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만권의 손길] 이 세상을 공유하지 않겠다는 마음

기자 2024. 1. 7. 20:12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민주적인 정치란
세상을 공유하는 법을 찾는 일
그런데 상당수가 이를 잊고 있다
‘악의 평범성’이 뿌리를 내리는
가장 비옥한 토양이 이런 곳이다

2024년 새해 첫 주요 정치뉴스는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 피습이었다. 경찰에 따르면, 현장에서 체포된 피의자는 “이재명 대표를 죽이려 했다”고 진술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일까? 그 원인은 여러 측면에서 분석할 수 있겠지만, 이런 정치인 피습은 대체로 정치적 적대 속에 혐오와 분열이 심해질 때 일어난다.

2016년 6월16일, 찬반으로 팽팽하게 맞서던 ‘브렉시트’ 국민투표를 일주일 남겨둔 시점에 영국 국민은 충격적인 소식에 머리를 감싸 쥐었다. 유럽연합 탈퇴에 반대하던 노동당의 조 콕스 하원의원이 잔혹하게 암살당했기 때문이다. 브렉시트에 찬성하던 50대 남성이 콕스 의원을 총으로 쏘고 그것도 모자라 흉기로 살해한 끔찍한 사건이었다.

이 무렵 영국에서 가장 중요한 쟁점은 이민자와 난민이었다. 브렉시트 찬성파들은 이들이 영국의 평범한 노동자들을 힘들게 만든다고, 더 나아가 영국 경제를 좀먹는다고 주장했다. 반면 국제구호단체인 ‘옥스팜’에서 10여년간 활동한 콕스 의원은 이민자와 난민들을 보호하는 데 적극적이었다. 표면적으로 보면, 자국의 노동자에게 무심하고 이민자와 난민을 옹호하던 정치인이 암살당한 사건이다.

하지만 콕스 의원이 숨지기 전까지 가장 열심히 펼쳤던 활동 중 하나가 영국 사회를 잠식하던 외로움에 맞서 싸우는 일이었다. 콕스 의원은 ‘수많은 사람이 도움 없이 외롭게 살아가는 나라에서 살고 싶지 않다’며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의회에 초당적 기구를 만들어 활동하고 있었다. 2018년 영국이 세계 최초로 외로움부를 만들었는데, 이는 바로 ‘조 콕스 외로움 문제 대책위원회’가 발간한 최종보고서에 따른 정책이었다.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나 집안에서 유일하게 대학에 진학한 콕스 의원은 방학이면 늘 아버지가 일하던 작은 치약 공장에서 치약 포장을 돕던 노동자의 딸이었다. 콕스 의원은 도움이 없는 이라면 누구에게라도 손을 내밀던 보기 드문 정치인이었다. 하지만 브렉시트의 열기 속에 깊어진 정치적 적대에 목숨을 잃고 말았다.

이처럼 정치적 적대는 우리의 눈을 가리곤 하는데, 깊어진 적대의 심연에 바로 ‘이 세상을 저들과 공유할 수 없다’는 신념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풀어 말하자면, 적대가 깊어질수록 ‘저들만 없다면 이 세상이 더 나아질 것’이라는 믿음이 굳건해지고, 그 믿음이 일상의 언어가 되고 행동이 된다.

해나 아렌트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언급하며 널리 알려진 ‘악의 평범성’에도 바로 ‘이 세상을 저들과 공유할 수 없다’는 신념이 자리 잡고 있다. 아렌트는 예루살렘에서 열린 이 재판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인류에 대한 범죄를 저질렀다면, 이 범죄를 재판할 곳은 이스라엘 법정이 아니라 국제재판소여야 한다고 보았다.

그럼에도 아렌트는 이스라엘 법정이 내린 ‘교수형’ 결정에는 찬성했는데, 그 이유는 아이히만이 “이 지구를 유대인 및 수많은 다른 민족의 사람들과 공유하길 원치 않는 정책을 지지하고 수행”했기 때문이다. 아렌트는 아이히만이 결코 사악한 동기를 지니고 행동한 게 아니란 걸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이 세계를 다른 이들과 공유하지 않겠다’는 신념은 받아들일 수 없는 ‘악’의 측면이라 보았다.

이런 신념은 반성할 줄 모르는, ‘사유하지 않는’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쉽게 스며들 수 있다. 더하여 정치적 적대가 깊어진 사회라면 더 쉽게 사람들의 마음에 깃들 수 있다. 적대에 내재한 혐오와 외면이야말로 우리의 눈과 귀를 가릴 뿐 아니라 이성적 판단의 능력마저 제거해 버리기 때문이다.

돌아보면, 갈라진 마음을 새삼 확인할 수 있었던 2022년 대선 이후 우리 사회는 온통 적대의 언어로 가득 차 있다. 정치에서 적대를 제거하는 데 가장 중요한 ‘협상, 협의, 합의’라는 수단은 사실상 사라져 버렸다. 상대방에 대한 혐오와 외면이 그 빈자리를 채우고 있다.

이재명 대표 피습은 이를 확인할 수 있는 계기였다. 언론 보도를 보면, 지난 2일 대전에서 열린 국민의힘 신년인사회에서 한동훈 비상대책위원장이 이 대표 피습을 말하자 박수와 환호가 터져 나와 이를 제지하는 소동이 벌어졌다고 한다. ‘상대방에 가해진 테러에 대한 박수와 환호’, 이것이 지금 우리 정치의 한 단면이다.

민주적인 정치란 ‘이 세상을 다른 이들과 공유하는 법을 찾는 일’이다. 그런데 우리 중 상당수가 이를 잊고 있거나 외면한다. ‘악의 평범성’이 뿌리를 내리는 가장 비옥한 토양이 바로 이런 곳이다.

김만권 경희대 학술연구교수·정치철학자

김만권 경희대 학술연구교수·정치철학자

Copyright © 경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