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물상] 광역버스 대란
얼마 전 방영된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는 경기도의 한 소도시에 사는 주인공 삼남매가 서울로 출퇴근하는 일상을 배경으로 했다. 삼남매는 ‘산 넘고 물 건너’ 서울 직장에 다니느라 연애할 시간도 없다. 저녁에 활동하는 회사 동아리에 들어가는 건 사치다. 드라마에서 주인공은 “경기도는 서울을 감싸는 계란 흰자”라고 말한다. ‘서울 공화국’에 편입되지 못한 서민들의 고단함이 느껴지는 명대사였다.
▶장거리 출퇴근족들이 애용하는 수단이 소도시와 서울 도심을 직행으로 연결하는 광역 버스다. 일명 ‘레드 버스’로 불리는 광역버스는 서울에 직장을 둔 경기도민들에게 생명줄과도 같다. 국토부 조사에 따르면 수도권 직장인은 출퇴근하는 데 하루 평균 120분을 쓴다. 평균 통계가 그렇다는 것이지 외곽 도시에서 마을버스를 시작으로 하루 3~4시간을 버스·지하철 안에서 보내야 하는 이들도 숱할 것이다. 그 시간을 이용해 책 읽거나 음악 듣고 자기만의 세계를 즐긴다는 사람도 있다.
▶2022년 말 광역버스 입석 금지 이후 수도권 출퇴근족이 더 고단해졌다. 만차(滿車)가 되면 하염없이 다음 차를 기다릴 수밖에 없다. 출근 시간을 30분 앞당겼는데도 버스 2~3대를 보내고 나서야 탈 수 있었다는 사람, 6대를 보내고 나서야 겨우 버스를 탔다는 체험담이 쏟아진다. “차가 막히기라도 하면 버스에서 몸이 절여지는 느낌”이라는 사람도 있다. 야근이나 회식이 늦어지면 막차 놓칠까 노심초사하는 것은 기본이다. 작년 8월부터 요금마저 왕복 6000원으로 올라 출근족들을 더욱 애태우게 한다.
▶광역버스 입석 금지는 이태원 참사 이후 안전 요구가 높아져 생긴 것이다. 그 여파로 ‘무정차 통과’ 등 광역버스 대란이 일어나자 정부와 지자체는 광역버스를 대폭 늘렸다. 그러자 이번에는 정류장에서 문제가 생겼다. “정류장 근처에선 버스가 걷는 것보다 느리다”는 민원이 폭주한 것이다. 도심 정류장 인프라는 쉽게 늘릴 수 없는 상황에서 발생한 것이 이번 명동 광역버스 대란이다.
▶서울시는 명동에 정차하는 광역버스 노선이 29개로 급증하자 지난달 말 정류장 인도에 줄서기 표지판을 설치했다. 이 시도는 예상치 못한 결과를 낳았다. 퇴근 시간마다 버스를 타려는 승객과 버스가 뒤엉키면서 일대에 대혼란이 생긴 것이다. 결국 오세훈 서울시장이 사과하고 일단 원래 시스템으로 복귀시켰다. 공무원들이 현장을 모르고 제도를 바꾸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생생하게 보여주는 사례다. 하필 추운 겨울에 광역버스 출퇴근족의 애환을 하나 더 보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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