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 “통제 일색 ‘탁상 행정’… 기업 활동 더 위축시킬 것” [산업기술보호법 개정안 논란]

이현미 2024. 1. 7. 1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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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에 공장 세우고 물자 이전하려면
해외 파트너사도 절차 밟도록 강제해
업계 “첨단기술분야 공동투자 많은데
각종 서류 내라고 하면 굳이 응하겠나”
당국선 “국가핵심기술 책임성 가져야”

정부가 추진 중인 ‘산업기술보호법’ 개정안이 산업계와 별다른 소통 없이 일방 추진되면서 관(官)의 통제 일색 개정안이 만들어졌다는 원성이 재계에서 터져나오고 있다.

7일 재계에 따르면 기업들은 핵심기술 기업 일괄 신고·등록 의무화, 해외 인수·합병·합작투자 시 외국인도 승인 심사 의무 적용, 기술 유출 정황 포착 시 산업통상자원부에 즉각 신고, 사업중단 등 조치명령·처벌 강화 등을 골자로 하는 개정안이 현 제도에 허점이 있어 보완하는 것처럼 포장하고 있지만 실상은 규제를 추가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국가 핵심기술을 보유한 한국 기업과 합작 투자 등을 하려는 외국 기업들에게 한국 정부의 승인 심사를 받게 하는 내용으로 산업기술보호법 개정이 추진돼 주요 수출 기업들이 반발하고 있다. 사진은 지난달 서울 중구 대한상공회의소에서 제47회 산업기술보호위원회가 열리고 있는 모습. 연합뉴스
현재 국가핵심기술을 보유한 한국 기업이 단독이든 해외 기업과의 합작 형태든 해외 공장을 세우고 현지에 물자 이전을 계획한다면 산업부 산하 산업기술보호전문위원회의 수출 승인 심사를 거쳐야 한다. 미국이 기술 모듈화 보호조치를 하는 것처럼 한국 정부도 기술 보호 조치와 이를 감시할 주재원 파견, 본사의 상시 감독 등을 기업에 요구하며 의무를 부여한다. 외국 기업이 한국에 투자할 때는 ‘외국인 투자촉진법’에 의거해 외국인 투자안보심사 전문위원회의 검토가 들어간다.

특히 중국의 국내 투자 시에는 경제안보 우려가 있어 외국인 투자안보심사 전문위원회의 검토를 받는데, 최근에는 미국 인플레이션감축법(IRA)의 여파로 대부분 수출 기업이 중국에서 철수하고 미국, 유럽과의 협력을 확대하고 있다.

개정안은 이 과정에서 산업부 장관의 수출 승인을 받도록 하면서 해외 현지에서 한국 기업과 파트너십을 맺고 현지 사업을 계획하는 해외 기업에도 한국 정부의 승인 절차를 밟도록 강제하고 있다.

A사 관계자는 이날 통화에서 “우리가 미국, 유럽 사업장이 필요해서 현지 진출을 계획하는 상황에서 투자금 부담을 줄이고 현지 제도·행정 이해에 도움을 줄 수 있는 해외 기업과 파트너십을 맺을 때, 한국 정부가 기술 유출을 우려하며 해외 기업에 서류를 제출하라고 하는 것은 그 자체로 우리에게 부담이 된다”며 “한국 기업의 기술 보호 조치는 이미 수출 승인 심사 때 이뤄져 우리에게 의무가 부과되지 않느냐”고 말했다.

B사 관계자는 “첨단기술 분야에서 우리나라는 ‘갑’이 아니다”며 “특히 미국 IRA 여파로 미국·유럽에 공동 투자하는 사례가 많아졌는데 테슬라, 애플 같은 기업에 미국 내 공동 현지 법인 설립 논의를 할 때 한국 정부에 각종 서류를 내고 심사에 응하라고 하면 일본, 대만 등에 대체 기업이 있는 상황에서 굳이 우리랑 하려고 하겠느냐”고 지적했다. C사 관계자는 “산자위를 통과할 때까지 공청회 한 번 열지 않고 정부가 밀실에서 탁상 행정을 추진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산업부 관계자는 이에 대해 “해외 기업과의 합작 투자 과정에서 기술이 탈취되는 사례가 지금까지 분명히 발생해 왔다”며 “모든 기술에 다 하겠다는 게 아니라 정부의 보호 아래 성장한 국가핵심기술에 한해 해외 기업의 성격을 따지겠다는 것이고 (적합한 사업에 승인을) 안 해주겠다는 게 아니라 절차상의 문제”라고 반박했다. 이어 “기업이 해외 기업과 협상할 때 (한국 정부의 승인이라는) 조건이 하나 더 붙어 불편하긴 하겠지만 국가핵심기술에 대해 그 정도 책임성은 갖고 있어야 한다고 본다”고 말했다.

기술 유출의 주요 원인을 놓고 정부와 기업은 인식 차이를 보이고 있다. 기업에선 기술 유출의 주범은 몰래 기밀을 빼돌리며 퇴사·이직을 한 전직 직원인데 개정안은 기업에 대한 각종 의무·처벌 규정 위주로 반영됐다는 것이다.

A사 관계자는 “기업을 도우면서 기술 유출 피해를 최소화하려면 해외 법인의 보안 인력과 시스템을 강화하며 관리를 잘 하는 기업에 정부가 인센티브를 주는 형식으로 서로 뒷받침해 줘야 한다”고 말했다. 이번 개정안은 기업과 정부가 협업해 시너지를 내는 ‘팀 코리아’는 없고 행정기관의 심사, 직권 처분 능력이 강조됐다는 게 이들의 평가다.
사진=뉴스1
반면 산업부는 한국과 해외 기업의 인수·합병, 합작 투자 과정에서 우리 핵심기술이 해외에 유출된 사례가 엄연히 존재하고, 규제 강화가 핵심기술 보호에 기여할 것으로 보고 있다.

기업에선 산업부에 신고 의무를 강화한 규정을 놓고도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B사 관계자는 “지금도 기술 유출 정황이 파악되면 검·경 또는 국가정보원에 신고를 하고 있는데 행정기관에서 어떻게 수사, 조치하겠다는 것인지 의문”이라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민감한 이야기이지만 규제 기관으로서 산업부의 권한과 위상을 강화하려는 움직임으로 느껴진다”고 했다.

C사 관계자는 “개정안에 반영된 산업기술 알선·소개·유인하는 행위를 기술 침해행위로 규정한 부분은 지금 자문 중개업체, 컨설팅 업체를 통한 유출이 심각한 상황이라 필요한 조항으로 본다”며 “기업과 국가가 논의를 거쳐 산업계 현실을 반영한 대안을 만들 수도 있었을 텐데 일방적으로 추진한 점이 잘못됐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경제단체 관계자는 “산업기술보호법이 (기술을 유출한 개인에 대한) 형량 강화를 위주로 논의되고 있다고만 인식했고, 윤석열정부에서 추진하는 것이라 이렇게 센 규제가 반영될 줄은 몰랐다”며 “국가핵심기술을 보유한 기업이 결국 우리가 익히 아는 수출기업들인데 정부가 모든 해외기업과의 거래를 다 들여다보고 승인권을 쥐는 것이 과연 순기능이 더 많을지 의문”이라고 지적했다.

이번 개정안은 산업부가 낸 개정안을 포함해 국민의힘 구자근, 홍석준, 김성원, 안철수 의원과 더불어민주당 박병석, 이장섭, 김용민 의원, 무소속 윤관석 의원이 발의한 개정안이 산자위 논의 과정에서 통합돼 지난해 11월 위원회 대안이 전체회의를 통과했다.

이현미·배민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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