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멘토링] 입으로만 떠드는 참 이상한 정치꾼들

이남석 발행인 2024. 1. 7. 2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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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찰·열정·소통의 리더 이순신 49편
명군과 왜군의 물밑 강화교섭
교섭에서 완전히 배제된 조선
하삼도 경략 요구한 명나라
明 조선 압박하려 철군 단행
입으로만 강화 반대 떠든 대신들
말만 앞선 지금의 정치인과 닮아

1593년 5월 명나라와 왜국은 물밑 '강화교섭' 과정에서 조선을 완전히 배제했다. 나라의 절반가량인 하삼도(전라도·경상도·충청도)를 왜국에 넘겨줘야 할지도 몰랐지만, 조선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조선 대신들은 입으로만 대책 마련을 떠들어댔다. 3고高(고물가·고금리·고환율) 장기화로 민생은 벼랑 끝에 몰렸는데, 여전히 입으로만 '국민! 국민'을 외치는 어떤 사람들이 오버랩된다.

우리 정치 지도자들은 위기를 돌파할 만한 대책을 만들고 있을까.[사진=게티이미지뱅크] 

조선이 이순신을 조선 최초의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하기 전 부터 명군과 왜군은 '강화교섭'을 화두로 삼고 있었다. 명나라의 강화사절이 왜나라를 향해 부산을 출발한 1593년 5월 9일부터 수면 위로 부상한 휴전 논의를 두고 명군과 왜군 내부에선 찬반이 대립했다. 서로 내건 조건들이 상호간에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든 내용들이어서 협상은 평행선을 달리고 있었다.

이때 조선 조정에서는 '강화' 또는 '휴전'이라는 단어 자체를 꺼낼 수도 없는 분위기였다. 우선, 6월 제2차 진주성전투에서 왜군의 악랄한 민간인 살육과 약탈 행위로 받은 충격이 너무 컸다. 게다가 왜군은 여전히 경상도 지역에서 수많은 왜성을 쌓고 4만여명의 병력을 주둔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명나라 강화론자들의 입지가 약화되는 듯했다. 하지만 결국 명나라는 왜나라의 화친을 받아들이는 방향으로 선회했다.

명나라는 선조와 조선 대신들이 왜나라와의 화친을 반대하지 못하도록 다양한 방법을 썼다. 강화사절로 건너가 풍신수길을 만난 명나라 사절단은 7월 15일 부산으로 귀환하면서 조선을 어르고 달랠 만한 보따리를 안고 왔다.

먼저 진주성을 점령했던 왜군이 7월 14일 퇴군했다. 그로부터 8일 후인 7월 22일 왜군은 임진년 여름 함경도에서 근왕병을 모집하다 제2군 대장 가등청정(가토 기요마사)에게 포로로 잡혔던 임해군과 순화군 두 왕자를 석방했다.

선조는 명나라와 왜나라의 화친이 반가울 리 없었다. 군사력을 명군에 의지하고 있는 처지였지만 한시라도 빨리 왜적을 조선 땅에서 몰아내고 싶어 했다. 그러자 강화론자인 명나라 병부상서 석성은 조선의 고위 공직자들과 선조를 압박했다.

무엇보다 명군을 철수시키겠다고 윽박질렀다. 광해군에겐 조선의 하삼도(경상도·전라도·충청도)를 경략經略(점령한 지방이나 나라를 다스리는 일)하도록 요구했다. 하삼도의 관할을 사실상 왜나라에 넘겨주라는 거였다.

실제로 명나라는 8월 초에 일부 병력만 남겨두도록 하고 요동 제독 이여송을 비롯한 명군 3만여명의 철군을 단행했다. 그러자 조선 조정은 명나라의 요구대로 하삼도 무군사撫軍司를 설치하고 광해군과 좌의정 윤두수 등을 파견했다.

강화교섭은 조선의 입장에서는 커다란 위기가 아닐 수 없었다. 자칫하면 조선은 스스로의 의지와 관계없이 나라의 절반가량인 하삼도를 왜적에게 내줘야 할 판이었다. 그럼에도 조선 조정 대신들 가운데 이런 위기를 돌파할 대책을 마련하려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왜적을 물리칠 만한 전략을 세우는 대신 입으로만 강화반대를 떠들었다. 그러다 결국에는 "강화를 통해 전쟁을 마무리 짓고 나중에 힘을 길러 복수를 하자"는 목소리도 나왔다.

이때 이순신은 조선 수군의 본영을 한산도로 이전하겠다는 요청을 조정에 올려 허가를 얻었다. 전라좌수영은 적을 방어하기에는 지나치게 한쪽에 치우쳐 불편하고 한산도는 왜적과 싸우는 데 있어 요충지였기 때문에 조정에서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이순신은 한산도에서 가장 절박했던 문제 중의 하나인 군량미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둔전 경영을 도입했다. 노약한 병력뿐만 아니라 경상·전라·충청 삼도 연해의 각 읍, 각 관포, 각 도서, 각 진보에 전쟁으로 떠도는 백성을 모아 농사를 짓도록 했다.

그렇게 둔전 지역은 순천의 돌산도, 흥양의 도양장, 해남의 황원곶, 강진의 화이도 등 남해 연안 지역으로 확대했다. 둔전 외에도 자염煮鹽(바닷물을 졸여서 소금을 만듦), 포어鮑魚 등도 시행했다. 소금을 굽게 하고 어로와 가축 기르기 등으로 수익을 올려 미곡 수십만석과 소금 수만석을 비축했다.

무기제작과 개발에도 힘썼다. 참나무와 대나무를 배양해 창과 활을 만들었고, 왜적의 주력 무기인 조총과 조선의 조총인 승자총통, 쌍혈총통의 장단점을 보완해 순수한 철로 만든 '정철총통'을 개발해냈다. 정철총통을 개발한 기쁨이 얼마나 컸던지 이순신은 선조에게 공을 세운 노비들의 이름까지 넣은 장계를 8월 13일 선조에게 올렸다.

"왜군의 조총은 총신이 길고 총구가 깊어 포력이 맹렬한 반면, 아군의 승자나 쌍혈 총통은 총신이 짧아 왜군의 조총만 못하므로 새로 만들어보고자 하니, 신의 군관인 정사준이 묘법을 생각해 내서 대장장이 이필종과 노비 안성, 동지, 언복 등과 함께 정철총통을 만들어 5자루를 봉하여 올려 보내오니, 엎드려 바라건대 각 도와 관아에 제조하기를 명하여 주시옵소서."

전선 건조에도 힘을 쏟았다. 이순신은 당초 조선 수군의 전선을 250척 규모로 늘리고자 했다. 당시 조선 수군이 보유한 전력은 100여척으로 500여척의 동원능력을 보유한 왜군과 비교가 되지 않았다. 이순신의 꾸준한 노력에 힘입어 1594년 갑오년엔 140여척,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났을 땐 180척 규모의 함대를 갖출 수 있었다.

여기가 끝이 아니었다. 이순신은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총동원해 병력을 충원했다. 도망치는 수군은 일벌백계로 다스리며 탈영을 최소화했고, 굶주림을 피해 수군 진영의 둔전에 모여든 백성들 가운데 일부를 수군에 편입하기도 했다.

이순신은 명나라와 왜국이 강화협상을 벌일 때에도 전쟁에 대비했다.[사진=더스쿠프 포토] 

이순신이 이처럼 조선이 당면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피땀 어린 열정을 바치고 있었다. 그럼에도 명군과 왜군은 물밑 강화교섭을 계속 진행하고 있었다. 이같은 분위기 때문인지 한동안 커다란 전투가 일어나지는 않았다.

사헌부와 조정 대신들은 물론 사대부들이 앞다퉈 선조에게 환도를 요청했다. 평양성에 있던 선조는 뜸 들이기와 갈팡질팡을 거듭하다 마침내 1593년 10월 4일 한양으로 복귀했다. 이때 선조는 조정의 분위기를 쇄신하는 차원에서 류성룡을 다시 영의정으로 임명하고 곽재우를 성주목사로 제수해 본도 조방장을 겸임케 했다. 행주대첩의 전공으로 6월 6일 도원수로 임명된 권율의 직책은 그대로 유지했다. <다음호에 계속>

이남석 더스쿠프 발행인
cvo@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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