종일관 부정적으로 묘사된다. 심지어 이순신 장군 죽음의 책임이 진린 도독에게 있는 것처럼 다뤄진다.
<이순신 서사에 나타난 명(明) 인식> 논문은 “이광수의 <이순신>이 작품이 연재되었던 1931년 6월 26일부터 1932년 4월3일은 일본의 대륙 침략이 본격화된 시기이자, 중국과 직접적인 무력충돌을 벌이던 시기”라며 일본 식민지 당시 상황과 일제의 통제 아래 놓인 신문 연재소설인 점을 고려해 일본의 적인 중국에 대한 부정적 묘사로 채웠을 가능성을 제시했다.
이 부정적 묘사는 이후 이순신 장군을 다룬 여러 소설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는데, 2004년 방영된 KBS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서도 <노량>과 달리 진린에 대해선 부정적인 모습이 크게 부각된다.
최근엔 재평가가 이뤄지고 있다. 장경희 한서대 교수의 진린 연구가 대표적이다. 그는 2014년 중앙일보 인터뷰에서 “지금까지 한국에서의 진린에 대한 평가는 가혹할 정도로 왜곡돼 있다”고 했다. 이후 2017년 완도군이 '이순신 진린 장군 선양사업'을 하며 관련 학술 논의가 이어졌다.
진린 도독은 한국과 중국의 협력 국면에서 다시 소환됐다. 박근혜 정부 때인 2014년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서울대 강연에서 “임진왜란 때 양국 백성과 군인들이 어깨를 나란히 하며 싸웠다”며 “명나라 등자룡 장군과 이순신 장군이 노량해전에서 함께 전사했다. 명나라 장군 진린의 후손은 오늘날 한국에서 살고 있다”고 했다. 2017년 문재인 대통령은 베이징대 강연에서 진린 도독의 후손이 한국에 살고 있다고 했다. 진린 도독의 후손들은 명나라 멸망 이후 조선에 귀화해 광동 진씨의 시조가 됐다.
일제강점기 명나라와 진린 도독에 대한 부정적 묘사가 등장했다면 한중 협력이 강조되는 시점에선 협력의 상징으로 조명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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